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97화 (97/301)

97. 조용하게 (1)

“안녕히 다녀오세요~”

“오냐~”

홍 대표는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

대학생인 자녀들은 방학 중이라 집에 있었고, 배웅을 받으며 나서니 기분이 좋았다.

“안녕하십니까.”

운전기사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좋은 아침. 회사로 가세.”

“네.”

밝은 햇살. 청명한 하늘.

홍 대표는 평소의 루틴대로 차에 타자마자, 조간신문을 펼쳤다.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거대한 세단.

홍 대표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다리를 쭉 펴고 조간신문을 훑어보던 중.

띠링!

핸드폰 알림음이 들렸다.

[대표님,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정원피케이 사장의 메시지였다.

나중에 통화하자며 메시지를 보내던 중.

위이잉-

전화가 왔고, 홍 대표는 재빨리 받았다.

“웬만하면 전화하지 말라니까.”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전화 끊겼나?”

[대표님······.]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홍 대표는 얘기를 들어보려 했다.

“얘기하게.”

[마지막 정산금 보냈습니다.]

홍 대표는 정원피케이와의 거래에서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돈을 보낸 뒤엔 꼭 얘기를 해줘야 한다.

“그래, 확인할게.”

홍 대표는 대답한 후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마지막? 마지막 정산금?’

정산금 앞에 붙인 수식어가 신경 쓰였다.

“자네, 무슨 일 있나?”

[······.]

또 말이 없었다.

한숨 소리만 몇 번 들리다가.

[미안하게 됐습니다.]

홍 대표는 왠지 불길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대표님 덕 많이 봤습니다. 근데, 그건 대표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홍 대표는 운전기사 눈치를 본 후,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좀 알아듣게 얘기를 해 봐.”

정원피케이 사장은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가정이 있고, 살아야 하니까.]

“뭘 어쩔 수 없다는 건데?”

후우-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살길 잘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회사 대표시니까 먹고 사는 일 정도야······.]

“야!”

결국 홍 대표의 목소리가 커졌고.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운전기사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다시는 만나지 말죠. 건강하세요.]

뚝.

그렇게 정원피케이 사장의 전화는 끊어졌다.

“이게······ 도대체······ 뭔······.”

홍 대표는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홍 대표는 몇 번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정원피케이 사장은 받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들어가자마자 그것부터 확인해봐야겠는데.’

어느덧 회사에 도착했고.

홍 대표는 찜찜한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다.

“어?”

회사 정문 앞에 도열해 있는 검은색 세단들.

정문 앞에는 대표와 VIP 외에는 주차를 못 하게 되어 있다.

‘누가 온 거지?’

항상 출근하던 회사인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아침부터 사장 놈 전화도 그렇고······ 뭔가 이상해.’

홍 대표는 걸음을 빨리했다.

‘일단 빨리 사무실로 가자.’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로비에서 마주친 직원들이 대표를 향해 인사했지만, 홍 대표는 인사받아줄 정신이 없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중.

위이잉-

핸드폰 진동음 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하니, 비서실장이었다.

홍 대표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나 지금 1층이야.”

[대표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부회장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부회장님이 왜?”

“일단 빨리 오십시오.”

“알았어.”

뚝.

홍 대표는 전화를 끊고.

체면도 잊은 채,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시지.’

게이트를 통과한 후,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깐! 잠깐!”

바로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다시 열렸다.

“아, 고마워요.”

홍 대표는 인사하며, 문을 열어준 사람을 확인했는데.

흠칫!

“뭐, 뭐야?”

지혁이었다.

그는 홍 대표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흠! 그, 그래.”

지혁은 홍 대표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죄지은 사람처럼.”

“뭐?”

홍 대표가 인상을 쓰고 반문했지만,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농담입니다.”

10층.

지혁이 내릴 때가 되었다.

위이잉-

문이 열리고, 지혁은 엘리베이터 내리며 인사했다.

“부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생애에 잊지 못할.”

홍 대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새끼. 인사를 해도 꼭······.’

“그래. 자네도 좋은 하루 보내게.”

“네.”

***

타닥. 타닥.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철컹!

대표실 문이 힘차게 열렸다.

헉. 헉.

홍 대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부회장님은?”

“집무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후우-

홍 대표는 옷매무새를 살폈고.

옆에서 비서실장이 봐주었다.

“괜찮지?”

“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얼마나?”

“15분 정도입니다.”

홍 대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바쁘신 분이 15분씩이나······ 난 죽었다.’

“흠!”

홍 대표는 헛기침하고, 본인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홍남일입니다!”

[들어오세요.]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 부회장이 홍 대표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문 먼저 닫으시고.”

오 부회장은 열려 있는 문을 가리켰다.

“아, 네!”

홍 대표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집무실 문을 닫았다.

오 부회장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가운데 소파 자리로 이동하며 말했다.

“앉으시죠.”

“네, 부회장님.”

접견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는 마주 보고 앉았다.

“······.”

오 부회장은 홍 대표를 뚫어지게 보기만 했고.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꽤 시간이 흘렀다.

홍 대표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아, 숨 막혀.’

오 부회장에게는 마주하기만 해도 숨도 못 쉬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직책에서 오는 파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 부회장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선도물산에서 오 회장을 제외하고, 오 부회장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홍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커피라도 한잔······.”

“제가 여기 왜 왔을까요?”

“네?”

홍 대표는 눈을 끔뻑였다.

“맞춰보세요. 제가 여기 왜 왔을까?”

“······.”

홍 대표의 머리가 빛의 속도로 돌아갔다. 오 부회장의 질문에 답을 못하면 안 된다.

틀린 답일지라도 무조건 대답을 해야 한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금기어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아웃이다.

“저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것 같습니다.”

“장난해요?”

틀릴 수가 없는 답변.

홍 대표는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왜 일을 이렇게 만드셨어요.”

“네?”

오 부회장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처먹으려면, 좀 티 안 나게 조용히 처먹던가.”

.

.

.

.

순간, 홍 대표는 얼어버렸다.

오 부회장은 단숨에 비수를 꽂았다.

홍 대표는 뭐라도 핑계를 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열어지지 않았다.

“뭐, 할 말 있어요?”

“저, 저······ 그게.”

오 부회장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도대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있어야지.”

“······.”

“내가 동생한테 사람 잘라야겠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홍 대표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몇 마디 말로 오 부회장이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오지혁······.’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지혁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먹은 거 뱉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조용히 가세요.”

“······!”

홍 대표는 눈을 부릅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입니다. 홍 대표 사람들 입단속 잘 시키시고. 아······ 진짜.”

오 부회장은 짜증 나는 얼굴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이 돈을 왜 처먹어?”

조용한 집무실에서, 그의 혼잣말은 너무 또렷하게 잘 들렸다.

“부회장님······.”

홍 대표는 의자에서 일어나, 오 부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바로 잡겠습니다.”

오 부회장은 홍 대표의 돌발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뭘 바로 잡아요? 받아먹은 기록은 없앨 수가 없는데?”

“어떻게든 바로 잡겠습니다.”

“불가능해요. 그건 내가 나서도 안 되는 일이야.”

오 부회장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다 끝난 마당에 질척거리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

“나 그런 거 질색이니까. 그리고 무릎은 왜 꿇어요?”

오 부회장은 완강했다.

약간의 여지도 없었다.

홍 대표는 사정하듯 말했다.

“아이들 이제 막 대학생 됐습니다. 돈 쓸 일이 많은데······ 지금 회사를 나가기엔 많이 이릅니다. 준비된 것도 없고.”

“몇 년 간 해 드셨잖아요. 왜 준비된 게 없어요?”

“······.”

“해 드신 거 재테크도 안 하고 다 쓴 건가요? 왜 자기 탓을 회사에 돌려요? 회사가 자선사업 하는 곳인가?”

홍 대표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대표님, 하지만······ 제가 회사와 부회장님을 위해 노력해 온 시간이.”

“그래서 더 짜증 난다고요!”

오 부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지금 뒤통수 두드려 맞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오 부회장은 시계를 봤다.

“아침부터 시간 허비를 얼마나 한 거야. 난 할 말 다 했고. 깔끔하게 끝냅시다.”

“그럼 퇴직금은······.”

오 부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건 받겠죠.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거니까.”

오 부회장이 이제 나가려는데, 홍 대표는 다시 한번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부회장님······.”

“하······ 진짜.”

오 부회장은 짜증 섞인 얼굴로 홍 대표를 바라봤다.

“이렇게 조용히 끝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시발남아.”

“네?!”

홍 대표는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욕, 욕을!’

“그 친구가 끝까지 질척거리면 이 말을 해주라던데.”

홍 대표는 정말 욕 들은 걸로 생각했고, 충격에 오 부회장의 소맷자락을 놓았다.

“뜻은 직접 알아보세요. 욕 아니니까. 갑니다.”

***

전날 저녁.

오 부회장은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다가, 생각지 못한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 : 오지혁 팀장]

‘오지혁?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잠시 생각하다가, 최근 선도물산의 이슈 메이커임을 기억했다.

신문과 방송에도 나왔었으니까.

[부회장님, 안녕하세요. 선도물산 상품기획 1팀의 오지혁 팀장입니다. 홍 대표 얘기 들으셨을 겁니다. 그 일의 내부고발자가 접니다.]

지혁은 한 전무에게 이 일의 주동자가 자신인 것을 오 부회장이 알게끔 해달라고 했으나, 그 말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리수임을 고려하더라도, 오 부회장에게 직접 메일로 어필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뵙기를 희망합니다. 이 일에 대해 상세히 보고 드리고, 오 부회장님께 큰 도움이 되는 직원이 되고 싶습니다.]

오 부회장은 메일 내용을 보며 생각했다.

‘당돌하네? 좀 다른데?’

자신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일반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홍 대표가 부회장님께 끝끝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 때 이 말씀을 하십시오. 시발남아.]

‘뭐야? 갑자기 왜 욕이야?’

[’시발남아(時發男娥) 때 되면 떠날 줄 아는 아름다운 남자가 되자’는 뜻입니다. 적시에 쓰면 의지를 꺾는 데 효과가 있더군요.]

오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이런 말이 있었어? 사자성어인가?’

[아시겠죠? 이 시발남아.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명 뜻이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마지막 문장은 욕 들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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