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나란히 서다 (2)
유 본부장은 윤 팀장의 발언을 누르고, 계획했던 일을 추진하려 했었다.
갑작스러운 지혁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지혁은 유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하려던 말씀 하시죠.”
“······.”
유 본부장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지혁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죽였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흠! 그래.”
하지만 유 본부장 또한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윤 팀장,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조직 쇄신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돼. 당연히 전통적으로 없었던 일을 하는데, 우려되는 일이야 있겠지.”
방금 말 끊은 사람은 지혁이었는데, 유 본부장은 굳이 ‘윤 팀장’이라고 지칭하여 말했다.
지혁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윤 팀장은 잠자코 들었다.
어쩌다 발끈하여 한마디 했었지만.
상급자의 말에 연이어 항변할 깡은 없었다.
지혁과 다르다. 윤 팀장은 일반적인 회사원이었다.
윤 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유 본부장의 말을 잠자코 들었으며.
그의 태도에 유 본부장은 다시 자신감이 붙었다.
“그럼, 일단 한번 해보고~”
“해보고 아니면요. 그때 가서 다시 붙여요?”
“어?”
지혁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찢었다가 아니면 그냥 풀로 붙이듯이 하면 되는 거냐고요. 이건 뭐, 종이접기도 아니고.”
“······.”
큭.
회의실 어디선가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유 본부장은 얼굴이 빨개졌다.
“누가 유 본부장님의 생계를 가지고, 찢었다 붙였다 하면 좋겠어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건가.”
한 전무는 피식 웃고는 생각했다.
‘초반이니까, 유 본부장 잡고 가겠다는 건가? 오 팀장 세게 나오네.’
“······.”
유 본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지혁이 입을 여니, 자기도 모르게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젠장, 다음부턴 오 팀장은 회의 부르지 말아야지.’
그는 지혁이 좀 어려웠다.
분명 하급자인데, 상급자 같았다.
상품본부장 보내는 일은 진행할 때 지혁에게 지령을 받았어서 그런 걸까.
유 본부장은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좀 급했나 봅니다.”
‘엥? 뭐야?’
‘갑자기?’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유 본부장의 태세변환이 의아했다.
“여러 사람이 의구심을 표하는 건, 좀 더 준비가 필요하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지혁은 피식 웃었고.
유 본부장은 애써 지혁의 모습을 보지 않고 말했다.
“일단 디자인실 해체는 없었던 일로 두고, 다른 안건들부터 시행하는 거로······.”
“그럼 그냥 두겠다는 거예요?”
지혁은 이번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유 본부장은 등에 땀이 배기고 있었다.
‘제기랄, 그만 좀 해라.’
“디자인실이 이번 조직 쇄신의 핵심인데. 그대로 두겠다고요?”
유 본부장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럼 뭐 어쩌라고!!’
하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차분히 하고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럼······ 혹시 오 팀장님께서는 좋은 생각이 있나요?”
전혀 예상치 못한 유 본부장의 다정한 말투.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왠지 소름이 돋았다.
***
“어차피 여기 요직자들은 다 모였는데.”
“······.’
“애매하게 시간 끌지 말고, 여기서 토론하고 끝을 보죠. 어떻습니까? 전무님?”
지혁의 갑작스러운 지목에, 한 전무는 당황했다.
“어? 나?”
“······.”
지혁은 대꾸 없이 바라보았고, 한 전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지. 어차피 다 모인 자리니까.”
한 전무는 괜히 지혁을 자극할까 봐, 말을 짧게 했다.
지금부터의 회의는 자연스럽게 지혁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유 본부장님, 앉으세요.”
“응? 어어. 고마워.”
지혁이 일어나서 말했다.
“추 차장님. 디자인일 해체하려 했던 근거가 뭔가요. 그냥 다 얘기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추 차장은 화면에 보고서를 만든 근거 자료들을 띄워서, 하나하나 설명하였고.
지혁은 유심히 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참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
“디자인실 문제를 논하는데, 디자인실에는 한번 묻지를 않았네요?”
“······.”
“거기 일하고 있는 사람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물어봐야죠. 10년간 데이터 뽑고, 경쟁사 조사하고, 제품 분석하는 게 조직 쇄신과 큰 상관관계가 있나요?”
지혁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직을 바꾼다면서 대상에게 묻지도 않고. 직원은 그냥 월급 줬으니, 쓰면 되는 소모품이라 생각하는 건가? 똑같이 월급 받는 사람끼리 왜 그래요?”
“······.”
지혁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어린아이들도 알 만한 상식이라고 보는데. 옷 살 고객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판매전략 짜는 것과 다를 게 뭐냐고요. 직원도 멀리 보면 고객 아닌가요?”
추 차장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고, 유 본부장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흡사, 경영자들이 오너에게 질책받는 모습처럼 보였다.
회의실의 다른 사람들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오직 윤 팀장만이 지혁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
추 차장은 유 본부장 눈치를 살핀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 팀장님 주신 피드백 참고해서, 저희가 다시 한번 준비를 해보도록······.”
“자꾸 다시라는 말하지 말라니까요. 왜 자꾸 뒤로 미루려 해요. 다 모인 자리에서 끝내자니까.”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이젠 죄송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고, 지혁은 거침이 없었다.
‘추진력 장난 아니네.’
‘일을 꿰뚫어 보는 시야가······.’
‘괜히 이름을 날리는 게 아니구나.’
지혁을 잘 모르던 사람들은 그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한 전무님. 유 본부장님.”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이 일은 실무를 잘 알고, 상품기획과 디자인 역사를 잘 아시는 분이 해야 합니다. 적임자가 있는데, 제가 추천 드려도 될까요?”
윤 팀장은 이 말에 왠지 등골이 싸늘해졌다.
‘설마, 또······.’
“적임자에게 일임해서, 결과 내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컨펌 단계는 한번 거쳐야겠죠.”
한 전무가 물었다.
“그게 누군가?”
윤 팀장은 옆 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느꼈으나.
애써 지혁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윤 팀장님입니다.”
‘젠장. 괜히 나섰어! 괜히 나섰어!’
회의 중간에 한마디 했던 것에 깊은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
“어? 자네가?”
한 전무는 윤 팀장이라는 말에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었는데, 지혁이 직접 같이하겠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건 윤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썩어가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지혁은 같은 편일 때는 천군만마 같은 사람이니까.
한 전무는 잠시 생각하고는 유 본부장에게 물었다.
“유 본부장 생각은 어떤가요? 저는 맡겨도 괜찮을 거라고 보는데.”
조직 쇄신은 곧 구조조정을 의미한다.
이 껄끄러운 일을 맡아서 해준다는데, 유 본부장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한 전무님께서 괜찮으시다는데, 저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역시, 고위 임원답게 살짝 한 발짝 빼면서 수락했다.
한 전무는 미소짓고는 유 본부장에게 진행하라며 손짓했고.
유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럼 디자인실 조직쇄신안은 윤 팀장과 오 팀장이 맡아서 해주세요.”
***
옥상.
윤 팀장은 담배를 4개째 피우고 있었다.
“오 팀장!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 딴 팀 보내고도 일 시키냐?”
지혁은 깔깔대며 웃었다.
윤 팀장이 이렇게 앓는 소리 하는 게 지혁은 참 재밌었다.
“설마 이러려고 나 팀장 보낸 거야? 팀원한테는 이런 일 시키기 어려우니까?”
“하하. 글쎄요~”
지혁은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고, 윤 팀장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하아~ 젠장. 말년에 어쩌다가 오지혁을 만나서. 일복이 터졌네. 터졌어.”
지혁은 큰 소리로 웃다가 말했다.
“윤 팀장님.”
“아, 왜!”
윤 팀장은 짜증스럽게 대답했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결자해지요.”
“결자해지?”
“네.”
지혁은 건물 아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일을 저지른 사람이 마무리를 지어야죠.”
“······.”
“디자인실 이슈가 수면 위로 떠 오른 건, 스타덕 상품기획팀 덕분이잖아요.”
이 말에 윤 팀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타덕 상품기획 팀장인 저와 담당이셨던 윤 팀장님이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일을 파헤쳐 놓기만 하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마무리를 맡기면. 많은 사람이 다칠 수 있어요. 이용했으면 책임을 져야죠.”
결과적으로, 상품본부장을 내보내기 위해 디자인실을 이용한 것이 되었다.
지혁은 그 얘기를 한 거였고.
윤 팀장은 황당한 얼굴로 오 팀장을 바라봤다.
“자네는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건가? 이것도 혹시 다?”
“······.”
이 말에 지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선 디자인실 의견부터 들어보고요. 윤 팀장님이 주도적으로 해주세요. 필요할 때는 제가 나설 테니까요.”
윤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자기가 주도하면 안 돼? 같은 팀장끼리······ 내가 지시를 따를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지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홍썬라인 담당이셨잖아요. '담당이 책임지는 거지.' 이거 항상 윤 팀장님이 하시던 말씀 아니에요?”
“······.”
윤 팀장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그게 원죄구나. 원죄. 할 말이 없네.’
지혁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웃으며 말했다.
“먼저 내려갑니다~”
***
일주일이 지났고.
드디어 상품기획 1팀에 뉴페이스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하하!”
사무실에 들어온 반가운 얼굴을 보고, 팀원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했다.
마치 원래부터 같은 팀이었던 것처럼.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이상하다~ 어제도 본 거 같은데?
-뭐야! 빨리빨리 안 다녀?!
상품기획 1팀에 새로 온 팀원은 순백의 하얀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상품기획 1팀으로 발령받은 황성준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아~
황 과장의 힘찬 인사에 팀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짝짝짝.
박수를 받으며 황 과장은 90도로 인사했다.
정 차장이 먼저 다가왔다.
“황 과장~ 앞으로 잘 부탁해?”
“네! 잘 부탁드립니다.”
문 대리도 웃으며 말했다.
“황 과장님 오셔서 너무 좋네요.”
“에이~ 선배님. ‘님’자는 빼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문 대리는 환하게 웃으며 황 과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손정진은 90도 각도로 인사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생산 전문가님을 선배님으로 모시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에이~ 이젠 정진 씨가 선배지. 손 선배~ 기획 좀 많이 가르쳐줘.”
“하하.”
꽉.
지혁은 황 과장에게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황 과장님이 인기가 좋네요.”
“하하. 반겨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자리에 앉아서 업무 분담 얘기를 하려는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인가요!]
[협조부서에 이 정도 요청도 못 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직접 해가라고!]
[어? 방금 반말했어?!]
복도에서 들리는 고성 소리.
그 중 하나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직원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해져 더욱 소란스러워졌고.
상품기획 1팀 팀원들은 일제히 복도로 나갔다.
복도 한가운데.
황소처럼 생긴 남자가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앞에 윤 팀장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