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나란히 서다 (1)
삼겹살집.
먹어도 될 정도로 고기가 익었으나,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침울한 분위기.
오직 지혁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윤 부장님, 어서 드세요.”
지혁은 가장 연장자인 윤 부장에게 권했으나.
후우-
그는 한숨을 쉬더니, 빈 잔을 들었다.
“별로 생각이 없네. 술이나 한잔 주라.”
정 차장이 소주병을 들었다.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그래.”
정 차장은 술잔을 채운 후 물었다.
“언제 결정된 건가요?”
“좀 됐어.”
“왜 얘기 안 했어요?”
정 차장은 지혁을 힐끔 본 후 말했다.
“오 팀장이 얘기하지 말라던가요?”
“아니······.”
지혁이 윤 부장 대신 말했다.
“뜻이 통한 거죠. 그런 얘기 미리 해봐야 팀 분위기만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정 차장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안 좋아진다고? 아까는 영전이라며. 영전하는 건데, 왜 안 좋아진다는 거야?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이게 내쫓는 거지 뭐냐고.”
“······.”
“윤 부장님과 몇 년을 함께 일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정 차장은 진심으로 아쉬워했고, 윤 부장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왜 그래. 정 차장. 이미 다 결정된 일인데.”
“부장님도 이동하기 싫으시잖아요!”
윤 부장은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자자, 이왕 하는 송별회인데. 기분 좋게 보내줘~”
잔을 부딪치며 팀원들은 윤 부장에게 한마디씩 했다.
“부장님, 아직 배울 게 많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부사수인 손정진의 말에, 윤 부장은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미안하지. 더 못 가르쳐줘서. 현업에 기획라인까지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많이 알려줬을 텐데.”
“······.”
“정진 씨는 성실해서 잘 할 거야. 너무 변하지만 마라.”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문 대리도 한 마디 했다.
“부장님 안 계시면 무슨 재미로 회사생활 할까 싶습니다.”
윤 부장이 미꾸라지 같지만, 상품기획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재미는 무슨 재미. 회사에 놀러 오냐? 하하.”
윤 부장은 빙그레 웃었고, 문 대리 또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부장님은 웃는 게 보기 좋으세요. 하하.”
“낯간지러운 말 그만하고, 일하다가 피곤이 몰려올 때면 3팀에 놀러 와. 커피 사줄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콜이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풀려갔고.
지혁은 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윤 부장이 동료들에게 꽤 신망이 좋았었네.’
***
테이블 위에 빈 술병이 가득 쌓였다.
운동으로 피곤한 몸에 술까지 들어가니, 다들 금세 해롱거렸고.
윤 부장 또한 꽤 취했다.
그는 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팀장이란 인간들이 가장 싫어.”
“······.”
“암적인 존재들이야. 괜찮은 팀장을 본 적이 없어.”
눈이 풀린 팀원들은 윤 부장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지만.
지혁은 또렷하게 윤 부장의 말에 집중했다.
“제일 치사한 놈들이라니까? 팀장이란 새끼들이.”
말을 시작하니 쌓인 게 많았는지, 윤 부장은 술잔을 입안에 털어놓은 후 저주를 이어갔다.
“씨발, 팀원들 총알받이 시키고. 지는 뒤에서 싹 숨었다가, 성과 나오면 그때 가서야 자기가 한 것처럼 나타나고.”
지혁은 윤 부장의 울분에 찬 눈시울을 보았다.
“팀원들은 조금도 신경 안 쓴다고! 개새끼들이. 수당 50만 원 챙기려고 팀장 하는 거야? 그러고 보면, 위 놈들이 더 나빠! 왜 그런 인간들만 팀장 시키는 거야?! 어!”
윤 부장은 오 팀장을 보며 말했다.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매번 이런다는 거야. 매번! 그래서 내가 딱 법칙을 발견했지.”
이제 손정진은 엎드려서 자고 있었고, 문 대리와 정 차장은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쓰레기가 되어야 팀장이 된다. 고로 팀장이 되고 싶다면 쓰레기가 되라 이거야. 젠장.”
지혁은 윤 부장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예전에 데인 적이 많았나 보군. 팀장에 대한 거부감이 윤 부장의 트라우마였어.’
윤 부장은 자꾸 능력을 숨기려고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한 발짝 빼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태도가 트라우마와 관련 있을 거라는 짐작했었다.
“근데, 윤 부장님. 아무리 취하셨어도······ 팀장 면전에서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 또한 팀장이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윤 부장도 피식 웃었다.
“오 팀장은 좀 달라.”
“······.”
“달라. 지금까지만 봐서는 다르지만······ 그런 사람도 곧 변하더라고.”
윤 부장은 오 팀장을 바라봤다.
“자기 팀장 된 지 얼마 안 됐잖아.”
“전 안 변해요. 변할 수가 없어요.”
윤 부장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혀 꼬인 목소리로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그때 말이야······ 나도 꽤 연차가 쌓였고, 애들 엄마 보기 민망한 상황이었어. 회사생활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팀장도 못 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잠깐 욕심을 내봤던 건데.”
심 팀장의 자리를 윤 부장이 대신 할 뻔했던 순간을 얘기하는 거였다.
“막상 그 자리가 눈앞에 오니, 못 하겠더라. 내가 겪었던 팀장들 자꾸 생각나고, 엄두가 안 나서.”
윤 부장은 지혁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빚졌냐느니, 괜히 센 척 말했지만. 사실은 이런 이유였어.”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솔직하신데요? 난 그때 윤 부장님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하하.”
윤 부장은 술잔을 들었고.
지혁도 이번엔 웃으며 술 한잔 마셨다.
“캬~ 좋네요.”
“회식 땐 술 안 마신다며?”
“다 뻗었잖아요. 지금부턴 회식이 아니라, 윤 부장님과의 술자리죠.”
“오~ 좋아!”
윤 부장은 지혁의 잔을 채워주며 중얼거렸다.
“어쩌다 그 어리버리한 꼬맹이가 이렇게 됐을까. 참 신기하단 말이야.”
윤 부장은 지혁의 갓 신입사원 때를 떠올렸다.
“자네 볼수록 신기해.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어서.”
“글쎄요······ 바뀐 게 아니라, 이제야 본 모습이 나온 걸 수도 있죠.”
지혁 또한 윤 부장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윤 부장님은 팀장 잘 하실 거예요. 원래 잘하시는 분이니까. 그리고 제가 도와 드릴 거고요.”
“······.”
윤 부장은 지혁이 절대로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돕겠다’는 말이 참 반갑게 들렸다.
“오······ 갑자기 용기가 생기네?”
“하하.”
“자! 한잔 더 해!”
***
다음날 정오에 윤 부장은 ‘상품기획 3팀 팀장’으로 발령 났고.
그날 퇴근 후 짐을 다 챙겨서 이동했다.
심 팀장에 이은 상품기획 1팀의 두 번째 이동.
하지만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동료들의 축하와 격려 속에 이동했으며.
짐 정리 및 이사까지 팀원들이 다 함께 도와주었다.
무엇보다도.
윤 부장의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한번 해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윤 부장의 자리는 바로 채워지지 않았다.
지혁이 생각해둔 사람이 있으나, 협의가 필요한 일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윤 차장이 하던 업무는 팀원 세 사람이 나눠서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갔고.
월요일 아침 10시.
상품전략실의 주간 고정스케줄, 팀장 미팅에 뉴페이스가 왔다.
유 본부장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성준 팀장님?”
유 본부장은 현재 상품전략실장을 겸직하고 있다.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윤 팀장은 일어나서 각 팀장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상품 기획 전체에서 최고 짬밥 중 한 명이기에, 윤 팀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팀별 주간보고를 좀 짧게 해주세요. 10시 30분부터 조직쇄신안 보고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팀장 보고는 짧게 진행되었고. 10시 30분쯤 되자.
“좋은 아침~”
영업본부장 한 전무가 나타났다.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전무로 승진한 이후부터, 직원들은 그를 영업본부장이 아닌 ‘전무님’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은 필요에 의해 영업본부장직을 유지하고 있으나, 해당 자리는 상무 직급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저 참석해도 되는 거죠?”
유 본부장은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전무 옆에는 영업전략실장, 스타덕 팀장 등 영업파트 요직의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예전엔 상품본부 고유 업무에는 영업부 사람들이 일체 접근을 못 했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유 본부장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누구 덕분에 상품본부장 자리에 앉게 된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
“자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한 전무는 지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 팀장 굿모닝.”
“뭘 이렇게 많이 달고 오세요. 남의 집안일에.”
지혁의 뼈 있는 한마디에.
회의실 안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한 전무 또한 당황했지만,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며 말했다.
“하하. 이왕 조직이 바뀌는 거, 협조부서 실무자들이 알아두면 좋잖아?”
이 말에 지혁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유 본부장은 영업부 등장에 약간 위축됐었는데, 지혁 덕분에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추 차장!”
상품본부 추기영 차장이 앞으로 나와서 보고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상품본부 조직쇄신안 보고 드리겠습니다.”
프로젝터는 상품전략실 백이재 과장이 맡았다.
“우리 상품본부는 비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쇄신하기 위해 앞으로 3무 운동을 펼치려 합니다.”
유 본부장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쇄신안은 날카롭고 획기적이었으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보고 안대로 한다면, 조직이 바뀔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충분히 들 정도였다.
다만, 좀 급진적인 부분도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디자인실 해체입니다.”
이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기겁했다.
“디자인실을 없앤다는 게 아닙니다. 디자인실을 해체하여 각 상품기획팀 소속으로 편입하는 안을 준비 중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며, 설계 단계에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설득력이 없지는 않으나,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 보고 마칩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번쩍.
윤 팀장이 바로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그는 일어나서 거침없이 말했다.
“디자인실을 해체하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온 겁니까? 일을 굉장히 쉽게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전통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나눈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
“효율만 생각하고 경쟁력은 생각은 안 하나요? 특히 스타덕 같은 브랜드는 디자인 정체성이 중요한데. 이 부분도 충분히 고려하신 건가요?”
신임 팀장이지만, 경력만큼은 그 어느 팀장 못지않았다.
오로지 ‘상품기획 경력’만으로는 치면, 윤 팀장이 팀장 중에 가장 오래됐다.
또한, 그는 이 일을 정말 사랑한다.
“이 ‘디자인실 해체안’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윤 팀장은 다분히 흥분한 어조로 말했고. 그의 발언 덕분에 회의실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유 본부장이 나섰다.
“윤 팀장. 질문하랬더니, 지금 디자인실 편의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추 차장이 보고한 건 내 생각과 일치하네. 그리고 그런 개인적인 우려를 큰 문제인 양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하면······.”
그때 유 본부장의 말을 끊는 사람이 있었다.
“개인적인 우려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지혁이었다.
“저 또한 윤 팀장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감합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지혁은 윤 팀장을 바라보았고.
윤 팀장은 지혁을 향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