74. 한강공원
한강 공원.
“어우~ 추워.”
막 도착한 정 차장이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와 있던 손정진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 안녕. 일찍 왔네?”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오 팀장은?”
“아직 안 오셨죠~ 하하.”
지금은 11시 45분.
약속 시각은 12시 정각.
지혁은 11시 55분에 올 것이다.
그는 항상 정확히 5분 전에 도착하니까.
정 차장은 혹시나 지혁이 들을까 봐, 주변을 한번 살핀 뒤 투덜거렸다.
“아휴~ 무슨 이 날씨에 밖에서 운동을 한다고. 추워 죽겠는데.”
때는 2월 말.
다행히 오늘 포근한 편이었으나, 어쨌든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계절이었다.
“하여간 뭐 하나 평범한 게 없어. 평범한 게.”
“그래서 승진하셨잖아요.”
손정진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고.
“어?”
“팀장님이 평범하지 않으셔서, 특진하셨잖아요. 아니에요?”
“음······ 뭐 그렇긴 하지. 근데 너······.”
정 차장은 그의 말하는 태도가 불순하게 느껴졌다.
‘어디 사원이 차장한테 건방지게.’
“뭐 안 좋은 일 있냐?”
“······.”
“말투가 왜 이래?”
손정진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구든 우리 팀장님 흉보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야, 대꾸도 안 하냐? 안 되겠네? 아무리 우리 팀의 근본이 하극상이긴 하지만.”
지혁을 두고 말한 거였다.
정 차장은 팔을 걷어붙이고, 한소리 하려는데.
“날도 추운데 일찍 오셨네?”
마침, 지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 문 대리와 윤 부장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좀 전의 뾰로통한 표정은 일시에 사라지고, 손정진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히 웃었다.
“어, 옷 따뜻하게 입고 왔어?”
지혁의 물음에 손정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팀장님!”
“그래.”
지혁은 정 차장을 유심히 보았고, 정 차장은 괜히 찔려서 물었다.
“왜? 뭘 그렇게 봐?”
“안 추워요?”
“어?”
“이 날씨에 소매는 왜 걷고 있어요?”
“아~”
정 차장은 황급히 소매를 내린 뒤,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소매를 왜 걷었더라~”
“······.”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이동하시죠. 저기 식당에서 보기로 했어요.”
지혁은 한강 위에 떠있는 식당을 가리켰다.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알록달록한 건물. 중화요리 느낌이 확 나는 식당이었다.
“메뉴는 짐작되죠?”
정 차장은 팔짱을 끼고는 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 몰라. 추우니까. 일단 가자.”
***
“안녕하십니까!”
식당에 있던 스타덕 영업 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지혁을 향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영업팀에 지혁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업팀은 지혁에게 항상 깍듯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 팀장님~ 어서 오십시오.”
영업팀장이 악수를 건네며 다가왔고, 지혁은 그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인사했다.
“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생각지 못한 인물도 와 있었다.
“본부장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영업본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사람아. 오늘 승진 축하하려고 모인 자리라며. 나도 승진했는데? 끼면 안 되나?”
이번 정기 승진 때, 소문대로 영업본부장은 전무로 승진했다.
상품기획 팀원들은 영업본부장 얼굴을 마주한 후, 90도 각도로 인사하며 정신이 없었는데.
지혁은 그가 참 편했다.
“언제까지 본부장으로 계시는 거예요? 전무면 전무에 맞는 자리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꾸 보내려 하지 마라~ 상품본부장 보내더니, 이제 나까지 보내려는 거야?”
영업본부장의 너스레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깔깔대며 웃었다.
지혁도 피식 웃고는 말을 받았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사람들 오해해요.”
“괜찮아~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한 가족이야. 어서 앉게.”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나눠서 앉았고, 대낮이지만 이런 자리에서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음식도 나오기 전에, 영업팀장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오 팀장님과 시간을 갖는군요~ 꼭 술 한잔하고 싶었는데~”
“제가 술은 못 마십니다.”
“네? 아 네.”
영업팀장은 술병을 든 상태에서 어색하게 멈추었고.
지혁은 살짝 웃으며, 술병을 빼앗아 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술은 제가 따라드릴 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이 말에 영업팀장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하하. 네. 고맙습니다.”
지혁은 한 마디 더했다.
“근데,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오늘 운동하기로 했잖아요. 재밌게 하려면.”
“아, 오 팀장님, 운동 좋아하세요?”
“아주 좋아합니다. 설레어서 잠을 못 잤어요. 하하.”
지혁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뒤에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평소에 무슨 운동 하시는데요?”
“시간이 없어서 출근하기 전에 좀 달리고, 웨이트 하는 정도?”
“아~ 얼마나 하시는데요? 한 5km 뛰시나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땀이나 납니까. 15km 뛰고, 팔굽혀펴기 200회, 철봉 30회 정도요.”
“······.”
“아침부터 너무 힘 빼면 업무에 지장 가니까. 이 정도만 해요.”
영업팀장은 이 말이 사실인지 헷갈렸다.
‘뭐, 올림픽 나가? 운동을 매일 이렇게 한다고?’
“와~ 진짜 열심히 하시네요.”
‘남자들이 운동 횟수를 좀 과시하긴 하지만······.’
지혁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처럼 보이진 않았다.
영업팀장은 고개를 흔들고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희 팀원 중에 체대 출신들이 많거든요? 같이 운동하시기에 싱겁진 않으실 겁니다.”
“아, 그거 좋네요. 기대됩니다. 하하.”
지혁은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
식사 마친 후, 오후 3시쯤 한강 공원으로 나왔다.
직원들은 계속 술 마시고 놀고 싶었으나, 지혁의 채근에 못 이겨 결국 다 나온 것이다.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다행히 추위가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영업팀장님! 뭐 할까요?”
술기운에 얼굴이 발그스레한 영업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요. 인원수를 봤을 때는 족구나 풋살이 좋을 거 같은데.”
“풋살 하시죠.”
지혁은 곧바로 종목을 정해버렸다.
“몸 부딪치는 게 재밌죠.”
“네? 아, 네.”
영업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팀은 어떻게······ 섞어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희 팀원들 운동 실력이 워낙······.”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면 재미가 없죠. 영업팀 대 상품기획팀으로 하시죠. 저희가 5명이니까. 5 대 5로.”
“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영업본부장이 껴들었다.
“그럼 난 영업팀에서 뛰면 되나? 나 축구 좋아해~”
“저희야 감사하죠~”
영업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경기 시작 전, 지혁은 팀원들을 보았다.
사십 대 중반의 윤 부장. 삼십 대 후반의 정 차장과 문 대리. 그리고 손정진.
“평소에 운동 좀 하시는 분?”
“······.”
지혁은 아랫배만 볼록 나온 팀원들을 지켜보다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온 윤 부장을 불렀다.
“연장자 예우 차원에서······ 윤 부장님께 골키퍼를 볼 기회를 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그리고 지혁은 손정진을 바라봤다.
“정진아, 네가 많이 뛰어야 해.”
“알겠습니다!”
지혁은 팀원들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재밌게 하시죠. 다치지 않게.”
심판이 소리쳤다.
[1쿼터 10분씩, 총 4쿼터까지 진행하겠습니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는 시작되었다.
.
.
.
2쿼터까지 끝마친 후, 휴식 시간.
지혁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이런, 씨발······.”
현재 스코어 5-1.
4점 차로 지고 있었는데, 한 골 넣은 것도 상대편 실수로 인한 자책골이었다.
지혁은 잘 뛰었다.
발재간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피지컬이 좋아서 쉬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풋살은 혼자 다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고, 상품기획 팀원들은 개구멍이었다.
손정진은 처음으로 자신을 보는 지혁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봤다. 그로 인해 마음에 스크래치가 갔고.
정 차장과 문 대리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 차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아오, 본부장님 왜 이렇게 잘해. 영업팀장님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어.”
막상 붙어보니, 영업본부장이 제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골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는데. 많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툭툭 차면서 4골이나 넣었다.
지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즐기고 싶긴 한데······.’
지고 있으니, 전혀 즐기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결국 특단의 조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 모이세요.”
힘들어서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로 팀원들이 지혁 주변으로 모였다.
“지금부터 죽을 각오로 뜁니다.”
“오 팀장~ 이미 죽을 것 같아~”
정 차장의 말에 지혁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아직 안 죽었잖아요.”
“······.”
“공격 방향을 보면, 영업본부장님이 계속 마무리를 짓고 있어요. 골 찬스가 날 때 그쪽으로 공이 몰리고 있죠.”
지혁은 손정진을 바라봤다.
“정진.”
“네!”
“네가 영업본부장님 맨투맨 들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본부장님만 쫓아다녀.”
“보, 본부장님을요? 제가요?!”
신입사원의 본부장 마크······ 부담스러웠다.
손정진은 회사생활을 오래 하고 싶었다.
“본부장님한테 한 골도 주면 안 돼.”
“아······ 근데 왜 하필 저를······.”
손정진이 지혁의 명령에 난감함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본부장이 신입한테 막혀야 멘탈이 흔들리지. 모든 건 멘탈 싸움이야.”
“······.”
그래도 망설이는 눈빛을 보이자, 지혁은 묵직한 한마디를 날렸다.
“정진아, 형 실망시키지 마라.”
이 말에 손정진은 정신이 퍼뜩 들었고.
“알겠습니다! 온몸을 살라서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윤 부장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 쓸데없는 비장함은 뭐야?!’
지혁은 문 대리와 정 차장을 불렀다.
“그리고 두 분은 상대편 골문 앞에 위치해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수비 내려오지 말고, 골대 앞에만 있어요.”
“그럼 수비는?”
“내가 다 할 거예요.”
정 차장은 혀를 내둘렀다.
‘이 극단적인 전술은 뭐지······.’
지혁은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주워 먹는 것도 못 하면······ 알죠?”
“······.”
“회사생활 편하게 하셔야죠.”
노골적인 협박에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삑-!
[선수들 나와주세요~]
지혁은 사자후를 토해내며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품기획 화이팅!”
“화이팅!”
‘전투 풋살.’
3쿼터부터 상품기획팀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
해 질 무렵.
영업팀은 먼저 갔고.
상품기획팀은 신천 먹자골목으로 이동 중이었다.
지혁 외에는 제대로 걷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다시 오 팀장이랑 운동하면 인간이 아니다.’
‘다음부턴 없는 경조사라도 만들던가 해야지.’
특히, 손정진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본부장님이 나한테 욕했어······.’
이렇게 다들 속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오직 지혁만이 후련한 얼굴이었다.
결국 6-5로 이겼으니까.
“오 팀장~ 피곤한데~ 그냥 집에 가자~ 승리의 회식 안 해도 돼~”
정 차장이 빌듯이 말했다.
“아니요. 오늘 꼭 해야 해요.”
팀원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지만, 지혁은 완강했다.
“그동안 한 팀에서 오래 있었고,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그냥 보내드리면 서운하죠.”
이 말에 윤 부장을 제외한 팀원들은 눈이 동그래졌고, 문 대리가 물었다.
“누가 어디 가나요?”
지혁은 이제야 팀원들에게 말했다.
“윤 부장님이 영전하게 됐어요.”
“······.”
“내일 상품기획 3팀장으로 발령 나실 거예요.”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팀원들은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정 차장의 충격이 가장 컸다.
후우-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낸 후 말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