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또라이 대 또라이
윤 팀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발팀에 개발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문제인가요?”
“순서를 기다리라고요! 순서를!”
개발팀장은 목소리가 정말 컸다.
한마디 할 때마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데, 볼륨의 사이즈 차이 때문에 윤 팀장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 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제 소재 요청한 걸 2주 뒤에 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요? 뭐가 얼마나 밀려 있는데요?”
개발팀장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내가 당신한테 업무 보고까지 해야 합니까? 뭐가 밀려 있는지까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하는 거예요?”
윤 팀장은 답답했다.
좀 불리하다 싶으면 주제를 돌리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벽에 얘기하는 것 같았다.
“개발팀이 협력업체에요? 납기 주고 그냥 쪼면 되는 거냐고요. 우리도 선도물산 직원이에요!”
윤 팀장이 한 적도 없는 말을, 혼자 말하고 혼자 흥분해서는 개지랄이었다.
“아니, 쪼긴 누가 쪼아요?”
윤 팀장은 황당해서 말했지만.
“이게 쪼는 거지 뭡니까! 신청받았고! 기한 얼마나 걸리는지 알려줬고! 근데 왜 늦느냐며, 무슨 업무가 밀렸는지 말하라고 하면. 그게 쪼는 거지 뭡니까?”
“······.”
“그럼! 배려해 주는 겁니까? 대신해 주려고 물어본 거예요?”
“하아······ 참나.”
윤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환장하겠네. 뭔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뭔 말만 하면 피해받은 것처럼 말하는데, 환장할 노릇이었다.
근데 또 희한한 게, 그의 말이 100% 틀리지 않았다. 이렇게 주제를 틀어버리면서 적당히 맞는 말을 하니, 대응하기가 참 애매했다.
어느덧 복도에 사람들은 많아졌고.
개발팀장과 윤 팀장의 빅매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윤 팀장 차례에서 말이 끊겼다.
이대로라면 개발팀장의 판정승.
윤 팀장은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발팀장은 지혁과는 다른 유형의 또라이였고, 또라이는 정상인이 상대하기 힘들다.
“어휴, 시끄러워 죽겠네.”
그때, 지혁이 나타났다.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요? 여기가 자기 집 안방이야?”
“이건 뭐야!?”
개발팀장은 지혁을 처음 봤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건방진 소리를 하면서 나타나니, 개발팀장은 곧바로 언성이 올라갔다.
-와, 오 팀장님이다.
-어머, 멋있어······.
-드디어 오늘 직관하는 건가? 전투력이 장난 아니시라던데.
-대박. 개발팀장님도 보통 아닌데.
개발팀장은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이 어린 놈이 오 팀장?’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지만, 개발팀장은 당연히 오 팀장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선도물산에서 오 팀장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저 누군지 몰라요?”
지혁은 개발팀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봤다.
“아니면, 지금 알고 싶지가 않은 건가?”
개발팀장은 초반 기세에 눌렸다.
입을 꾹 다물고 꼼짝 않는 개발팀장을 향해.
척.
갑자기 지혁은 악수를 건넸다.
“상품기획 1팀. 오지혁 팀장이라고 해요. 처음 뵙네요.”
갑작스러운 악수에 개발팀장은 당황했으나, 이끌리듯 지혁의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아 네, 개발팀장 고승윤이라고 합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보는 사람도 많은데, 두 분 업무 얘기는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하는 게 어떨까요?”
“······.”
“여기 바로 옆이 상품기획 1팀인데, 시끄러워서 일을 못 하겠어요. 목소리도 너무 크시고.”
빠직.
개발팀장의 어금니 근육이 꿈틀거렸다.
“더 소란스러우면, 보안요원 부르려고 했어요.”
키득.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황 과장도 웃으며 생각했다.
‘오 팀장님답다. 보안요원을 부르겠다니. 잡상인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하하.’
개발팀장은 이마에 핏줄이 꿈틀거리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
-와······ 직관 제대로 했다.
-오 팀장님. 최고.
-단 몇 마디에 끝나네.
지혁은 주변 수군거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윤 팀장이 다가와 말했다.
“설명해줘야 해?”
지혁은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아니요. 뭔지 알 것 같아요. 나중에 얘기하죠. 지금 보는 눈이 많으니까.”
윤 팀장은 주변을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가볼게.”
“네.”
***
“황 과장님 환영식을 개발팀장님이 대신해주네요.”
지혁은 사무실로 돌아와 너스레를 떨었고, 팀원들은 다 같이 웃었다.
“오자마자 고성이라니. 황 과장님의 어두운 미래를 대변해주는 걸까요~”
지혁의 농담 한마디에 황 과장은 식겁했다.
“아휴. 팀장님,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팀장님이 얘기하는 일은 다 일어날 것 같아서.”
지혁은 피식 웃고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놀라셨죠? 황 과장님이 상품기획팀에 오셔서.”
팀원들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놀라기는 했으나, 모두 황 과장이 온걸 반겼다.
지혁이 말했다.
“전 생산 업무야말로 상품기획과 더 밀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원가 설계 잘해서, 마진율 1% 올리는 게 영업이익률 2% 올리는 것과 비슷한 거 같더라고요.”
지혁은 나름 계산을 해봤었고, 상품기획 베테랑인 정 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황 과장님이 파견 근무할 때 덕 많이 봤잖아요. 앞으로 생산팀과의 다리 역할을 잘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황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을 표했다.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상품기획에 오셨으니까. 기획 업무도 하셔야 하고요.”
“네?”
황 과장은 당황했다.
팀 이동 얘기할 때, 이런 말은 없었다. 그냥 상품기획팀에 생산 전문가가 필요하다고만 했었다.
“기획 업무도 하라고요?”
“그럼 상품기획팀에 와서 기획 일을 안 해요?”
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양한 업무를 알아야,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죠.”
“······.”
대놓고 한 의미심장한 말.
지혁은 평소에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었다.
황 과장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놀랐다.
‘뭐야, 황 과장 챙기겠다는 거야?’
‘알기야 했지만, 이제 대놓고 챙기네.’
‘아, 왜 가슴이 쓰리지······.’
“아······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이 시키시면 열심히 해야죠.”
황 과장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대답했다.
“앞으로 각오하셔야 해요.”
이건 팀원들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은 함께 갈만한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건 누구든 예외 없어요.”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가서 앉았다.
***
오후 5시.
퇴근 시간을 1시간여 앞둔 시각.
지혁은 은밀히 움직였다.
이 시간대에는 회사원들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중요한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웬만해선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지혁이 사무실을 관찰할 때 주로 이용하는 시간이다.
심 팀장의 움직임을 살필 때.
디자인실장이 팀장들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
전 상품본부장 송 상무가 대표와 언제 어떻게 접촉을 하는지 파악하려 했을 때.
항상 이 시간에 은밀히 움직여서 관찰했었다.
오늘 개발팀장을 처음 만났다.
물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은 해놨지만, 좀 더 관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잘 안 다니는 복도를 이용하여 은밀히 이동 중이었는데.
“어?”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쳤기에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선도물산 대표이사 홍남일.
그 또한 혼자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어, 그래. 오 팀장을 여기서 보네?”
대표이사실은 12층에 있다.
현재 지혁이 있는 곳은 디자인실과 개발팀이 있는 9층이다.
여기서 대표이사를 만난 게 의아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다.
근데······ 대표이사가 말을 걸었다.
“자네, 어디 가나?”
“네?”
대표이사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냥 볼 일이 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냐고.”
그의 집요한 물음이 의아했다.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어.”
지혁은 대표이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거짓말을 했다.
“화장실 갑니다.”
“화장실?!”
“네, 큰 게 급한데, 10층 사로가 꽉 차서 원정 왔습니다.”
대표이사는 황당해서 말을 잃었다.
상상도 못 한 답변이었다.
“꼭 들으셔야 한다고 해서 말씀드렸어요.”
“······.”
“이만 좀 가봐도 되겠습니까? 쌀 것 같은······.”
대표이사는 지혁의 말을 끊었다.
“어서 가.”
“네.”
지혁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데, 대표이사가 말했다.
“자네 지금 줄타기 중인 거 알지?”
“······.”
“줄타기는 삐끗만 해도 끝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
개발팀.
“일을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떡합니까. 이게 소재 수배해온 거예요?”
“······.”
“기준 스와치를 나일론 혼용으로 줬는데, 왜 폴리 소재로 수배를 해오냐고요.”
사십 대 후반의 남성은 개발팀장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 미안해. 내가 소재 전문가가 아니잖아. 배우는 중이라, 기준 소재만 봐서는 잘 몰라.”
“심 부장님, 지금 장난하세요?”
“어?”
개발팀장 앞에서 갈굼 당하는 사람은 전 상품기획 1팀 팀장. 심원석 부장이다.
“야!”
개발팀장은 갑자기 다른 팀원을 불렀다.
“너 안 가르쳐 줬어?”
“가르쳐 드렸습니다. 실 태워 보면 안다고······.”
개발팀장은 험악한 눈으로 심 부장을 바라보았다.
“가르쳐 줬다는데요? 해보기는 했어요?”
“해봤지. 그래도 난 잘 모르겠더라고······ 냄새 차이를 아직 잘······.”
개발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냄새 말고! 타들어 가는 불꽃 모양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고요!”
심 부장의 목이 들어가고 있었다.
“미안해······ 나도 노력은 하고 있는데.”
“노력?”
개발팀장은 못해도 5년 이상 선배인 심 부장에게 거침이 없었다.
“노력은 됐고. 그냥 좀 잘하면 안 돼요?”
“······.”
“디자이너들 보기 쪽팔려서 그래요. 쪽팔려서.”
심 부장은 땅만 봤다.
“아니, 가장 쉬운 걸 시키는데도, 이렇게 못 하면 어떻게 일을 같이하라는 거야. 진짜.”
옆 머리가 희끗희끗한 심 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지혁은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의 나 같네.’
지금 심 부장의 모습에서 자신의 신입 시절 모습이 보였다.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지금의 심 부장이 더 아플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후배에게 질책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팀장은 소재를 던지듯 건네며 소리쳤다.
“아, 당장 가져가요! 다시 해 오세요!”
“알았어······.”
휴우-
심 부장은 한숨을 쉬고, 전화기를 들고 사무실을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원단 업체에 전화하려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엇.”
팔을 잡는 강한 압력에 이끌려서 벽 쪽으로 밀쳐졌다.
“뭐, 뭐야?”
“쉿-”
지혁이 검지를 치켜들고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응?!”
심 부장은 눈앞에 보인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동공이 빠질 듯이 커졌다.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예전에 화장실에서 지혁의 뒷담화 하다가 만났을 때보다 더 놀랐다.
“일단 조용히 하고,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