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따르세요
유 본부장은 지혁의 말에 움찔했다.
이상하게도 유 본부장은 그가 말을 하면 꼼짝을 못 하게 된다.
“제 질문 못 들었어요?”
한 전무와 윤 팀장도 함께 있는 자리. 그 두 사람도 유 본부장을 바라보았다.
유 본부장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확인하는 거지.”
“그럼 아신다는 거네요. 누가 책임지는데요?”
“······.”
유 본부장은 생각했다.
‘대답 잘해야 할 것 같은데······.’
부하직원 눈치를 보며 회사생활 하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야······ 담당자와 회사가 책임을 지는 거지. 모든 책임은 함께 지는 거 아니겠나? 하하. 자, 그 얘기는 그만하고······.”
지혁은 인상을 찡그리고 유 본부장을 바라봤다.
“······.”
꿀꺽.
유 본부장은 지혁의 눈빛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말실수했나?’
후우-
지혁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좀 후회가 드네요.”
“······.”
“사람을 잘 못 봤었나······ 후회가 몹시 듭니다.”
윤 팀장은 옆에서 불안했다.
‘오 팀장이 말 또 심하게 하려 하네. 근데, 어떤 사람을 잘못 봐? 뭐가 후회가 된다는 거지?’
그는 유 본부장이 송 상무를 내보내기 전에, 자리를 약속받았었다는 걸 모른다.
지혁이 말했다.
“모든 책임은 리더가 지는 거죠. 책임지기 싫으면 리더 자리에 있으면 안 되죠.”
“······.”
“상품본부 수장이 누굽니까? 근데, 혁신안의 불안한 내용을 보고, 대뜸 묻는 게 책임은 누가 지냐고?”
지혁 특유의 반말인 듯 반말 아닌 대화법. 유 본부장은 그의 말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누구 믿고 일을 해야 할까요? 사람 바뀌어도 별거 없네.”
한 전무는 유 본부장과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누굴 혼 내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유 본부장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야! 오지혁!”
결국 일어서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 전무와 윤 팀장은 깜짝 놀랐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보자 보자 하니까!”
유 본부장은 호기롭게 말했지만.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혁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모든 책임을 리더가 지면, 아래 직원이 몇 명인데 남아날 리더가 있을까? 그럼 담당은 왜 있는 건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
“자네가 본부장 됐을 때 그렇게 하던지. 난 못 하니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죠. 유 본부장님은 그런 분인 거로. 앉으세요.”
“어?”
유 본부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봤다.
“알겠으니, 앉으라고요. 더 얘기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은데.”
그리고 지혁은 한 전무를 향해 말했다.
“전무님.”
“어.”
“미팅 끝나고 저랑 단둘이 대화 좀 하시죠.”
유 본부장의 눈이 커졌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 타이밍에 한 전무에게 독대를 하자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갑자기?”
“네, 인사 문제 관련해서 논의 드릴 게 있어서요.”
유 본부장은 두 사람의 유대관계를 알고 있다.
그의 눈이 황급히 돌아갔다.
‘제기랄, 괜한 짓을······.’
지혁이 한 전무에게 무슨 얘기를 할지, 짐작되었고.
방금 발끈해서 행동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도대체가 사람이 화를 냈으면, 좀 반응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 본부장은 자존심보다 결과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체면보다는 안위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결국에 모든 책임은 경영자가 지는 것이지.”
옆에서 윤 팀장이 어이없는 얼굴로 유 본부장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일차적 책임은 담당이지만, 최종 책임은 경영자란 뜻이야. 특히, 회사 정책이라면 그렇겠지.”
자연스럽게 말을 바꾸는 유 본부장을 보며, 한 전무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품본부장 자리에 있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송 상무 보는 것 같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최종 결정을 하시죠.”
***
지혁은 한 전무와 유 본부장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혁신안 수용합니까. 안 합니까?”
“······.”
“책임에 대한 얘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최종 수용 여부만 결정하면 될 것 같은데요.”
유 본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릎도 모으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한 전무는 유 본부장을 향해 물었다.
“본부장님, 뭐 하세요?”
“네?”
“오 팀장이 수용 여부 결정하라잖아요. 못 들으셨어요?”
“아무래도 여기 전무님이 계시니까······.”
유 본부장은 한 전무에게 결정권을 넘기려는 거였고.
한 전무는 이런 유 본부장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일도 좀 하고, 성과욕은 있는데. 뒤탈을 너무 신경 쓰네.’
한 전무는 유 본부장과 옥신각신하기 싫어서, 결국 나섰다.
“두 사람이 준비를 잘해줬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네. 내가 뭐 상품기획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쨌건 회사 일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
“이 혁신안의 핵심은 각 단계의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전문적으로 일을 해주는 거라 보거든? 그게 안 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보는데.”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전무는 확실히 핵심을 짚고 있었다.
“관계부서와 다 협의가 끝낸 사항이라고 했지?”
윤 팀장이 대답했다.
“네.”
“적어도 각 단계에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체크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분임조를 만들어서 운영하려 합니다. ‘관여’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요.”
한 전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지혁을 바라봤다.
“오 팀장. 마지막으로 묻겠네.”
“네.”
“자신 있나?”
윤 팀장이 아니라, 지혁에게 물었다.
한 전무가 신뢰하는 사람은 지혁이기에.
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한 전무는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실행해.”
지혁의 확실한 대답 한마디면 충분했다.
한 전무는 바로 업무 프로세스 혁신안에 사인했다.
***
웅성. 웅성.
강당 안에 디자인, 개발, 상품기획, 생산 등 제품 프로세스에 관련된 각 부서가 모여 있었다.
“자네가 하자고 해서, 모으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윤 팀장은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못을 박아야죠.”
“그냥 메일로 전달해도 되잖아.”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이런 건 얼굴 마주하고, 눈을 보고 얘기해 줘야 해요. 그래야 불안해하지 않지.”
“······.”
“따르는 사람들은 쉽게 불안해한다고요. 그 불안함을 없애주는 게 앞에서 이끄는 자가 할 일이고.”
“······.”
“잘하실 수 있죠?”
“아, 몰라. 떨려.”
안 보이는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회사생활 했던 윤 팀장.
이제 마이크 들고 직원들 앞에까지 서게 되었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윤 팀장은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고.
지혁은 마이크를 윤 팀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잖아요. 이제 끝내죠.”
“······ 그래.”
이걸로 디자인실에 빚진 마음은 털어버리는 것이다.
윤 팀장은 용기 내어 단상 위로 올라갔다.
“······.”
웅성거리던 강당 안이 조용해졌고.
윤 팀장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상품기획 3팀의 윤현성 팀장이라고 합니다. 인사드립니다!”
-짝짝짝.
윤 팀장이 지혁처럼 명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회사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를 모르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바쁘실 텐데도 자리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리고요. 지금부터 상품본부 ‘업무 프로세스 혁신’ 관련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막상 발표를 시작하니, 윤 팀장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각 부서를 찾아뵙고 설명드렸기 때문에 다 아실 겁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확정 짓는 자리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지혁이 PPT를 띄웠고, 윤 팀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다 협의가 이뤄진 내용이라,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묵묵히 윤 팀장의 말을 들었다.
발표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20여 분 정도 지나 끝이 났고.
“이 '업무 프로세스 혁신' 실행일은 오늘부터 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 관여 안 하면 되는 거니까요.”
-실행일이 오늘부터?
-막상 진짜 할 생각하니까 겁나네.
-개발팀 소재 자꾸 이상한 거 찾아오던데······ 어떻게 믿고 맡겨.
-큰일 났네. 나중에 옷 조금만 잘못 나오면 디자인실이 난리 칠 텐데.
-생산팀 힘만 세지는 거 아니야? 완전 자기들 멋대로 할 거 아니야.
강당 안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실이 관여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합니까?
“분임조를 둘 거고요.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가 정착할 때까지 저희가 계속 신경 쓸 겁니다.”
-옷 조금만 잘 못 나와도 분명히 디자인실에서 책임 운운할 텐데요.
뒤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옷을 잘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그 기분을 도대체 누가 맞춰요?!
-그려준 대로도 못 만들어요?
-그림과 딴 얘기를 하니까 그렇죠! 내가 관심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속을 어떻게 들여다 봐?
-뭐라고요!
-원하는 게 자꾸 바뀌잖아요! 의뢰서 넘겼으면 그걸로 끝이지.
-의뢰서대로 못 맞춰오니까 그러는 거죠!
분위기가 난잡해 지고 있었다.
지혁은 이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윤 팀장은 당황했고.
저벅. 저벅.
결국, 지혁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
단상 위에 선 지혁을 보자, 일순 조용해졌다.
지혁은 아무 말 없이 윤 팀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지혁에게 마이크를 건네었다.
“오지혁입니다.”
자신을 짧게 소개했다.
이름만 얘기하는 걸로도 소개는 충분하다. 현재 선도물산에서 지혁의 명성은 대단하기 때문에.
“뭔가 착각을 하시는 거 같은데.”
지혁은 강당 안에 모인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많은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동안 윤 팀장님과 제가 각 부서를 돌면서 많은 논의를 드렸었죠?”
사람들은 묵묵히 지혁을 바라봤다.
“논의는 끝났습니다. 여기는 논의를 위한 자리가 아니에요.”
“······.”
“결정된 사안을 알려 드리고, 명령을 내리는 자리입니다.”
지혁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회사의 지침이며, 경영자의 명령입니다.”
“······.”
“따르세요.”
“······.”
“회사에 계실 거면, 따르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전 이 일이 반드시 잘되도록 할 겁니다. 그래야만 하는 여러 이유가 있거든요.”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따르세요. 후회 없을 겁니다.”
한 전무는 뒤에서 지켜보며, 지혁의 카리스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여간······ 물건이야. 물건. 도대체 입사하기 전에 뭔 경험을 한 거야.’
지혁의 몇 마디 말에 상황은 완벽히 정리되었다.
“지금부터 5분 드릴게요. 못 따르시겠는 분은 나가주세요.”
5분간······ 강당 안에 정적이 흘렀고.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혁은 시간이 지난 걸 확인한 후 말했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안. 이걸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