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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86화 (86/301)

86. 결국엔 이렇게 (1)

한 전무는 설명회가 끝나자마자 지혁을 호출했고,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내 지시를 무시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혁에게 일임하면서, 그에게 요청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개발팀장 정리해라.’

하지만 지혁은 그걸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똑. 똑.

문 드리는 소리에 한 전무는 크게 소리쳤다.

“들어와!”

덜컹.

지혁이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한 전무의 곱지 않은 표정을 보며, 지혁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네 말이야.”

“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네?”

“내가 요청한 거 잊었나?”

“······.”

그래도 지혁이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하자, 한 전무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개발팀장 말이야.”

“······.”

“내가 정리하라고 했을 텐데.”

“아~”

지혁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는커녕, 설명회 때보니까 자리가 더 확고해진 것 같던데.”

개발팀장은 지혁과의 독대 이후, 사람이 달라졌다.

달라진 모습으로 팀원들에게 노력했으며, 곧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방식을 몰랐던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가 그렇게 만든 건가?”

“네.”

지혁은 변명하지 않았고, 한 전무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왜지? 홍 대표의 오른발이라서, 정리해야 한다고 지시했었는데. 기억 안 나나?”

“······.”

“자네 역할을 잊으면 안 돼.”

피식.

지혁은 한 전무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고 있지만, 지혁은 그 누구의 손아귀에서도 놀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필요에 의한 전략적 관계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난 역할 제대로 했는데요?”

“뭐?”

“가까이서 보니 개발팀장은 꽤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고, 쳐내는 것보다는 안는 걸 선택했습니다.”

“······.”

지혁은 한 전무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전 제 방식대로 일해요. 결과만 같으면 되잖아요. 그는 이제부터 홍 대표의 편에 서지 않기로 했으니. 그걸로 된 거 같은데.”

한 전무를 향해 경고성 발언을 날렸다.

“그리고, 제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 쓰면 그만이에요. 간단한 일이에요.”

지혁을 질책하려 했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불렀는데.

지금, 지혁의 태도에 한 전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한테도 이런 식으로 나오네.’

지혁의 태도와 말투.

옆에서 구경만 했지, 직접 겪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개발팀장이 홍 대표 편에 설지 안 설지, 자네가 어떻게 알지? 기만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나?”

“안 해요.”

여기서 단호하게 ‘안 해요’라고 대답할 줄은 생각 못 했다.

한 전무는 또 한 번 당황했다.

“보아하니, 그럴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원래부터 홍 대표의 사람이 아니었던 거 같던데. 잘못 알고 계셨더라고요.”

지혁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한 전무를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처럼, 저한테 믿고 맡기세요. 고 팀장, 분명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

“하아······.”

지혁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한 전무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일반인 같지 않은 너무나 당당한 지혁의 태도를 볼 때마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들었다.

직접 상대해보니 더 그랬다.

‘오 사장님이 요청하셨던 일, 적극적으로 알아봐야겠어.’

***

“나 왔어~”

지혁은 오랜만에 야근하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왔다.

수아는 반가워서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주말 부부 아니었어?”

“하하. 무슨 소리야.”

지혁은 멋쩍어서 말했다.

맞벌이를 하지만, 수아의 회사는 집에서 가까웠고 칼퇴 문화가 있었다.

지혁은 항상 늦고, 그러다 보니 평일 저녁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일이 많았다.

“평일에 얼굴 보니까 어색하네.”

“그만 좀 놀려~”

수아는 지혁의 서류 가방을 받아주며, 말했다.

“오 팀장님~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안 했지~ 같이 저녁 먹으려고 일찍 들어왔잖아~”

“영광이옵니다.”

그녀가 투덜거리는 게 귀여워서 지혁은 웃었고.

수아 또한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잠시 후.

김치찌개와 각종 밑반찬으로 저녁 식탁이 풍성해졌고.

지혁은 찌개를 한 수저 떠먹었다.

“캬~ 좋다. 요즘 기름진 것만 먹어서 질렸었는데.”

“많이 먹어.”

“응~ 수아도 어서 먹자.”

달그락. 달그락.

지혁은 반주도 한잔하며, 평안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매달렸던 조직쇄신안을 오늘 완전히 끝을 봤다. 지혁은 송 상무를 쳐낸 것보다, 이번 일에 더 많은 신경이 쓰였었다.

‘이 혁신안이 잘 유지되는지,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오늘 공표까지 마쳤으니, 가장 중요한 건 다 끝낸 것이다.

“자기 오늘 표정이 밝다?”

“하하. 그래?”

“뭐, 좋은 일 있어?”

그리고 의미도 있었다.

어쨌든, 조직해체를 막았고, 여러 사람을 살리게 되었으니까.

“확실히 죽이는 것보다는 살리는 게 낫네.”

“왜 갑자기 무시무시한 소리야. 밥 먹는데.”

지혁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고.

수아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지혁에게 물었다.

“회사 일이겠지?”

“맞아.”

“얘기 좀 해줘 봐. 궁금해.”

“에이~ 재미없어~”

수아는 도리질을 하고 말했다.

“자기네 회사 얘기 재밌단 말이야. 어서 말해줘 봐. 궁금해.”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꼭 들어야겠어?”

“응! 어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말했다.

“당신 결자해지라는 말 알지?”

“결자해지?”

그로부터 지혁은 ‘디자인실 해체’ 얘기가 나온 시점부터 쭉 설명해주었고.

수아는 박수까지 쳐가며 재밌게 들었다.

말하는 내내 지혁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그로부터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은 예상대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랫동안 굳어진 프로세스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디자인실은 불안해서 자꾸 확인하려 했고, 개발팀은 사고 날까 봐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생산팀은 자꾸 디자인실 도움을 요청했다.

기존의 일하던 습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지혁은 각 단계의 사람들이 용기 낼 수 있도록 꾸준히 독려했다.

‘불안해도, 불안함을 안고 일해라.’

‘사고 나도 좋으니, 원칙대로 해라.’

‘원칙에 맞지 않는 요청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받아주는 부서도 책임회피 못 한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 덕분에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는 차츰 정착되어 갔고. 그 효과는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혁은.

예전과 다른 평판을 쌓아갔다.

-오 팀장님 같은 분이 리더였으면 좋겠어.

-엄밀히 말하면 디자인실 살린 거잖아.

-일만 잘하는 게 아니야. 속도 깊은 거 같아.

-너무 든든하지 않아?

직원들은 단순히 그를 상품기획 1팀장으로 보지 않았다.

자기 팀 성과만 챙기는 특출난 직원을 뛰어넘어.

이제는 자연스럽게 선도물산의 리더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

외부적으로는 중요한 일이 아니며, 큰 매출을 가져다주는 성과와도 관련 없는 일이지만.

조직의 결속력을 다졌고, 지혁의 회사 내 평판을 완전 업그레이드해주었다.

“윤 팀장님, 홍썬을 SPA에 쓰는 게 어딨어요? 상품기획 1팀 건데.”

“에이~ 같이 좀 쓰자~ 내가 담당이었잖아.”

윤 팀장은 홍썬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이동한 팀에서 그녀와 디자인 콜라보를 하며 재미를 보았고.

근 3년 만에, SPA브랜드에서 작긴 하지만 성과를 만들어내었다.

개발팀의 고 팀장은 여전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여전히 인접부서에는 껄끄러운 인물이지만.

팀원들에게는 누구 못지않게 사랑을 받았다.

지혁이 심 부장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오 팀장 고마워. 덕분에 요즘은 아침에 눈 뜨는 게 싫지 않다.]

또한 고 팀장은 업무 외에도 지혁의 여러 가지 요청사항을 성심을 다해 수행했다. 쉽게 마음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다 주는 속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품기획 1팀의 정 차장.

지혁이 외부 일에 신경 쓰느라 1팀을 못 챙기는 동안, 그는 명실상부한 팀장급으로 성장했다.

팀장 현업은 정 차장이 거의 다 챙기고, 지혁은 그에게 보고만 받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혁이 노는 게 아니란 걸 팀원들은 잘 알기에, 불만 갖지는 않았다.

팀원들 또한 선도물산 직원들처럼 지혁을 팀장 이상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이 그를 올려주고 있었다.

***

“오 팀장님,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상품기획 4팀의 이혜숙 팀장이 기획서를 들고 찾아왔다.

“이번 시즌에 신규 라인으로 넣으려고 하는데, 어때요?”

“흠······.”

같은 팀장끼리 업무 보고를 한다.

낯선 일은 아니라서, 지혁은 가볍게 한번 봐주었다.

“괜찮네요. 근데 발주액이 좀 크지 않을까요? 신규는 테스트 느낌으로 가는 게 좋죠. 특별히 베팅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아······ 이것도 많다고 느끼시는구나. 알겠어요. 고마워요~”

요즘 팀장들은 유 본부장 대신 지혁을 더 찾아온다.

4팀장과 대화가 끝나자, 손정진이 지혁을 불렀다.

“팀장님!”

“왜?”

“대화 중이라 말씀 못 드렸는데, 한 전무님께 전화 왔었어요.”

지혁이 곧바로 전화하려고 하자, 손정진이 말했다.

“전화 안 하셔도 돼요. 얘기 끝나고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어, 그래.”

잠시 후.

지혁은 한 전무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똑. 똑.

[오 팀장입니다~]

한 전무와는 가깝게 지내고 있어서, 지혁은 문을 두드리고 바로 들어간다.

덜컹.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음? 뭔가 좀 이상한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창문을 향해 선, 한 전무의 뒷모습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항상 지혁이 들어오면 항상 반갑게 맞았는데, 지금도 그는 뒤돌아 서 있었다.

“저 왔습니다.”

다가가 말했지만, 한 전무는 여전히 싸늘했다.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왜 부르셨어요?”

“······.”

‘뭐야? 왜 이렇게 무게를 잡는 거야. 집에 뭔 일 있나?’

지혁은 사생활까지 배려할 만큼 심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실 말씀 없으면 갈게요.”

곧바로, 뒤돌아 나가려는데.

“자네, 정체가 뭐야?”

뜬금없는 말에 지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의도가 뭐야? 왜 숨겼어?”

한 전무는 기괴한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적절한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한 전무가 먼저 알게 되었다.

지혁은 한 전무의 질문에 대답 대신,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오 사장님도 아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한 전무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눈빛이 흔들렸고.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자네가 정말······ 오종원 이사님의 아들 맞아?”

지혁의 아버지 이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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