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79화 (79/301)

79. 불편하지만 필요한 자리

9층 대회의실.

상품기획 1팀과 상품기획 3팀이 함께 디자인실 간담회 세팅을 했다.

사실, 3팀은 이 일과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군말 없이 함께 움직였다.

지혁이 윤 팀장에게 물었다.

“이른 시일 내에 팀 장악을 하셨네요?”

“오 팀장한테 배웠지. 자넨 더 빨랐잖아.”

윤 팀장은 씩 웃으며 말했고, 지혁 또한 피식 웃었다.

지혁은 팀장이 되자마자, 10분 간의 미팅으로 팀 장악을 완벽하게 했었다.

“혹시, 협박하면서 시작한 건 아니죠?”

“흠. 비밀이야.”

어느덧 세팅이 끝났다.

현재 시각 9시 30분.

간담회 시간은 10시인데,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보통 직원들은 30분 전부터 오기 시작한다.

지혁은 손정진을 불렀다.

“정진아.”

“네!”

“디자인실에 제대로 전파한 거 맞지?”

“네! 메일로도 보냈고, 제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얘기도 했습니다.”

“흠, 그래.”

계속 시간은 흘렀으나, 디자이너는 보이지 않았고.

15분 전쯤부터 아주 소수의 인원만 나타났다.

윤 팀장이 지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 같아도 오기 싫겠다.”

“······.”

“이걸 어쩌면 좋냐?”

지혁은 팔짱 끼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정진 씨.”

“네?”

협조부서 사람들이 와 있는 상황이라, 지혁은 정진을 편하게 부르지 않았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 이름 적어.”

먼저 도착한 디자이너들이 다 듣게끔 큰 소리로 말했다.

“이름이요? 이름은 왜······.”

“적으라면 적어.”

지혁이 싸늘하게 말하자, 손정진은 바싹 얼어서 크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혁의 이 한마디로, 회의실 분위기가 바뀌었다.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던 디자이너들은 수군거렸다.

-이름은 왜 적어?

-늦게 오면 큰일 나는 거야?

-평가에 반영되는 건 아니겠지.

-뭐해! 빨리 전화해!

디자이너들은 황급히 전화하기 시작했고.

10시가 다 되어 갈 때쯤.

따각. 따각.

빠른 구두 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디자이너들이 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정진 씨, 10시 넘어서 오는 사람은 이름 꼭 적어.”

지혁은 멀리 복도까지 들리도록, 다시 큰 소리로 말했고.

아직 도착 못 한 디자이너들은 풀 스피드로 달렸다.

10시 정각.

헉. 헉.

회의실에는 가뿐 숨소리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아주 후끈후끈했다.

지혁은 붉게 상기된 디자이너들 얼굴을 보며 말했다.

“모두 늦지 않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못 오시는 분들은 저희가 직접 연락 드려서 참석해 주십사 부탁드리려 했는데.”

디자이너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뭐야, 그러려고 이름 적으라는 거였어?’

‘하아······ 낚였네.’

옆에서 지켜보던 상품기획 팀원들은 피식 웃었다.

‘우리 팀장님, 답다.’

‘말 한마디로 전원 참석시키는 센스.’

‘근데, 디자이너들은 좀 약 오르겠는데.’

그렇긴 했다.

안 그래도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했으니까.

하지만 지혁은 개의치 않고,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간담회 시작하겠습니다.”

***

적막함이 흐르는 대회의실.

싸늘한 공기마저 감돌았고.

디자이너들의 눈빛은 사나웠다.

그 눈빛에서 그들의 감정이 느껴졌다.

‘너희들 싫다고. 다 너희들 때문이라고.’

최근 디자인실은 선도물산에서 명예, 자존심, 실적 모든 게 바닥을 찍고 있었다.

“윤 팀장님?”

지혁은 정적을 깨고, 윤 팀장을 불렀다.

“어? 왜? 나는 왜?”

윤 팀장은 이 상황에 불린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기겁했다.

“왜긴요. 간담회 진행하셔야죠.”

“내가?”

“그럼, 윤 팀장님이 하지 누가 해요. 이 일의 책임자신데.”

윤 팀장은 디자이너들의 싸늘한 눈빛을 살핀 뒤, 지혁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간곡히 부탁했다.

“오 팀장······ 이번 한 번만 오 팀장이 하자.”

“······.”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고 다 할 테니까. 응? 간담회만 자기가 맡아서 좀 해줘.”

지혁은 잠자코 있었다.

“이런 건 자기 전문이잖아. 부탁할게.”

-사람 불러다 앉혀 놓고 뭐 하는 거야.

-앞에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그냥 일어날까?

지혁은 윤 팀장을 바라봤다.

연기가 아니었다. 완전히 기에 억눌려 있었고, 제대로 못 해낼 것 같았다.

“그래요. 제가 하죠.”

“오 팀장! 정말 고마워!”

윤 팀장은 몇 번을 고개를 조아리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지혁은 디자이너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취지부터 설명해 드리죠.”

여전히 팔짱을 끼고 싸늘한 시선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디자인실이 문제가 많잖아요.”

.

.

.

.

그냥 돌직구.

상품기획 팀원들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비상구가 어딨었더라.’

지혁은 거침이 없었다.

“요즘 디자인실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알고 계시죠?”

디자이너들은 흥분했다.

-미친 거 아니야?

-너무 하네. 진짜.

-한꺼번에 깔려고 부른 거야?

지혁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확신이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문제를 대면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힘주어 말했다.

“용기를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래야 여러분이 삽니다.”

그리고 지혁은 다 얘기해주었다.

디자인실 해체를 논의하는 현재의 위협적인 상황을.

정말 가감 없이 알려주었다.

디자이너들은 곧 충격에 휩싸였다.

***

보통 경영자들은 조직개편 관련해서, 결정되기 전까지는 아래 직원들이 동요할까 봐 알려주지 않는다.

그 방법도 틀린 건 아니다.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혁은 이번 일은 그렇게 결정할 성향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정 차장이 문 대리에게 말했다.

“진짜, 심장 떨려서 못 보겠네. 오 팀장은 왜 항상 일 처리를 이렇게 극단적으로 할까요.”

문 대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글쎄요. 지금은 극단적인 게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메스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 약 처방만 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잖아요.”

정 차장은 문 대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비유 뭐야? 괜찮은데요?”

문 대리는 피식 웃었다.

그때 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문제를 자유롭게 얘기해주세요. 남 탓을 하셔도 좋고요. 자아비판도 좋습니다. 일단 뭘 알아야 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이 여러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할 수도 있어요. 전 적어도 그러진 않을 테니까. 다 얘기해주세요.”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디자인실 해체 및 상품기획팀에 편입.’

이 충격적인 사안에 대해 섣불리 손을 들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지혁은 좀 더 기다리다가 특정인을 지목했다.

“스타덕 디자인팀장님.”

“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에게 몇 번 데인 적이 있어서, 그를 좀 어려워한다.

“해주실 말씀 없으세요? 뭐든 좋아요.”

디자인팀장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디자이너들은 직책도 없어지는 건가요?”

“그렇겠죠. 한 팀에 팀장이 둘일 순 없으니까요.”

“마치······ 기술자 같겠네요?”

아무리 월급 받으며 주어진 일을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디자인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지혁은 디자인팀장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후우-

그녀는 콧김을 뿜어내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디자인실을 우습게 보는 거 같은데요. 타 브랜드 제품을 조금만 바꿔서 복사하거나, 전년도 잘된 상품 재활용한다고 생각하는 등.”

“······.”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손정진은 열심히 속기를 했다.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해낼 시간적 여유와 여건을 만들어줬는지 생각해봐 줬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나름 대한민국 최고 미대를 졸업했고, 어릴 적 신동 소리 들으며 자란 사람들도 꽤 있는데.”

미술계통을 전공하여, 이런 대기업에 입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납기는 쫓기고, 계속 디자인은 찍어내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된 거거든요. 아마, 디자인실만큼 야근 많이 하는 부서는 없을걸요?”

디자인실은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맞아요! 경영자들은 무슨 생각인 거야.

-우리가 일 쉽게 하는 줄 아나 봐.

-회사 망치려고 작정한 건가? 디자인 경쟁력을 다 없애서 어떻게 하려고?

디자인팀장은 격양된 얼굴로 말했다.

“디자인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요.”

“······.”

“저희 스포츠 경쟁사들 보세요. 점점 더 패셔너블 해지고 있죠. 점점 퍼포먼스보다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스타덕은 기술력 때문에 퍼포먼스에서 밀리는데, 그나마 강점인 디자인 경쟁력까지 무너지면 끝이에요.”

지혁은 잔인한 질문을 했다.

“상품기획을 계속 ‘홍썬라인’한 것처럼 한다면요?”

외주 디자인을 쓰겠다는 얘기.

안 그래도 험악한 분위기는 더 살벌해졌고.

디자이너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지혁에게 집중됐다.

디자인 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건 아니죠. 오 팀장님같이 유능한 분이 그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

“······.”

“뭐, 몇 번 잘 될 수 있겠죠. 근데 다음엔? 홍썬말고 다른 디자이너 찾아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한다?”

디자인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위험한 발상이에요. 이번 일은 어찌 보면 로또 같은 건데, 어떻게 로또가 항상 당첨될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

“진짜 자기 게 아닌 건, 결국 밑천을 드러내요. 전 그렇게 배웠어요.”

지혁은 이 말에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말했다.

“좋습니다. 얘기 잘 해주셨고요. 그럼 회사가 어떻게 해주면 디자인실 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을지도 얘기해 볼까요.”

스타덕 디자인팀장이 물꼬를 튼 덕분에.

이제 디자이너들은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쌓인 게 많았었는지.

난상토론은 장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판을 깔아준 지혁은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며 다음을 생각했다.

***

10시에 시작한 간담회는 점심시간 지나도록 계속되어, 1시가 넘어 끝이 났다.

지혁은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한 전무를 찾아갔다.

똑똑.

“오지혁입니다.”

“어~ 들어오게.”

한 전무는 집무실에 앉아, 환한 미소로 지혁을 맞았다.

“웬일이야? 갑자기?”

“디자인실 간담회 했거든요. 보고 드리려고요.”

“그래, 앉게.”

지혁은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전무의 표정을 살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어.’

모든 일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특히 임원급들은 눈치가 빨라서, 어설프게 행동했다가는 낌새를 대번에 눈치챈다.

“차 한 잔 주세요.”

“하하 그래. 잠시만 기다리게~”

잠시 후,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후루룩-

지혁은 차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분은 잘 지내시죠?”

“음?”

그룹 회장의 장녀. 선도생명 오혜진 사장을 얘기한 거였다.

야간 회동 이후, 연락 한번 한 적 없었다.

“잘 지내시지.”

한 전무는 곧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두 분 참 가까워 보이던데. 알고 지낸 지 오래되셨나 봐요?”

“그래. 오 사장님 어릴 적부터 봐왔으니까.”

지혁의 눈에 빛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쪽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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