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간단한 일
지혁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들어가서,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 날리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고민이 되었다.
선도물산의 대표는 선도물산의 얼굴이다.
그런 사람이 수년간 박스, 폴리백으로 뒷돈을 해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 이미지에도 매우 안 좋은 영향이 갈 수 있다.
대표가 한 일이다. 파급력이 송 상무 때와는 다르다.
간단히 다 까발리고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황 과장이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 팀장님~”
황 과장은 오 팀장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하루 새에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시지.’
지혁은 황 과장에게 물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지금 시각은 저녁 7시.
정규 퇴근 시간을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황 과장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앞자리에 앉았다.
“팀장님이 신경 쓰여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지혁은 대꾸하지 않았고, 황 과장은 화제를 바꿨다.
“이것 좀 드세요. 배고프실 것 같아서 사 왔는데.”
황 과장은 검은 봉지를 내밀었고.
그 안에는 은박지로 싸인 김밥 두 줄이 있었다.
“어서 드세요.”
황 과장은 은박지를 열어준 후, 손수 나무젓가락을 펼쳐서 지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먹어야 힘이 나죠.”
지혁은 황 과장의 행동에 감동 받았다.
‘우리 마누라도 안 해주는 걸······.’
세심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고민에 집중하느라, 밥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먹을 것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생겼다.
지혁은 아무 말 없이 우걱우걱 먹었고.
황 과장은 지혁이 앞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지혁은 황 과장 눈치를 본 후 말했다.
“가보셔도 되는데.”
“에이~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 다 드실 때까지만 있다가 갈게요.”
황 과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지혁은 그의 속 깊은 배려가 참 고마웠다.
김밥을 다 먹었을 때쯤, 지혁이 말했다.
“황 과장님.”
“네, 팀장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세요?”
오 팀장의 물음에 황 과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죠. 팀장님은 목표가 있으시다고.”
지혁은 황 과장을 처음 만난 날, 오 부회장이 회장이 못 되도록 하겠다며 조력자가 되어달라고 말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대책 없이 들이댔었어.’
‘그 세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 때 지혁은 거의 날 것의 상태였다.
하지만 황 과장은 지혁의 제안을 받아 주었고,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지혁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그래, 황 과장에게 숨길 필요는 없지.’
“황 과장님, 제가······.”
“네.”
“홍 대표를 날릴 생각이거든요?”
“네?!”
황 과장은 눈을 부릅떴다.
지혁은 검지를 입안에 갖다 댄 다음 작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그분을 대가리라고 호칭할게요. 회사에서는 항상 조심해야 해서.”
“네? 아, 네.”
지혁은 일련의 과정을 황 과장에게 설명해주었고.
그는 연신 놀라면서 지혁의 말을 들었다.
“아······ 그때, 박스와 폴리백 가격 알아보라고 하신 게.”
“맞아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황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근데, 뭘 고민하시는 거예요? 준비 다 끝난 거 아니에요? 반격당할 거리도 없는 거 같은데.”
“······.”
“그냥, 팀장님 스타일대로 확~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번엔 좀 달라요.”
황 과장은 질문을 필요로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고. 지혁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여긴······ 내 회사잖아요.”
.
.
.
.
‘아······.’
이 한 마디에 황 과장은 그가 뭘 고민하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상대방을 까려면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데. 파급력을 생각하면······.”
“그렇죠. 여러모로 좀 부담이 되겠네요. 회사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거고.”
지혁은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다.
그리고 이 ‘선도그룹’은 지혁의 회사. 그의 핏줄과 연결된 회사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제 결정만 하면 되는데. 득보다 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요. 팀장님.”
“네.”
“얘기 들으니까 저도 걱정이 되는데. 그 여파를 걱정할 사람이 저희 둘 뿐일까요?”
“네?”
황 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지혁은 그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회사의 모든 분이 걱정할 거 같은데. 특히, 오너 분들은 더 그렇겠죠.”
지혁의 동공이 커졌고.
탁!
그는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
“어이쿠! 깜짝이야.”
황 과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혁은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 있는데, 너무 집중하다 보니 멀리서 보질 못한 것이다.
“그냥 협박하면 되는 거잖아! 하하! 그렇죠?”
지혁은 황 과장의 어깨를 잡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고.
황 과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하하······ 협박이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씨발, 대가리 안 자르면 다 깔 거라고 협박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 네······.”
황 과장은 얼굴이 노래졌다.
‘뭔 말을 해도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하냐.’
“자르는 게 낫지. 제 회사 똥칠하는 거 두고 보겠어요?”
지혁은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홍 대표는 자기편에 의해 죽게 될 거야.’
지혁은 황 과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 황 과장님이 등에 칼 꽂을 줄 아네! 하하. 뒤통수 좀 칠 줄 아는 분이었어!”
“아······ 이거 칭찬이죠?”
내용은 이상한데, 분명 칭찬처럼 들렸다.
***
다음날.
지혁은 생각을 정리한 뒤 한 전무를 만나러 갔다.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는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혁의 첫 번째 단계는 ‘오 회장 일가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홍 대표를 날리는 일을 통해, 그 연결고리를 얻으려 했다.
똑똑.
덜컹.
지혁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한 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앉게.”
오기 전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전화로 먼저 보고했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 보게. 대가리 짓이 확실하다는 거지?”
“네.”
지혁은 정원피케이에서 자료 확보한 것과 사장의 증언 등 정리된 자료들을 알려주었다.
한 전무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건 뭐, 꼼짝 못 하겠네. 하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전무는 미소 띤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혁이 했던 고민에 이른 것이다.
‘근데, 이걸 어떻게 까? 아무리 조심해도 동네방네 소문 다 날 텐데?’
해 먹으려면 좀 크게 해 먹던가.
회사 대표나 되는 사람이 박스와 폴리백으로 푼돈 빼돌린 일이다.
‘쳐낼 수는 있는데······.’
남 부끄러운 일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 전무는 지혁 또한 비슷한 고민을 했을 거로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처리할 방법이 있는 거지?”
“방법은 하나죠. 대가리보다 높은 분이 쳐내는 일입니다. 진짜 사유는 그분만 알고, 표면적으로는 다른 사유로 내치는 거죠.”
“······.”
“대가리가 어디 가서 사실을 말하고 다닐 일은 없을 테니까요.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니까.”
한 전무는 지혁의 말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방법이 가장 적절하겠네. 그럼 나설 사람은 오너일가 밖에 없겠지. 내가 오 사장님께 보고를 드릴 테니까······.”
“아니요. 오 사장님 말고.”
지혁은 한 전무의 말을 자른 후, 단호하게 말했다.
“오 부회장이요.”
“뭐?!”
한 전무는 인상을 쓰고 지혁을 바라봤다.
“오 부회장에게 이 내용 전달하고, 그분이 손을 쓰게 하세요.”
“자네, 미쳤어?! 어디 감히 부회장님을······.”
오 부회장은 명목상 부회장이지, 현재 거의 회장이나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게 미끼를 던진다는 건······ 그냥 꺼려졌다. 뭘 하든 위험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아닙니까? 관계사 대표가 잘리는 일인데.”
“아무리 그래도, 오 부회장이 나서는 건 얘기가 다르지!”
지혁은 완강했다.
“안 돼요. 오 부회장이 나서야 해요.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고요.”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한 전무는 이런 위험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 사장님 선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을 굳이······.’
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기회라는 건 쉽게 오지 않아.’
“명령 아니고, 협박하는 겁니다.”
“협박?!”
한 전무는 황당해서 입을 벌린 채 지혁을 바라봤다.
“제 뜻대로 안 하면 언론사에 다 깔 거니까.”
지혁은 씹듯이 말했고.
한 전무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진짜 적은 다른 곳에 있었나? 황당하네.’
“오 사장님이 부회장님과 친하다면서요? 알아듣게 잘 설명하라 하세요.”
“······.”
“그리고 오 부회장이 이 일이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지혁은 한 전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지혁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또박또박 말해달라고 해주세요.”
한 전무의 황당한 얼굴을 뒤로한 채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한 전무에게 한마디 더 했다.
“저 한 전무님 좋아합니다. 나중에 모든 걸 설명해 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쾅!
지혁은 집무실을 나갔다.
***
선도생명 사장실.
한 전무는 오 사장에게 지혁과의 일을 보고했고.
듣는 내내 오 사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감정의 변화는 숨길 수 없었다.
“이거 참······.”
지혁에게 놀아난 기분이었다.
‘왜일까? 이러는 이유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홍 대표의 세력이라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오 사장의 지시를 수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지시 이행은 완벽했다. 몇 년간 지켜만 봤던 인물을 잡게 되었으니.
‘굳이 왜 부회장님을······.’
오 사장은 지혁의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한 전무님 보시기에는 오 팀장이 왜 이러는 거 같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말씀하세요.”
“헤어지기 전에 나중에 모든 걸 얘기할 날이 올 거라고 하더군요.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짐작되는 건 없습니다.”
“······.”
타닥. 타닥.
오 사장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지금으로선 뻔했다.
“어쩔 수 없네요. 오 팀장 장단에 놀아줄 수밖에.”
“······.”
“제가 부회장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피곤해지긴 하겠지만, 어쨌든 이치에 맞는 일 하는 거고, 저희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
“일단 움직이고, 두고 봅시다. 오 팀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오 사장은 일어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홍 대표보다 지혁이 더 신경 쓰였다.
***
이틀 뒤.
붕-
선도물산 정문에 기다란 검정 승용차 4대가 섰다.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이 일제히 내려서 양옆으로 길을 텄고.
철컥.
그중 한 차의 뒷좌석 문이 열리며,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한 중년 남성이 내렸다.
-오 부회장님이다!
-어머! 어머!
-선도물산에 웬일이셔?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듯, 직원들은 난리였다.
오 부회장은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선도물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피식.
오 부회장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오랜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