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해결사 (2)
개발팀장은 운전 중이며, 조수석에는 지혁이 앉아 있었다.
꽤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가던 중, 지혁이 입을 열었다.
“정원피케이라는 업체 아세요?”
개발팀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지혁은 개발팀장이 홍 대표의 오른발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물론 그건 오해로 판명되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알려져 있다는 건, 뭔가 유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 홍 대표의 요청으로 정원피케이 사장과 만난 적은 없으시고요?”
개발팀장은 살짝 미소짓고는 말했다.
“네, 그런 적 없습니다. 홍 대표가 저에게 그런 일을 시킬 리가 없죠. 아직도 절 의심하십니까?”
개발팀장은 거침이 없는 사람이다. 말 돌리지 않고, 지혁에게 물었다.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이용해 볼까 해서 물어본 거죠.”
개발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요. 홍 대표가 이 일을 저한테 시켰었다면, 일이 쉽게 풀렸을 텐데. 아쉽네요.”
“······.”
개발팀장은 지혁에게 추가 설명을 해주었다.
“정원피케이는 회사 지정업체라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예전에 생산팀에 있기도 했고요.”
“생산팀에 계셨었어요?”
생각지 못한 사실에 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지금 생산팀장님 오시기 전에 생산팀에 있었습니다. 개발팀 사람들 대부분이 생산 아니면 디자이너 출신들입니다.”
“아······.”
“그쪽 분야 출신이 아니면, 개발 업무는 하기가 힘들죠. 지식이 부족하니까.”
개발팀장은 지혁의 눈치를 한번 본 후 말했다.
“심 부장님 같은 분이 특이 케이스입니다. 생산, 디자인 일을 전혀 안 해보신 분이 개발팀에 오는 경우는 없거든요.”
“······.”
“적응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지혁은 심 부장을 힘들게 할 생각에 개발팀으로 보낸 건 아니었다.
지방 근무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개발팀으로 보냈던 건데.
결과적으로는 심 부장을 꽤 힘들게 한 것이다.
얼마 전 개발팀에서 본 심 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입사원 같이 어리바리했던······.
‘뭐······ 그 사람에겐 필요한 경험일 수도 있지.’
지혁은 개발팀장에게 물었다.
“그럼, 업체 상대하시는 데는 큰 무리는 없겠네요?”
업체와 대화할 때는 협상 능력만으로는 안 된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
개발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걱정 마십시오.”
***
‘정원피케이’
슬레이트 회색 건물로 된 정면에 붙여진 간판 이름이 보였다.
간판은 너덜거리고, 자음 일부는 떨어져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관리가 잘 안 되는 곳이네.’
지혁은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도 유심히 관찰했다.
“계십니까!”
개발팀장이 앞장서서 들어갔다.
요란한 기계 소리 가운데, 근무복을 입은 젊은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혁은 한 발짝 뒤로 빠져서, 개발팀장이 하는 걸 지켜봤다.
“저희는 선도물산에서 왔는데요. 사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개발팀장은 생산되어 쌓여 있는 박스를 세심히 살피며 말했다.
‘뭘 저렇게 유심히 보는 거지?’
지혁은 이리저리 돌려가며 박스를 살피는 개발팀장의 모습이 의아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등산복 차림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경계의 눈빛으로 개발팀장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저 찾으셨다고요?”
“네, 처음 뵙습니다. 선도물산 개발팀장 고승윤이라고 합니다.”
개발팀장은 명함을 건네었고.
사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의 명함을 받았다.
“아, 네. 근데, 무슨 일로······.”
개발팀장은 준비했던 말을 했다.
“얼마 전에 박스, 폴리백 비딩을 했던데, 단가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확인하고자 왔습니다.”
“네?”
‘감사’를 하러 왔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사장은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비딩 떨어졌으면 그만이지, 뭘 확인을 하나요?”
“우리 회사와 수년째 거래하셨잖아요.”
“······.”
“시장 가격과 확연히 차이 나는 업체를 회사에서 계속 써왔다는 건데. 확인할 필요가 있겠죠?”
사장은 겁먹었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잠깐만요. 근데, 개발팀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개발팀이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우리 회사 개발팀은 여러 일을 합니다. 포장 업체 개발과 관련된 일이라 이 또한 넓은 의미로는 개발팀과 연관이 있지요.”
물 흐르듯 말하는데, 그냥 물이 아니라 강력한 물줄기 같았다.
개발팀장은 강한 물줄기처럼 밀어붙였다.
“가격 확인부터 해볼게요.”
지혁은 뒤에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밀어붙이는 거 하나는 최고네.’
“지금까지 7호 박스 기준으로 1,900원에 납품해 오셨는데.”
“네······.”
개발팀장은 사장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가격이 맞습니까?”
사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당연히 그 정도 가격하죠.”
“시장 평균가가 1,100원 정도인데요? 차이가 너무 나지 않나요?”
사장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회사 박스 퀄리티는 다릅니다. 3중 골판지라고 해서 S모양의 골심지가 3중으로 들어갑니다. 선도물산에 요구하는 박스 강도 때문에 이 퀄리티로 납품하고 있어요. 3중 골판지란, 라이너 사이에 골심지가 들어가는 개수를 말하는데······.”
사장은 전문적인 내용을 청산유수로 쏟아내었다.
그의 말이 너무 그럴듯하여, 박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홀딱 넘어갈 만했다.
지혁 또한 사장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정도였으니까.
‘비싼 걸 써서 비싸다는 말이잖아?’
하지만······.
“오케이! ’3중 골판지’면 그 정도 가격인 거 인정할게요.”
개발팀장의 말에 사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근데······.”
개발팀장의 얼굴이 흉악하게 변했다.
“누굴 호구로 아세요?”
“네?”
“저기 쌓여 있는 거 ‘2중 양면 골판지’구만. 들어오면서 봤거든요? 내가 생산만 5년 한 사람인데. 이게 진짜 3중 골판지 맞다고요?”
사장은 당황하여 대답은 못 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사장님······ 사기 치셨네?”
***
‘사기’라는 말에 사장은 완전히 겁먹었고.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어요. 2중 양면 골판지 맞습니다. 하하. 아이고 정신머리하고는.”
“······.”
개발팀장은 대답 없이 사장님 얼굴을 쏘아보았고.
사장은 그의 눈을 피했다.
“좋습니다. 그걸 착각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뭐 그렇다 치고요.”
“······.”
“그럼, 이중 양면 골판지가 1,900원이 맞다는 거예요?”
사장은 완전히 벌서는 얼굴이었다.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손톱만 뜯고 있었다.
지혁은 개발팀장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정원피케이 사장이 보통 아니라고 들었는데, 팩트로 밀어붙이니 어쩌지 못하는군.’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단순하게 저희는 그 가격으로 책정했고, 선도물산에서 구매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사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고.
개발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죠.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
“간단하게만 말씀하시면 돼요. 그 가격이 정말 맞는지 아닌지.”
개발팀장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 가격이 맞다면, 정원피케이 문제고요. 그 가격이 아니라면, 선도물산 문제입니다.”
책임을 누구한테 전가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사장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개발팀장은 그를 아주 잘 몰아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지혁은 지켜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사장은 냅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앞에서 얘기하는 개발팀장도 문젠데, 그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남자가 더 신경 쓰였다.
“대답 안 하실 거예요?”
개발팀장의 압박에 결국 사장은 말했다.
“네! 제가 좀 비싸게 받았습니다. 저희도 그거보다 싸게 할 수 있어요. 근데, 뭐. 저희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리한 쪽으로 네고하고 싶지 않겠어요?”
예상대로 사장은 자기 살길을 선택했다.
선도물산의 가격 네고 실수 혹은 관리의 문제가 원인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래요. 사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어요. 업체 입장에서는 당연히 높은 가격에 네고하고 싶겠죠. 그게 다 매출이니까.”
“당연하죠.”
“네, 당연한 얘기에요.”
개발팀장의 눈이 빛났다.
“다만, 그게 진짜 정원피케이의 매출로 잡힌다면요.”
.
.
.
.
“네?!”
사장은 눈이 커져서 반문했고.
개발팀장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당연히 의심할만하지 않습니까?”
“······.”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었는데, 뒤로 돈이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볼 만할 것 같은데요.”
사장은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생사람 잡지 마세요!”
헉. 헉.
사장은 완전히 당황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이렇게 몰아가는 거야? 결론 내어놓고 짜 맞추는 거지 뭐야 이게!”
그는 발광하기 시작했고.
개발팀장도 사장의 격렬한 저항에 살짝 당황했다.
“자자, 사장님. 저희는 사장님을 문제 삼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아! 됐다고요! 더는 얘기 안 해요!”
“······.”
“변호사를 데려오든! 경찰에 신고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더는 얘기할 의향 없으니까!”
사장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사장님?”
잠자코 있던 지혁이 그를 불렀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저희랑 지금 마무리 지으시는 게 좋아요.”
지혁의 목소리에 옭아매인 듯, 사장은 꼼짝하지 못했다.
“간단합니다. 세금 조사하면 되거든요.”
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 사유면 국세청에 충분히 신고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사장이 계속 돌아서 있자, 지혁의 그 앞으로 걸어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그걸 원하세요?”
“······.”
사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혁은 가만히 그의 모습을 보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야죠.”
“······.”
“지금 상황에서는 여러 생각 말고, 무조건 사는 길을 택해야 하는 겁니다. 잘 판단하세요.”
그리고 지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사장이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잠시 후······.
“이제 생각은 충분히 하셨을 거 같고. 딱 한 번만 물을게요.”
“······.”
“뒷돈 누구한테 흘러갔습니까?”
입을 열 듯하다가 다시 다물고.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쉬다가.
계속 망설이던 사장은······.
결국 입을 열었고.
개발팀장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얘기를 다 들은 후.
“개발팀장님.”
“네.”
“사장님 안내받아서 자료 확보하세요.”
“알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장을 향해 말했다.
“용기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혁은 받은 건 반드시 되돌려 주는 사람이었다.
“사장님께서 오늘 조력해 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