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생각 못 했던 곳 (1)
“좋습니다. 그럼 이제 얘기 좀 해주시죠.”
지혁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류 팀장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 했다.
“뭘······.”
류 팀장은 눈을 끔뻑이며 물었고.
지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 대표님 문제 있다면서요. 어떤 비리인지 알려주셔야죠.”
“······.”
하지만, 류 팀장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왜요?”
“······.”
“오 팀장님은 그럴 의도로 보자고 하셨다지만, 전 생각 안 해본 일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왜 오 팀장님께 드려야 합니까?”
지난주에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오늘 지혁과 대화를 나누며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직은 절대 안 할 사람이야.’
수확이 보이지 않는 일에, 괜히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얘기 입 밖에 내는 거.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거든요. 보통 사람도 아니고, 회사 대표씩이나 되는 분의 일이잖아요. 내부고발도 아니고, 경쟁사 인사팀장이······.”
류 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원인 규명한다고 저한테까지 불똥이 튀면 어떡합니까? 남의 집안일에 관여하는 게 영 부담스럽네요. 그런 수고를 감수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충분히 이해도 하고요.”
지혁은 류 팀장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저와 회사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류 팀장은 흠칫 놀랐다.
시종일관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던 지혁이 이렇게 말을 하니까.
‘마음 약해지게 왜 이래.’
류 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흠! 그럼 저도 좀 얻는 게 있어야겠는데요.”
“말씀해보세요. 가능한 거라면 들어드릴게요.”
“우리 회사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불가합니다.”
조금의 여지도 없이, 지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왜 안 됩니까? 일반 회사원이 좋은 조건에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건데, 무조건 안 된다는 듯이 얘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
지혁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말하자니 적절한 핑곗거리가 없고.’
“전 선도그룹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하셔도 됩니다. 다 지원해 드릴 수 있어요.”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당연히 류 팀장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충성도가 좀 과한 거 아닌가?’
“그리고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선도그룹은 지혁의 핏줄과 관계된 회사다.
“남의 집 좋다고, 내 집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네?”
“선도그룹은 저에게 그런 의미입니다.”
“와······.”
류 팀장은 생각했다.
‘히트상품을 연달아 만들어 내는 직원이 이 정도 충성도를······ 선도그룹은 복 받았네.’
“그럼······ 지금 뭔가 중요한 일이 있으신 듯한데. 그 일 끝난 후에 고려해보시는 것도 어려울까요?”
류 팀장은 집요했다. 이 정도면 포기할만한데도 계속 두들겼다.
“중요한 일이 끝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회사 생활 자체가 저에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서······.”
“네?”
류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회사 생활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니?’
지혁은 류 팀장을 향해, 콧잔등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냥 좀 도와주시죠.”
***
비굴하진 않지만, 간곡한 부탁.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직을 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건 짐작했다.
‘더해봐야 소용없다.’
류 팀장은 이제 마음을 접었다.
“휴-”
그는 한숨을 쉬고 얘기했다.
“자세하게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니까.”
“네, 하실 수 있을 만큼만 말씀해 주십시오.”
류 팀장은 우물쭈물하다가, 뭉뚱그려서 얘기했다.
“회사에 노미된 업체들 잘 살펴보세요. 경영자들이 많이 해 먹는 수법이거든요.”
지혁은 대번에 알아듣고 물었다.
“혹시 리베이트(지급한 상품이나 용역의 대가 일부를 다시 그 지급자에게 되돌려주는 행위) 말씀인가요?”
‘그런 건 이미 다 털어 봤고, 이상한 건 없었는데.’
“글쎄요. 더는 말씀 못 드려요.”
“······.”
지혁이 계속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눈치를 보다가 약간 힌트를 주었다.
“작은 건 눈에 잘 안 띄지만, 그게 모이면 엄청나게 커질 수 있어요.”
“······.”
“별것 아닌 게 별거가 되어 버리는 거죠.”
류 팀장은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여기 왜 온 건지 모르겠네. 하하.”
“······.”
“아무 소득 없이 이렇게 끝나버리네요.”
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시간도 늦었고~ 식사도 다 하신 거 같으니, 이제 일어나실까요?”
지혁은 류 팀장에게 말했다.
“아무 소득이 없으신 건 아니에요.”
“네?”
“제가 한 가지 약속 하나 드리죠.”
“······.”
“나중에.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지실 수 있어요.”
“네? 제가 왜요?”
지혁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세상이 급변하는데, 우리 회사만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오고 싶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특별한 말은 아닌데,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듯해서 류 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우리 회사 입사를 원하신다면 받아줄게요. 오늘 일에 대한 보답입니다.”
“하하. 네네~ 고맙습니다.”
류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건 엄청난 약속을 한 거였다.
***
다음날, 지혁은 출근하자마자 황 과장부터 찾았다.
“황 과장님.”
“네.”
“잠깐 제 자리로 와보시죠.”
황 과장은 테스트 때문인 줄 알고, 긴장해서 왔다.
지혁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네? 앉기까지 해요?”
황 과장이 얼굴이 새파래져서 묻자,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테스트 아니에요.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어제 류 팀장과 대화를 나눈 뒤.
‘리베이트’와 관련된 일이라면, 회사 가장 큰 구매부서인 ‘생산팀’과 연관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생산과 관련된 건데요.”
“네.”
“비리 발생하지 않도록 감사 철저히 받고 있죠?”
“아휴~ 말도 마세요. 숨 막힐 정도예요. 1년에 한 번 받던 걸, 지금은 두 번씩 받는걸요.”
“······.”
“저 입사 하기 전에 직원이 좀 해 먹었다가 걸린 적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생산팀이 뒷돈 받는 것만큼은 칼 같이 관리한다고 하더라고요. 업체와 차 한잔도 안 하는 분위기니까요. 생산팀장님이 그런 부분에 워낙 엄격하시기도 하고요.”
“네······.”
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러면 해먹을 구멍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되나요?”
“흠······ 글쎄요. 그것도 의지가 중요한 일이라. 하려면 방법이야 있겠죠.”
문득, 생각난 듯 황 과장은 미심쩍은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다.
“근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뭐 문제 생겼습니까?”
지혁이 해 먹고 싶어서, 묻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 좀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지금은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면 좋겠네요.”
황 과장은 지혁의 싸늘한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일단 가장 쉽게 떠오르는 건······ 저희가 협력사에 자재 노미를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노미?”
“네. 퀄리티 유지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긴 한데. 원단, 부자재 등에 대한 노미에요. 그러니까 협력사에서 제품을 만들 때, 이 자재를 써달라고 노미를 거는 거죠.”
“아······.”
“저희는 완제품 대금 지급만 하고, 완제품을 만들기 위한 원부자재 대금 지급은 협력사에서 하거든요. 그러니까 노미 자재 쓰는 건 저희 쪽 대금 흐름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돈 쓰지 않으면서 관여를 할 수 있는 거네요.”
“그렇죠. 회사가 지정한 자재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원부자재 업체는 재미를 볼 거고요.”
지혁은 곧바로 이해했다.
‘뒷거래가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눈에 잘 띄지도 않을 거고.’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 한 건 하신 거 같아요.”
“제가요?”
“네, 진짜 큰 건 하나 하셨어요. 큰 도움이 됐어요.”
황 과장은 눈만 끔뻑거리다가, 어쨌든, 지혁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네요. 하하.”
지혁이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황 과장님, 도와주는 김에 하나 더해줄 수 있어요?”
“에이~ 뭔 말씀을 그렇게 정 없게 하십니까. 그냥 지시하시면 되죠. 팀장님이신데.”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품 기획과는 연관이 없는 일이라서요. 이건 개인적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황 과장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럼 더 열심히 도와드려야죠! 말씀만 하십시오. 오 팀장님 분부신데.”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쓰는 주요 원부자재요.”
“네.”
“전체 다 리스트업해서 업체 평균가와 비교 좀 해주실래요?”
“헛!”
황 과장은 당황하여 헛기침했다.
“전체요?”
“네.”
“그게 엄청나게 많을 텐데······.”
“생산팀에 정리된 게 있지 않을까요?”
“아······ 일부 있기는 한데, 워낙 양이 많은 데다가 정확도도 좀 떨어지는 편이라.”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주 정확하지 않아도 돼요.”
“······.”
“그렇게 비교해보시고, 업체 평균가와 확연히 차이 나는 것들만 추려주시면 좋겠어요.”
황 과장은 약간 후회가 들었다.
‘도대체가 우리 팀장님은 적당히가 없다니까. 우리 회사에서 쓰는 원부자재가 얼마나 많은데······.’
“황 과장님, 해주실 거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혁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네······ 해야죠. 정리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
일주일 뒤.
황 과장은 쩔은 얼굴로 지혁에게 다가왔다.
“팀장님, 시키신 일 다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힘드셨죠?”
“힘들긴요. 겨우 12,320개밖에 안 됐는걸요.”
“······.”
여느 때와 달리, 이번만큼은 지혁이 황 과장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흠! 뭐 특별한 게 있던가요?”
“그게······.”
‘후우-’
황 과장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결론은 헛방이라 기운이 다 빠졌다.
“정말요?”
“네, 단가차이 나 봐야, 5% 이하였고. 대부분은 시장 평균가보다 낮게 쓰고 있었어요.”
“아······ 우리 생산팀이 경쟁력이 좋네.”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혹시 조사 안 한 자재 없어요?”
“없습니다.”
“정말로, 조그만 것 하나도?”
“진짜 없어요! 회사 공통자재 빼고는 확실히 다 했어요.”
번뜩.
그때, 지혁에게 뭔가 느낌이 왔다.
“공통자재가 뭐죠?”
“박스, 폴리백이요. 그건 회사 로고가 들어간 공통자재라, 개발된 업체에서······.”
“잠깐. 잠깐.”
지혁은 황 과장의 말을 멈추었다.
“그거 지금 가격 비교 좀 해봐요. 오래 안 걸리죠?”
“그야, 뭐. 두 개인데. 금방 하죠.
평소에 신경도 안 쓰던 자재라서, 황 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다른 부자재 업체에 전화했고.
“네······ 네?! 정말 그 가격이라고요?”
황 과장은 동공이 커져서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지혁에게 말했다.
“두, 두 배 차인데요?”
지혁은 피식 웃었고.
황 과장은 어딘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나 일주일간 뭐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