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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87화 (87/301)

87. 결국엔 이렇게 (2)

한 전무는 처음엔 ‘지혁을 알아보라’는 오 사장의 지시를 가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의구심이 커졌다.

처음엔 그냥 특출난 청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허를 찌르는 지혜, 일을 처리하는 결단력, 사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뭔가 있어.’

무엇보다도, 거친 개발팀장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가장 컸었다.

똑똑.

“전무님.”

비서가 들어왔다.

“어, 그래.”

“서류 전달 드립니다.”

아무런 글씨가 없는 하얀색 봉투.

한 눈에 봐도 흥신소에서 온 거였다.

“본 사람 없지?”

“없습니다.”

“입단속 잘하게.”

“알겠습니다.”

봉투 안에 담겨진 서류는 대부분 공문서였다.

‘연일 오 씨.’

지혁의 본관을 보고, 한 전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뭐, 알던 거였으니까.’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등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오종원?’

가족관계증명서의 아버지의 이름을 보고 한 전무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듯한 이름이었다.

“오종원······ 오종원······.”

몇 번 이름을 되뇌다 보니, 기억났다.

오종건 회장의 막냇동생.

선도전자의 신사업 팀장을 맡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잠적한 사람.

‘에이······ 설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오종원'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후부터 한 전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연일 오 씨’라는 지혁의 본관. 자신이 아는 사람과 동명인 그의 아버지.

일단 확인은 다 했다.

서류 자체에서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의구심이 더 짙어졌다.

자꾸 머릿속에 ‘오종원’이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한 전무는 고민하다가.

비서를 다시 불렀다.

“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가족관계 증명서를 건네며 말했다.

“흥신소에 다시 의뢰해. 오종원 님에 대한 제적등본이 필요해.”

비서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확인했다.

“오 팀장님이 아니라, 오종원 씨요?”

한 전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씨’라니. 함부로 말하지 마.”

비서는 당황하여, 곧바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

한 전무는 오종원의 제적등본을 확인한 후, 놀라서 쓰러질 뻔했다.

오성근 선대 회장의 막내아들.

오종원 이사가 맞았으니까.

***

영업본부장 집무실.

한 전무와 지혁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 말 못 들었어? 정말 오종원 이사님의 아들이 맞냐니까.”

“제 아버지를 어떻게 알아요?”

지혁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맞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한 전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해서, 숨길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하, 참나. 진짜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한 전무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젓다가.

“돌아가셨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오너일가야 뭐 워낙 비밀이 많으니까, 뭔가 이유가 있어서 잠적한 거라고 생각했지.”

“······.”

“어디에 모셨나?”

“화장했어요.”

“아······ 그래. 인사라도 드리러 가려 했더니.”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지혁이 먼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한데. 얘기해 줄 수 있으세요?”

“흠······.”

그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나뿐만이 아니야. 그 당시에 오 이사님 모르는 직원은 선도물산에 없었지. 오너일가 답지 않게 서민적이고, 자상한 분이셨으니까. 업무 능력도 좋으셨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얘기를 듣는다는 것.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혁은 꾹 참고 들었다.

“게다가 나는 그룹 비서실에 있었기 때문에 오 이사님 뵐 일이 많았지. 그때 난 막 대리를 단 서른 살 청년이었고. 사십 대 초반이던 오 이사님은 전성기를 달리고 계셨지.”

한 전무는 지혁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어릴 때 돌아가신 거 같던데.”

“맞아요. 자세히 알아보셨나 보네요.”

“흠!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

“거의 없어요. 그래서 궁금한 거예요.”

한 전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참 아쉽네. 그런 훌륭한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오 이사님은 진짜 멋진 분이시거든.”

그리고 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네도 범상치 않은 건 알지만, 분위기가 완전 달라. 오 이사님께 어떻게 이런 아들이······ 새삼 참 신기해. 하긴 뭐, 자식이 꼭 부모 닮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어떻게 다른데요?”

“자네와 딱 반대야. 자상하시고, 농담도 잘하시고, 같이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오는 그런 분이랄까? 누구나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내용은 돌려 까는 거였지만, 말하는 태도가 그렇지 않았기에 잠자코 들었다.

한 전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얘기하다 보니 생각나네. 한번은 선대회장님 주재로 회의를 하는데, 난 오 이사님 맞은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지. 오 이사님이 갑자기 날 보면서 선대회장님 말할 때 표정을 따라 하는데, 난 빵 터졌었지. 그 어려운 회의 자리에서 말이야. 하하.”

한 전무는 기분 좋은 듯 웃었지만, 지혁은 웃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고, 지금도 만날 수 없는 아버지의 얘기. 유쾌한 일화가 더 슬프게 들렸다.

“오너일가에서는 유일한 캐릭터였고, 그래서 직원들이 좋아했었어.”

“그래서 형제들의 견제도 심했고요?”

한 전무는 이 말에 흠칫 놀라더니,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차피 뻔한 답이었기에, 지혁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다른 질문을 했다.

“선대회장님은 우리 아버지 좋아하셨나요?”

“말해 뭐해.”

한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형제들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막내잖아. 거기에 인성 좋지. 일 잘하지.”

“······.”

“선대 회장님이 오 이사님 보는 시선만 봐도 느껴졌지. 눈에서 꿀이 떨어졌으니까. 오 이사님은 그럴수록 더 열심히 회사일 챙기시고.”

지혁은 이 말을 듣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눈치가 없으셨네.”

그리고 한 전무에게 물었다.

“형제들과의 관계는요?”

“괜찮았어. 표면적으로는.”

지혁은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권력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잖아.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 내가 보기엔 아마 오 이사님이 견제대상 1호였을 거야.”

‘그리고 우리 아버지만 어머니가 다르시니까.’

어머니가 다르다는 건 한 전무도 모르는 얘기다.

지혁은 한 전무의 얘기를 들으면서, 상황이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방심했네요.”

한 전무가 지혁의 말을 잘랐다.

“직접 본 게 아니면, 함부로 얘기하지 말게. 방심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형제들을 믿은 거지.”

“······.”

“어찌 됐든, 자네 아버지는 분명 훌륭하신 분이야. 나 또한 가슴 깊이 존경했고.”

“······.”

“난 회사생활 하는 내내 그분을 닮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분을 닮기 위해서······.’

지혁은 새삼 한 전무의 모습을 떠올렸다.

‘꽤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이분이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건가?’

“그래서. 지금은 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직 멀었지. 계속 노력 중일세.”

지금 한 전무의 직급은 아버지가 회사 다닐 적 직급보다 높다. 그가 말은 이렇게 해도, 아버지를 닮다 못해 뛰어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자네 아버지 얘기는 나중에 더하기로 하고.”

한 전무는 정말 궁금했던, 중요한 얘기를 꺼내었다.

“도대체 왜 숨긴 건가?”

***

지혁은 잠시 생각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어차피 한 전무에게 지혁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제 서류로도 확인할 수 없는 진실만 남았다.

지혁의 목표, ‘그 세계’에서의 경험, 오 부회장의 보라색.

잠시 고민하다가, 모든 진실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전무를 신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저도 안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

“네. 회사에 복직한 뒤에 우연히 알게 됐어요.”

한 전무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상하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머니께서 숨기셨었나? 왜?”

지혁은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고, 한 전무가 계속 말했다.

“어찌 됐든, 이제 알게 되었으니 당당히 정체를 밝히고 나서면 되잖아? 임원급 중에 오종원 이사님 기억 못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제적등본으로 관계 확인도 되고······.”

“글쎄요.”

지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회사를 나가게 됐는지 모르시죠?”

“자세히는 모르네. 어느 정도 짐작은 하지만.”

한 전무도 안다는 뉘앙스였고, 그래서 지혁은 편하게 말했다.

“섣불리 나타나면 역효과에요.”

지혁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숨겼던 거고.”

“아······.”

‘때를 기다린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건가?’

한 전무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사를 전복이라도 시키려는 건가? 무슨 목적이 있길래?”

“무슨 목적이 있겠어요.”

오 부회장이 회장이 못 되도록 하겠다는 큰 목적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정체를 숨긴 다른 이유로 대신해서 말했다.

“그냥 오종원 이사의 아들이 회사에 나타났다고 하면······ 큰아버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지혁은 ‘그 세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강한 자들은 위협은 싹부터 잘라버린다.

수사자가 무리를 지배하면, 새끼 사자들부터 물어 죽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 또한 생존 본능이다.

“섣불리 나타나면 안 되죠. 누구 좋으라고. 아직은 숨길 수밖에 없는 거죠.”

“그 말은······”

한 전무의 눈빛이 빛났다.

“오너일가를 다 적으로 두겠다는 건가?”

“아니요.”

지혁은 분명하게 말했다.

“저를 적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적으로 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파악이 필요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죠.”

“······.”

한 전무는 지혁의 용의주도함과 침착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참, 대단해. 오 이사님은 이렇게 성장한 아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실까.’

한 전무는 질문을 하며 지혁의 속마음을 더 파악해 보려 했지만, 그는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한 전무에게 더이상 속 이야기를 안 하려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중요한 사실은 알았으니까.’

한 전무는 질문을 멈췄고, 두 사람 간에 침묵이 이어지다가.

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제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해주셔야죠.”

“응?”

“오 사장님이······ 이 사실 아세요?”

이때, 지혁은 맹수와 가까운 눈을 보이고 있었다.

꿀꺽.

한 전무는 그에게 위협적인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솔직하게 답변해 주셔야 해요. 지금 거짓말하시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대답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안 했어.”

“정말이죠?”

“그래. 너무 믿기 힘든 사실이라, 확인해 보려고 먼저 만나자고 한 거야.”

“······.”

지혁은 진실인 걸 가늠해 보기 위해 한 전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지는 않네.’

“좋아요. 믿을게요. 그럼,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

“오 사장님께는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한 전무는 내내 생각했었다.

‘만약, 그가 정말 오종원 이사님의 아들이라면······.’

사실을 확인했으니,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한 전무는 지혁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단, 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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