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89화 (89/301)

89. 기회일지도 (2)

“황당하네.”

명함을 보자마자, 지혁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었다.

그는 개인정보를 철저히 관리한다.

금융 앱 등 개인 신상 정보가 필수인 그 어떤 앱도 핸드폰에 깔지 않으며.

웬만해선 전화번호도 잘 알리지 않는다.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명함을 안 들고 다니는 정도였다.

게다가, 회사에서도 지혁을 집중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카우트의 접근 경로 자체를 막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업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지혁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하하. 많이 놀라셨어요?”

재우 인터내셔날의 류 팀장은 지혁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지혁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 오 팀장님을 만나야만 했으니까요. 하하.”

“······.”

“이런 게 인연의 시작 아니겠습니까. 커피 한잔하시죠~ 이쪽으로.”

완전히 불도저였다.

옆에 있던 팀원들 또한 황당하긴 마찬가지였고.

지혁은 카페 안을 가리키는 그의 손짓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 관심 없는데요.”

지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네? 방금 명함 보여드렸지만, 저는 재우 인터내셔날 인사팀장······.”

“네, 봤어요. 근데, 어쩌라고요.”

“······.”

재우 인터내셔날.

재우 그룹에서 패션업과 상사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다.

그룹 규모로만 따지면 선도그룹이 압도적인 1위지만, 패션만 따지면 그렇지 않다.

브랜드 가치, 매출, 업무 만족도 등 패션 영역에서만큼은 재우 인터내셔날이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패션 직무를 희망하는 구직자들에게도 매년 희망 입사 1위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네? 아 뭐, 어쩌라는 건 아닌데요.”

통상 스카웃 제안을 하면 반갑다며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회사 로얄티가 엄청나신데?’

하지만, 이렇게 쉽게 물러날 거면 선도물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멀리서 왔는데, 차라도 한잔 함께 하시면서······.”

지혁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에게 이직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지혁은 선도그룹에 목적이 있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높은 연봉과 수준 높은 복지를 꿈꾸며 회사생활 하는 게 아니었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얘기했다.

“정말 시간 낭비가 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전 이직할 생각이 조금도 없거든요.”

“······.”

류 팀장은 길을 잃은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커피는 제가 대접해 드리죠. 정진, 아까 준 카드로 두 분 커피 주문해 드려.”

“알겠습니다.”

지혁과 팀원들은 카페로 들어갔고, 재우 인터내셔날의 류 팀장은 멍하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1층 로비의 다른 선도물산 직원들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지혁은 상품기획 팀원들과 잡담을 나누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지이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오 팀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재우 인터내셔날 류 팀장이었다.

팀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와······ 얼굴 두께 장난 아니시네.

-이러기도 참 쉽지 않은데.

지혁은 약간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래, 자기 본분에 충실히 하는 거니까.’

참으며 물었다.

“뭔데요?”

지혁이 대답해주자, 그는 의자를 더 바싹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묻기는 좀 그런 건데.”

그리고 팀원들을 돌아봤다.

지혁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그럼 묻지 마세요. 저도 딱히 나누고 싶은 얘기 없으니까.”

찬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류 팀장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혹시, 현재 연봉을 2억 이상 받으시나요?”

“······.”

지혁은 황당해서 류 팀장을 바라봤고, 주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도 얘기해주시기 어려운가요? 직급은 차장이신 거로 알고 있는데.”

“······.”

“어차피 회사원의 목적은 연봉과 명예 아니겠습니까? 회사 오너가 아닌 이상.”

공교롭게도 지혁은 오너일가의 일원이다. 경쟁사의 인사팀장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저희는 오 팀장님에게 실장급 직책과 연봉 2억······.”

류 팀장은 말을 멈추고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주변 시선을 의식했다.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2억 + @를 제시할 겁니다. 우리 회사 복지는 업계에서 유명하니까, 더 설명해 드릴 필요는 없을 거 같고요.”

지혁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연봉을 2억 원 넘게 준다고? 그 돈이면······.’

해외여행을 여러 차례 갔다 올 수 있고, 수아와 좋은 레스토랑에서 회식도 실컷 할 수 있다.

집을 장만한다거나, 주식에 투자한다든지의 장기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류 팀장은 지혁의 태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때요? 저랑 잠시 얘기 좀 해보실래요? 일단 들어보시고, 아니면 말면 되잖아요.”

‘한번 들어나 볼까?’

회사를 옮길 생각은 물론 없지만, 궁금했다.

약간 고민되던 찰나에.

“저기요. 적당히 좀 하세요. 관심 없다는 데 왜 자꾸 그러세요?”

황 과장이 나섰다.

지혁의 곤란해하는 표정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이게 설득입니까?”

“아, 제가 좀 곤란하게 해드렸나요?”

류 팀장은 지혁을 향해 물었고,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뭐, 곤란했던 것까지는 아닌데. 황 과장님 전 괜찮으니까······.”

그때, 주변에 있던 선도 물산 직원들도 류 팀장에게 들릴 정도로 수군거렸다.

-매너 너무 없다.

-재우 인터내셔날 인사팀은 원래 저래?

-사람 상대하는 직무자가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류 팀장은 압박감을 느꼈다.

지혁은 선도물산에서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수군거림은 더 심했다.

-어디 선도 물산 오 팀장님한테 함부로.

-보안요원한테 얘기해서 내보내 달라고 할까?

-오 팀장님은 안 되지.

이쯤 되자, 불도저 류 팀장도 어쩔 수 없었다.

“아, 하하. 이거 참.”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지혁에게서 떨어졌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선도 물산 직원들이 다 함께 나서니 어쩔 수 없었다.

“흠! 오 팀장님.”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 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

류 팀장은 인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대표님이요······ 문제가 많은 거 같던데. 이런 회사에 계셔야겠습니까? 멀리 보셔야죠.”

“네?”

생각지 못한 ‘대표’라는 단어에 지혁은 흠칫 놀랐다.

-이제 좀 가라. 가.

-아 질기다. 질겨. 진짜.

지혁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류 팀장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조만간 다시 찾아뵐게요!”

***

지혁은 커피를 마신 뒤, 사무실로 올라왔지만.

류 팀장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기 대표님이요. 문제가 많은 거 같던데.’

홍 대표가 문제가 많은 건 알고 있다. 아니, 선도 물산 직원 중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게 없었고,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표다 보니 베일에 싸여있는 게 많았다.

회사의 매출과 이익을 따져봤을 때. 현재 선도 물산 패션 영역은 3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지혁이 온 뒤로 오직 ‘스타덕’만 잘 나간다. 그러나 선도 물산 패션 영역에 스타덕만 있는 게 아니다.

도대체 대표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명확히 인지하는 직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3년간 자리 유지를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손정진이 지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응? 아니. 왜? 뭐 할 말 있어?”

손정진이 지혁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잘 없었다.

“아니요. 그냥 표정이 좀 어두우셔서. 커피 한잔 가져다드릴까요?”

개인 비서처럼 챙겨주는 손정진이 고마웠다.

“그래, 부탁 좀 할까?”

“하하. 네!”

잠시 후, 손정진이 커피를 가져오자, 지혁이 말했다.

“거기 앉아. 같이 한잔하자.”

“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까 재우 인터내셔날 인사팀장님 때문에 불쾌하지 않으셨어요? 적당히 하셔야지. 너무 들이대시더라고요.”

“됐어. 자기 업무 열심히 하는 건데 뭐.”

지혁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가 꺼냈던 ‘대표’ 얘기가 궁금했을 뿐.

“제 대학 동기가 미래 인터내셔날 기업문화가 좋다고 자랑하던데. 그런 인사팀장 보니까, 그 말에 신뢰가 안 가네요. 하하.”

“음?”

지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거기 아는 사람 있어?”

“몇 명 있죠~ 제가 섬유공학과 나왔잖아요. 대학 동기들 대부분이 선도물산 아니면 재우 인터내셔날로 취업하니까요.”

“아······ 그래?”

지혁은 생각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번뜩거렸고.

손정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진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절대 비밀이야.”

“네?!”

“목소리 죽이고.”

“아, 네. 알겠습니다.”

궁금증이 생기면 풀어야 했다. 지혁은 주변을 살핀 후, 손정진에게 말했다.

“재우 인터내셔날 인사팀장 말이야.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봐. 믿을만한 사람인지, 회사 내 평판이 어떤지 등등.”

“왜 그러십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아······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재우 인터내셔날 류 팀장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어찌 보면 기회일 수도.’

***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주간 임원회의.

여느 때처럼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 3/4분기 실적발표가 나온 날이라, 분위기는 최악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이게!”

홍 대표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유 본부장!”

“네.”

“숙녀 브랜드들 실적 어떻게 할 건가? 상품본부장이 됐으면, 적어도 초반엔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

“어떻게 된 게 왜 항상 적자야?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유 본부장이 말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브랜드 리모델링을 해야 합니다. 매장 인테리어도 요즘 트렌드에 너무 맞지 않고······.”

“돈이 들잖아!”

“투자니까, 돈이 들지 않겠습니까.”

홍 대표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투자해서? 그래도 성과 못 내면?”

“······.”

“항상 적자만 내는 브랜드를 위해 투자를 하라고? 그걸 내가 뭘 믿고 받아들여야 하나?”

“가만 있는 것보다는 낫죠. 뭐라도 해야 합니다. 이대로 두면······.”

홍 대표는 이상적인 말을 했다.

“돈 들이지 말고, 현 상태로 잘 운영해서 매출이 잘 나오게 하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얘기. 이런 얘기는 애들도 할 수 있다.

“이 상태로 가면 여성 브랜드 반은 접어야 할 것 같으니, 염두에 둬.”

매출을 못 내면, 인건비와 운영비를 줄여서라도 적자를 최소화하겠다는 것.

홍 대표가 유일하게 잘하는 거였다.

한 전무는 그런 홍 대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게 자리를 유지하는 이유인가.’

직원들 앞에는 항상 자애로운 미소를 짓지만, 임원들과 있을 때는 지랄하고, 툭 하면 사람 줄이라고 한다.

절대로 자기 손에 피 안 묻히는 사람이다.

고성과 푸념으로 이어진 회의가 끝난 후.

한 전무는 진이 빠진 얼굴로 회의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언제까지 저 인간을 두고 봐야 하나······.’

오 사장이 지시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전무는 하루빨리 홍 대표를 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 관리를 어찌나 잘하는지, 몇 년을 지켜봐도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기운 빠진 모습으로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는데.

위이잉-

[메시지 : 오지혁 팀장.]

한 전무는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다.

“웬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전무님, 긴급 미팅 요청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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