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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78화 (78/301)

78. 겪어봐야 안다

심 부장은 지혁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근데 희한하게도,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회사에 이렇게 사람이 없었나?’

지혁은 빨리 가는 길이 있음에도 이리저리 복잡하게 걸어서 갔다. 심 부장은 그게 좀 의아했다.

어느덧 1층에 도착.

건물 밖으로 나왔고.

5분 정도 걸어서,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지혁이 말했다.

“커피 한잔하시죠. 제가 대접할게요.”

“응? 어어.”

잠시 후.

지혁은 커피를 심 부장 자리에 올려놓은 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마주 보는 건, 7개월 전 심 부장이 팀 이동을 한 후 처음이었다.

물론, 심 부장은 먼발치에서 지혁을 몇 번 봤다. 승진과 포상으로 단상에 여러 번 올라갔었으니까.

“잘 지내셨어요?”

지혁의 안부 인사를 심 부장은 어색하게 받았다.

“응? 어, 어.”

그는 지혁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자신감 없는 표정. 불안한 듯 떨고 있는 다리.

지혁은 심 부장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편치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사람을 관찰할 때 모든 부분을 본다.

갑작스런 만남으로 인한 어색함이라고 하기엔, 심 부장은 너무 위축되어 있었다.

10층에서 개지랄 잘 떠는 거로 유명했던 그 심 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혁은 가만히 관찰했고.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심 부장이 입을 열었다.

“너 잘나가더라?”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이렇게 부르면 안 되지. 오 팀장님이라고 해야 하지.”

“됐어요. 편하게 부르세요.”

지혁은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둘이 있는 자리고, 과거에 팀장으로 모셨던 사람이니까.

“왜 온 거야? 아직 회사 다니고 있나 궁금했어?”

심 부장은 눈치를 보면서 말했고.

지혁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싫어했던 사람인데. 왜 그럴까.’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 잘 보였기에.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다.

지혁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생각했다.

‘됐다. 그냥 용건이나 말하고 가자.’

“심 부장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도움? 나한테?”

“네.”

심 부장은 황당한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다.

“너 여전하구나? 네가 감히 나한테 도움을 청한다고?”

감정이 올라왔는지 심 부장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으나, 지혁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개발팀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아는 대로만 얘기해주시면 돼요.”

“참나.”

심 부장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개발팀에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냐? 천하의 오지혁 팀장님이 물어본다는데, 누군들 응하지 않겠어?”

심 부장이 비꼬듯 말했지만, 지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는 사람이니까요.”

“어?”

“맞잖아요. 우리 아는 사이잖아요?”

‘아는 사이······.’

생각지 못한 말에 심 부장은 잠시 가슴이 쓰렸다.

개발팀에서 그는 외딴 섬처럼 지내고 있었다.

심 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

“개발팀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 다요.”

“전반적인?”

“네. 그러니까. 일하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는지, 개발팀장 성향, 구성원들의 역할, 연간계획······.”

심 부장이 헷갈릴까 봐, 항목을 세세하게 말해주었는데.

‘뭐야, 호구조사 해?’

심 부장은 지혁의 말을 들으면서 더 헷갈렸다.

‘이렇게까지 알아서 어디다 쓰려고······ 대부분은 나도 잘 모르는 건데.’

지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는 대로만 말씀해주시면 되고요. 다만······ 딱 한 가지, 자세히 얘기 듣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지혁은 목소리를 낮추고, 심 부장에게만 들릴 크기로 말했다.

“디자인실과의 관계.”

“······.”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그 부분은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꿀꺽.

심 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냥 무시해도 되는데. 왜 알려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심 부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나도 발령받은 지 이제 6개월 좀 넘었고,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네.”

“생각나는 대로 말할 테니, 알아서 들어.”

“말씀하세요.”

심 팀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개발팀은 디자인실과 상품기획실을 협조하기 위한 부서지만, 사실 디자인실과 훨씬 더 밀접해. 상품 설계 단계보다 더 앞선 단계에서 일한다고 할 수 있는데, 트렌드한 소재를 찾고, 부자재를 개발하는 등의 말 그대로 ‘개발’의 역할을 하지.”

그의 말을 빼놓지 않고 듣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일이 좀 잡다해. 업무 성격상 업체에 업무 요청은 많이 하지만, 오더를 내리는 부서가 아니기 때문에 말에 힘이 잘 안 실리지. 하여간 여러모로 쉽지 않은 부서이긴 해.”

“아, 오더는 생산팀에서 내리니까요?”

“그렇지. 샘플 몇 개 하는 게 협력업체에 돈이 되겠어? 근데, 일은 많이 시키고······ 개발팀은 바이어로서 대우를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지.”

지혁은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개발팀장이 좀 거칠어. 어떻게든 팀은 이끌어 가야 하고, 일은 해내야 하니까. 하지만 상위 부서에서 요청하는 일은 많고, 협력업체는 말 안 듣고······ 그래서 지랄이 늘었지.”

“단지 그 영향 탓일까요?”

심 부장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깔 거 다 깐 사인데.’

심 부장은 가슴 속에 담긴 말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아니지. 그 쌍놈의 개새끼는 그냥 미친놈이야. 씨발 새끼가 그냥, 개발팀장이 무슨 벼슬인 줄 알고, 여기저기 개지랄 떨고 다니는데. 하아······ 젠장, 말하다 보니까 욕이 절로 나오네. 아무리 봐도 걔는 그냥 미친놈이야. 싸가지 없는 개새끼.”

심 부장의 주특기인 뒷담화. 여전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그래도 욕은 가리는 편인데.

새끼로 생각해서, 새끼로 끝났다.

“무슨 개발팀장이야. 거기서 '발'은 빼야 해! 그냥 개 팀장이야! 개 팀장!”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지혁이 막았다.

“충분히 알겠어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셔도 될 거 같고요.”

“흠!”

지혁은 진짜 궁금한 걸 물어봤다.

“디자인실 관계는요?”

“아······ 그야 말할 것도 없지.”

심 부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디자인실 엄청 힘들 거야. 개발팀이 진짜 비협조적이거든. 뭐 해달라고 하면 함흥차사고. 요청하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거기에 개발팀장은 지랄을 심하게 하니까, 항의도 못 하고.”

“······.”

“개발팀 전체가 좀 방어적이거든. 근데,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얘기한 이유로 일에 진척을 내는 게 쉽지 않으니까.”

“구조적인 문제라는 얘기네요.”

“맞아.”

심 부장의 얘기를 들으며, 지혁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디자인실 문제의 근원이 여기 있었네.’

이후로도 심 부장은 얘기를 계속 쏟아내었고.

지혁은 아무 말 않고, 유심히 들었다.

꽤 시간이 지난 뒤.

심 부장은 침이 마르는지, 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얼추 다 얘기한 거 같은데. 내가 아는 한에서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도움이 많이 됐어요. 고마워요.”

시계를 보고 말했다.

“자리 너무 오래 비운 거 아니에요? 개발팀장이 난리 칠 거 같은데.”

심 부장은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상관없어. 이러나저러나 지랄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했다.

“어쨌든······ 이제, 일어날까?”

“네.”

심 부장은 지혁과 카페 앞에서 헤어지려 했다.

“난 따로 갈게. 그게 편해서.”

“네, 그렇게 하세요.”

심 부장은 가기 전에.

잠시 망설이다가 한 마디 뱉었다.

“몰랐다. 이게 이렇게 아픈 건지.”

“네?”

“예전 일은······ 미안했다.”

심 부장은 지혁의 신입사원 시절 때를 얘기하는 거였다.

지혁은 많이 놀랐다.

‘심 부장이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젠장, 당해보니 알겠네. 수고해라. 이젠 더 보지 말자.”

심 부장은 멀어져갔고.

그의 변화가 놀라웠다.

지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송 상무도 개발팀으로 보낼 걸 그랬나.’

***

다음날.

상품기획 1팀.

지혁은 출근하자마자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팀 미팅 5분 전.”

“5분 전!”

손정진이 큰 소리로 복창했고.

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회의실로 이동했다.

지혁이 미적거리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모두 빠릿하게 움직인다.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을 보며, 지혁이 말했다.

“오늘 미팅은 진짜 짧게 할 거예요.”

지혁은 정 차장을 불렀다.

“정 차장님.”

“왜?”

“저희가 지금 뭘 해야 합니까?”

“어? 뭘······.”

정 차장은 지혁의 질문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업무요. 연례 업무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 차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업무? 그거야 뭐······ 이제 곧 3월이니까, 여름 메인제품 입고되잖아, 판매전략 세워야 하고, 겨울 상품 설계 들어가야겠지? 특히 아우터는 지금부터 샘플 들어가야 하잖아? 아, 3월에 있는 분기 KC 시판품 조사도 대비해야지. 이건 뭐 생산팀에 확인 요청하면 되는 거고.”

정 차장은 업무를 술술 읊었고.

지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아서 해주세요.”

“뭘 맡아서 해?”

“팀장이요.”

“뭐어?!”

정 차장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팀원들도 일제히 지혁을 바라봤다.

“아, 대행 역할을 해달라는 거예요. 제가 당분간 다른 일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

지혁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별다른 말 있기 전까지는 팀장 의사결정이 필요한 일은 정 차장님 컨펌받고 진행하도록 하세요. 그냥 팀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 차장은 난감해했다.

“왜 나야······.”

“그럼 누가 해요?”

정 차장은 문 대리, 황 과장, 손정진을 바라봤다.

지금은 윤 팀장도 없고, 딱히 대신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리더는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

“그냥 맡아서 감당하시면 됩니다. 어렵게 생각 마시고.”

정 차장은 지금까지 담당자만 해봤다.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웠지만, 윤 부장이 빠진 지금 그가 상품기획팀 최고 고참인 건 확실했다.

“알았어. 해볼게.”

지혁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정 차장님 말씀 잘 따르세요.”

“알겠습니다!”

“안 따르기만 해봐.”

마지막에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팀원들은 뜨끔했고, 정 차장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 회의 마칠게요.”

지혁은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윤 팀장에게 전화했다.

“윤 팀장님.”

[어, 오 팀장. 무슨 일이야?]

“디자인실 간담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 간담회?! 멱살 잡히려고?!]

디자인실의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린 당사자. 지혁과 윤 팀장.

두 사람을 향한 디자이너들이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니, 험악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죠. 필요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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