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먼 형제들
“그쪽 집안? 오너일가 말하는 건가?”
“네.”
한 전무는 씩 웃고는 말했다.
“뭐 아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 대리일 때 그룹 비서실에 잠깐 있었고, 그때 오 사장님 알게 되었거든.”
'비서실?'
한 단어가 지혁의 관심을 끌었다.
“업무 특성상 집을 여러 번 왕래하거든.”
“어쩌다가 비서실에 배치받게 된 거예요?”
지혁이 관심을 보이자, 한 전무는 술술 얘기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입이 무거워 보여서 그랬나? 하하.”
겸손하게 말하지만, 한 전무는 입사 연수 때부터 튀는 직원이었으며, 줄곧 훌륭한 성과를 보여줬었다.
자연스럽게 윗분들 눈에 띄었고, 대리를 달자마자 비서실로 스카우트 되었다.
“아니면 일 좀 하니까 눈에 띄었나? 아, 물론 그때 아무리 내가 잘 나갔어도 오 팀장 만큼은 아니었어. 하하.”
이 말에 지혁도 빙그레 웃었다.
한 전무가 신입 때 잘 나갔어도, 사원이 1년도 안 되어 ‘차장’ 직급 달 정도는 아니었다.
“비서실······궁금하네요. 무슨 일을 하는지. 저한테는 그런 기회 안 오려나.”
얘기를 듣다 보니 비서실에 가면, 여러모로 유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큰일 날 소리. 자기는 내 옆에 있어야지.”
“······.”
“할 게 많아. 자네와 함께 큰 성과도 만들어 보고 싶고. 지금까지는 자네 성과를 내가 받아먹은 거였잖아.”
지혁은 ‘상품기획’에서 성과를 냈었다.
한 전무는 영업부 수장으로서 지혁의 성과에 따른 매출 상승 영향을 받았을 뿐, 함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해본 소리죠.”
“어디 가면 안 돼! 난 그냥 하는 소리 아니야!”
지혁의 명성은 그룹사 전체로 퍼져 있었다. TV에도 나올 정도였으니까.
이 젊고 유능한 직원을 눈독 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한 전무는 머지않아 그에게 외부 경쟁사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올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혁이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제를 바꿨다.
“오 사장님이 둘째라고 하셨죠?”
“맞아.”
“첫째는 오 부회장님이고. 나머지 두 분은 뭐 하세요?”
오 회장의 자제가 4명인 건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셋째와 넷째에 대해서는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셋째가 오진원 님이라고 하는데. 아들이야. 이분은 뭘 하고 다니는지 잘 몰라. 너무 자유분방해서 어릴 적부터 오 회장님 속 좀 썩였었지. 야인 같은 분이랄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넷째는요?”
“수재야. 내가 봤을 때는 형제 중에 가장 똑똑해. 지금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으로 알고 있어. 딸이고 오혜빈이라고 해.”
지혁은 생각했다.
‘막내면 나와 나이가 비슷하려나.’
“넷째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죠?”
“삼십 대 초, 중반일걸? 오 부회장님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그렇네요.”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오 부회장의 나이는 올해 46세다.
막내와는 못해도 10살 이상 차이 난다.
“오 회장님이 결혼을 일찍 하셔서 그래.”
지혁은 이 말을 듣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혹시 배다른 형제는 아니고요?”
***
“뭐?”
한 전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랐다가 내려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크게 나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
“그리고 이혼, 재혼이 많은 시대인데. 그게 뭐 특별한 건가.”
지혁은 한 전무가 가족 비화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가볍게 얘기 꺼낸 것처럼 보이려 했다.
“그래. 특별할 것까진 없지.”
“······.”
“근데, 오 회장님께는 특별하네.”
한 전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은 무조건 한 번만 해야 한다는 주의셔. 자식들에게도 끝까지 지켜나갈 자신 없으면,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할 정도니까.”
“왜 그러신 건가요? 무슨 신조가 있으신가?”
지혁은 오 회장이 왜 그럴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한 전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거기까진 나도 모르지. 뭐, 신조일지도 모르고, 아니며 다른 게 뭐 있으려나.”
지혁은 한 번 더 던져봤다.
“오 회장님이 그와 비슷한 일을 겪어서 일지도 모르죠. 계모와 살았다던가.”
“흠······ 그래? 뭐,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한 전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그의 태도를 유심히 살피며 확신했다.
‘그 이상은 모르는 모양이군.’
한 전무는 지혁의 친할머니, 아버지와 관련된 일은 모르는 듯했다.
“근데, 자네 상당히 관심이 많네?”
한 전무는 이제야 의식한 듯 지혁을 향해 물었다.
“오너일가의 라인을 타서 그런 건가?”
근데, 다행히도 적절한 이유를 먼저 던져주었다.
“그렇죠. 오 사장님 잘 모시려면, 아무래도 좀 다양하게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모셔. 훌륭한 분이시니까. 근데, 나한테 뭐 보고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네. 뭔가 홀린 기분인데.”
가볍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얘기를 나눴고, 시간도 꽤 지나있었다.
‘일단, 출신은 숨긴다.’
지혁은 지금 한 전무에게 밝힐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건 어느 정도 확인했기에, 이제 그가 더 의구심을 갖기 전에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전무님, 디자인실 간담회 내용 보고 드리겠습니다.”
“응? 어어, 그래.”
***
지혁은 간담회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고. 한 전무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디자인실이 있어야 한다?”
“네, 디자이너들은 해체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에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겠지.”
지혁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무시할 만한 의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꽤 진정성 있게 얘기를 나눴고요. 장기적 관점에서는 그들의 의견이 일리 있다고 생각해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네. 당장은 디자인실 해체하면, 효율성을 올라갈지 모르지만. 한번 깨진 건 다시 붙이기 어려워요.”
“뭘 어려워. 조직이란 게 원래 붙였다가 뗐다 하는 건데.”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의 영역 내에서는 그게 별일 아닐 수 있겠지만, 이건 특정 영역을 해체하는 거잖아요.”
“······.”
“나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최선의 방법도 아닌 것 같아요.”
탁. 탁.
한 전무는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래, 자네에게 맡기기로 했으니까. 그럼, 일단 디자인실 해체는 보류하지.”
“보류요?”
“제대로 된 조직쇄신안을 보여주게. 그러면 바로 결정하겠네.”
“······.”
“아무리 장기적으로 봤을 때 유지하는 게 좋다지만, 단기적인 성과도 보여야 하네. 특히, 회사원은.”
“알겠습니다.”
지혁은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근데, 한 전무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네 간담회 얘기한 것 중에 말이야.”
“네.”
“개발팀장 있지?”
지혁은 의아했다.
‘개발팀장 얘기는 왜 하지.’
“그 사람 정리할 수 있겠나?”
“정리요? 내보내라는 말입니까?”
“그래.”
지혁은 안 그래도 개발팀장을 손볼 생각이었으나, 그의 요청이 좀 의아했다.
전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특정 인원을 콕 집어서 말한다는 게.
“이유는요?”
“홍 대표 오른발이야.”
“오른팔도 아니고 오른발은 뭡니까?”
“뭐, 홍 대표 측근 중 핵심 인물까진 아니지만, 꽤 거슬리는 행동대장이라는 의미지.”
“아······.”
지혁은 개발팀장이 홍 대표와 엮여있는 것까지는 몰랐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홍 대표는 선도물산에서 없어져야 할 인물 1순위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관찰하고 있지.”
“······.”
“아마, 그 양반도 우리를 관찰하고 있을 거야. 조심하라고.”
지혁은 얼마 전에 복도에서 마주쳤던 홍 대표의 모습을 기억했다.
‘줄타기 중이니, 삐끗하면 끝’이라고 했던 경고도.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어차피 개발팀장은 손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요.”
“다른 사람?”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쓸 필요는 없잖아요.”
***
그날 밤.
지혁은 야근을 하며 디자인실 속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조직쇄신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그걸 해결한 방법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성과도 잘 내고, 일은 잘하지만. 지혁은 업무 경력이 짧다.
큰 줄기만 잡았다.
‘서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하는 프로세스를 바꾸는 것.’
이걸 구체화 시키려면, 업무 프로세스를 잘 알고, 각 단계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걸 왜 내가 하고 있냐.”
독고다이가 익숙해서일까.
당연한 듯 혼자 생각하고 진도를 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나 해서 사내 메신저를 열어보았는데.
‘업무 중 : 윤현성 팀장’
지혁은 피식 웃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 안 하고 뭐 하세요?]
[오 팀장이 넘긴 일 하고 있다! 왜!]
윤 팀장은 툴툴거리면서도, 맡은 일은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지혁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조직쇄신안 짜는 중?]
[그거 말고 이 시간까지 뭐 하겠어! 왜?! 밥 사주게?]
지혁은 윤 팀장이 팀원으로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했다.
[언제 끝나는데요?]
[밥 먹고 와서 해도 돼.]
[부장에 팀장까지 되셨는데, 사주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난 애가 둘이야!]
지혁은 씩 웃었다.
[늦었는데, 밥은 됐고. 술 한잔하시죠?]
윤 팀장은 이 말에 빠르게 반응했다.
[ㅇㅋ 1층으로 갈게!]
회사 근처 순댓국집.
지혁은 윤 팀장의 빈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오늘 간담회 어땠어요?”
“뭘 어때. 새로울 것도 없는데.”
“.......”
“어느 정도 일했던 사람들은 문제가 뭔지 다 알 거야.”
윤 팀장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다만, 그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해서 그렇지.”
그다음 말은 지혁이 받았다.
“번거로워지니까. 내 일 아니니까. 그리고 바뀌면 적응하는데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해야 하니까.”
“맞아. 잘 아네.”
윤 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월급만 바라보며 편하게 살다가, 임계치에 다다른 거고. 결국, 이 지경까지 온 거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해결 방법도 잘 아시겠네요?”
“방법은 간단해.”
윤 팀장은 술잔을 입안에 털어놓고 말했다.
“각자의 영역에 충실하고, 다른 영역은 그 영역 담당자를 믿고 맡기는 거야.”
“아······.”
지혁은 이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렸던 것이 구체화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파트별 고유영역에 깊이를 더하고, 그 외의 것은 넘겨버리는 거네요.”
디자인은 디자인 고유영역.
개발팀은 개발팀 고유영역에 집중하는 것.
간담회를 해보니, 디자이너는 컨펌 단계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크로스 체크가 안 되니, 작은 실수가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제품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다.
‘내 영역만 하고, 다음 단계는 완전히 넘기는 것.’
“방법은 다들 안다니까.”
“.......”
“하지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실행해볼 엄두를 못 내지.”
지혁에게 이런 얘기는 필요치 않았다.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잡았으니, 달리면서 방법은 찾아내면 된다.
지혁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내일은 개발팀을 만나봐야겠네요.”
이 말에 윤 팀장은 개발팀장을 떠올렸고.
미간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