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마음의 소리 (2)
[목소리 크기 좀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실수한 거 인정하고, 시정하면 되잖아요. 굳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가며, 저의 실수를 만방에 알려야 할까요.]
[금요일 저녁엔 회식 좀 잡지 말아주세요. 애인이랑 약속 펑크 냈던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회식 빠지면 또 삐지시니까······.]
[업무 체크 좀 자주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왜 그러시는지 이해는 합니다만, 확인시켜 드리느라 업무 흐름 끊기고 효율이 안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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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혁은 계속 말했다.
개발팀장은 큰 충격에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으나.
그래도 지혁은 계속했다.
결국, 참다못한 개발팀장이 말했다.
“이제 충분한 거 같은데, 그만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요. 끝까지 들어야 해요.”
개발팀원들은 가감 없이 속 얘기를 설문지에 써내었고.
그래서 그들의 진심과 고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혁은 일부러 좋지 않은 내용만 추려서 얘기했다. 지금은 그게 필요한 시간이라 여겼다.
계속 이어지던 얘기는 어느덧 멈추었고.
“하아······.”
개발팀장은 깊은 한숨을 쏟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혁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의 표정, 숨결, 태도 모든 걸 주의 깊게 관찰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테스트해 보는 거였다.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개발팀장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프네요.”
“······.”
“이게 꽤 아픈 거구나. 진짜.”
눈가가 약간 촉촉해져 있었는데, 그는 보이지 않으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며 말했다.
“팀장 오래 하다 보니까, 팀원 시절을 잊고 살았던 거 같아요.”
“······.”
“나름대로는 회사에 도움이 되고, 팀원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했던 행동이었는데.”
개발팀장은 회한의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팀원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보네요.”
“그럼 팀원 탓인가요?”
듣기만 하던 지혁이 입을 열었다.
명료하고 간단한 질문.
개발팀장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제 탓이죠.”
“······.”
“한두 사람만 그렇게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이건······ 명백히 제 탓이죠.”
지혁은 속으로 많이 놀랐다.
‘의왼데? 혹시나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한편으로는 윤 팀장의 눈썰미에도 놀랐다.
이마의 색으로 사람의 성향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그가 변화할 가능성까지는 알 수 없다.
지혁이 못 본 걸 윤 팀장이 본 것이다.
“전 팀장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
“본부장님께 말씀드리고 팀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지혁의 눈이 커졌다.
***
개발팀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야. 분명히 연기는 아니야.’
그건 확실하게 캐치할 수 있다. 지혁이 자신 있는 분야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런 상황일 때,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도 생각해두었었다.
“저도 처음엔 개발팀장님이 팀장직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
“생각이 바뀌었어요.”
개발팀장은 지혁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거든요.”
개발팀장이 알쏭달쏭했지만, 지혁은 계속 말했다.
“사람이 변한다는 말 저는 안 믿어요.”
“······.”
“하지만 간혹 변화 수용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긴 해요. 전 그런 사람들을 특별하게 봅니다.”
땅에 떨어진 개발팀장의 자존감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개발팀장님은 특별한 사람 같네요.”
훌쩍.
개발팀장은 코가 다시 찡해져서 훌쩍거렸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는 지혁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젊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높게 느껴질까.’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직책도 같지만.
한참 위 상급자처럼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거나 태도도 그렇고.
“윤 팀장과 뭔가 약속을 한 거 같던데.”
“······.”
“전 그 약속을 무시하려 했는데, 윤 팀장님이 부탁하셔서 확인하러 온 거거든요.”
개발팀장은 묵묵히 지혁의 말을 들었다.
“어쨌든, 난 마음이 바뀌었고. 개발팀장님 함께 가는 거로 생각할 테니까.”
“······.”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전 두 번 기회는 안 드려요.”
정말 상급자처럼 말했지만.
개발팀장은 자신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일하는 방식 바꾸기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실 거라 믿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혁은 묘한 눈길로 개발팀장을 바라보다가.
훅 들어갔다.
“제 사람이 될 생각 없으세요?”
.
.
.
.
“네?!”
개발팀장은 흠칫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다.
“저 이런 말 잘 안 합니다. 복직한 후 두 번째 하는 말인데.”
“······.”
지혁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고.
개발팀장은 지혁의 눈빛을 홀린 듯 바라봤다.
‘왜 이렇게 멍한 기분이 들지.’
“보아하니, 위에 연줄도 있고, 뭔가 과거가 있으신 거 같은데.”
“······.”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개발팀장님께 관심이 생겼고,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회의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팀원들의 ‘마음의 편지’로 시작하여.
생각지 못한 제안까지.
개발팀장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진짜다.’
직급, 직책 상관없이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매료되어 본 건 처음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굿.”
지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죠? 전 배신자는 절대 가만 안 둡니다.”
“전 배신이 뭔지 모릅니다.”
“그럼 홍 대표는 뭔가요?”
개발팀장은 ‘홍 대표’라는 단어에 약간 움찔했지만.
“오해십니다. 회사 대표님이니까 시키는 일을 좀 해왔을 뿐, 그 이상의 유대감은 없습니다.”
“그래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지혁은 손을 내밀었고.
개발팀장은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지혁의 손을 잡았다.
지혁은 아주 든든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선도물산에서 만나본 사람 중 전투력 최강자.
그 어떤 지저분하고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줄 것 같은 터프함을 지닌 사람.
유비가 장비를 얻었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
선도생명 사장실.
“어서 오세요~”
오혜진 사장은 환한 얼굴로 한 전무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앉으세요.”
“네.”
오 사장은 한 전무 맞은편에 앉은 뒤, 웃으며 물었다.
“전무 되시더니, 많이 바쁘신가 봐요? 잘 오지도 않으시고. 아니면 엉덩이가 무거워지신 건가? 호호.”
뼈 있는 농담을 던졌고.
한 전무는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대답했다.
“하하. 아닙니다. 항상 살찌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한 전무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숙였고.
오 사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호호. 농담으로 한 말에 뭘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 민망하게.”
“하하.”
한 전무는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등에 식은땀이 났다.
“요즘 선도물산은 어때요?”
한 전무는 선도물산 근황에 관해 보고했다.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조직쇄신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지혁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다.
“그 친구는 어떻게 된 게, 빠지는 데가 없네요?”
오 사장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나대는 성격인가?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한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성격이 적극적입니다. 필요한 일을 할 때는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더라고요.”
“주저하지 않는다······.”
“네, 지금 조직쇄신도 껄끄러울 수 있는 일인데, 본인이 벌린 일의 여파라고 생각해서 직접 마무리를 지으려는 거 같습니다.”
“용감하네. 보통 회사원들은 이럴 때 피하려고 하지 않아요?”
한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오 팀장은 좀 다르죠. 그래서, 특진을 두 번이나 하고 명성을 쌓아가는 거겠죠.”
오 사장은 눈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네?”
“뭔가······ 말 못 할 목적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매사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거 보면······ 가족도 있다면서요.”
“네, 결혼했습니다.”
“그럼, 더욱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아무리 정상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오 사장도 소문을 들었기에, 지혁이 또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랑 산성’에서 만났던 지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 숨기는 듯한 기분이······ 이상하게 든단 말이에요.”
“······.”
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 팀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겠어요.”
한 전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
지혁과 윤 팀장은 ‘디자인실 해체’와 조직쇄신안을 준비했다.
디자인실. 개발팀과의 협의도 끝났고, 보고서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협의가 끝난 안을 경영자들에게 보고 후, 공표만 하면 된다.
쇄신안 최종 정리를 마친 뒤.
어느 날, 늦은 오후.
회의실에 디자인실의 운명을 결정할 네 사람이 모였다.
한 전무, 유 본부장, 오지혁 팀장, 윤현성 팀장.
“지금부터 조직쇄신의 일환으로 디자인실 해체 건 관련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발표는 윤 팀장이 맡았다.
“디자인실 간담회, 개발팀 미팅, 팀원 설문조사, 각 팀장 미팅, 상품기획실 미팅 등 여러 업무 관련자들의 의견을 조합해 본 바.”
윤 팀장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자인실은 해체하지 않고,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 말에 한 전무와 유 본부장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지금 비효율적인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윤 팀장은 화면을 전환한 후 말했다.
“업무 프로세스를 완전히 바꾸겠습니다.”
“······.”
“핵심은 간단합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에만 집중하고, 개발팀은 개발에만 집중합니다. 자기 영역에서 업무를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기면, 절대 관여할 수 없습니다.”
많이 고민한 만큼, 윤 팀장은 조금도 버벅대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제품의 완성도까지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디자이너가 이상을 그리면, 개발팀은 현실을 가져다줍니다. 그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유 본부장의 물음에 윤 팀장이 대답했다.
“네, 어떠한 경우에도요. 예외는 없습니다.”
“······.”
“예외를 두면,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준비한 업무 프로세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생산단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종 작업지시서가 나가면, 그때부터는 생산팀이 책임집니다. 업무 주무자인 생산팀이 디자인실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디자인실은 불안하다는 이유로 관여할 수 없습니다.”
“······.”
“즉, 컨펌단계가 없어지는 것인데. 디자인실 업무시간의 60%를 ‘컨펌’에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썼다는 것인데, 그러니 고유업무인 디자인에 집중할 시간이······.”
유 본부장은 윤 팀장의 말을 끊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그래, 좋아. 좋다 이거야.”
그는 미심쩍은 눈길로 물었다.
“근데, 제품이 잘못 나오면?”
“······.”
“그 책임은 누가 지나?”
피식.
가만히 있던 지혁이 유 본부장의 말에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