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조용하게 (2)
손정진은 평소처럼 가장 먼저 출근하였고, 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그는 메일 확인하는 것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음?”
발신자가 ‘홍남일 대표’였다.
“대표님이 웬 메일을?”
손정진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곧바로 메일을 클릭했다.
딸깍.
[직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홍남일입니다. 요즘 날씨가 참 좋죠? 이 좋은 날씨에도 사무실에서 근무하느라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작별의 인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저 홍남일,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뭐어?!”
손정진은 너무 황당해서 절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고, 손정진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뭐야, 갑자기 이렇게 퇴사하신다고?’
손정진은 계속 메일을 읽었다.
[당황스러우시죠?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인데, 직원들께 괜한 동요를 일으킬까 봐 미리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승리를 위해, 전투 중 자신의 신변 이상을 숨기셨었죠. 그런 이치라고 이해해 주시면 됩니다.]
비리로 인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자발적 퇴사를 결정했지만.
이 와중에도 민족의 영웅을 들면서 체면치레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님 비유는 좀 아닌 거 같은데.’
손정진도 고개를 갸웃하고는 계속 메일을 읽었다.
[회사 생활 30년을 했습니다. 선도물산은 저의 또 다른 집이며, 회사 동료들은 제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회사를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지만······ ‘때가 되어 떠날 줄 아는 아름다운 남자’가 되고자 합니다.]
‘마지막 문구 멋진데?’
[오랫동안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제가 누렸던 것들을 회사 밖에서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손정진은 이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 대표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직원 여러분, 회사 생활 할 수 있는 날이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다니는 동안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사소한 욕심 때문에 실수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어느덧 손정진은 홍 대표의 작별 편지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송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럼, 모두 건승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홍남일 대표 드림.]
“와······.”
메일을 다 읽고 난 뒤, 손정진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신입사원이 대표가 떠나며 보내는 작별 인사를 읽었다.
“그렇게 높으신 분도 결국엔 가는구나.”
적응하고 배우느라 정신없었던 회사 생활.
입사 후 지금까지 손정진은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했었다.
홍 대표의 편지를 읽고 나서, 처음으로 ‘회사’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감상에 막 빠지려 하는데.
덜컹!
정 차장이 들어왔고, 손정진은 자동으로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정 차장은 손정진에 이어서 항상 사무실에 두 번째로 온다. 거의 팀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팀원들은 그를 깍듯하게 대한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좀 당혹스러운 메일을 읽어서 그렇습니다.”
“당혹스러운?”
“네.”
“뭔데 그래?”
“대표님이 오늘 퇴사하신다고 메일로 작별 인사를 보내셨습니다.”
“아······.”
정 차장은 약간 놀란 듯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구나.”
“읽어보실래요?”
“됐어. 급한 것도 아닌데.”
“네?”
손정진은 아무렇지 않은 정 차장의 모습이 의아했다.
“퇴사하는 거 한두 번 보냐. 어쨌든 회사는 굴러갈 거고, 남은 사람은 일하는 거지.”
“······.”
“아! 그보다, 어제 내가 지시한 일 했어? 이번 달 매출 분석하라고 했잖아.”
“네? 아, 네네! 거의 다 했습니다. 정리만 하면 됩니다.”
“짜식이······ 어제까지 다 해놨어야지. 오전 중으로 빨리 마무리해!”
“알겠습니다!”
좀 전에 느꼈던 감상은 사라지고.
손정진은 다시 또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홍 대표는 이메일로 작별 인사를 직원들에게 남기고.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사라졌다.
언제 짐을 싸서 나간 건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직원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퇴사로 홍 대표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고, 한 전무가 임시로 그의 직책을 대신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선도물산은 자리를 잡아갔다.
홍 대표가 나간 지 3일째 되던 날.
지혁은 ‘사랑산성’으로 호출을 받았다.
밤 8시 20분.
오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시간이었다.
똑. 똑.
[오지혁입니다.]
“들어와.”
덜컹.
오 사장과 한 전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하여간 자네는 일찍 좀 다녀.”
한 전무의 말에 지혁은 시계를 보고 말했다.
“안 늦었는데요.”
8시 20분 정각이었다.
한 전무는 오 사장 눈치를 한번 살핀 후 말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인사부터 드려.”
지혁은 오 사장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꼭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지난번에는 선글라스로 얼굴을 다 가리셔서.”
“호호. 그래. 잘 지냈어?”
“네.”
지혁은 오 사장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얀 얼굴에 날카롭고 깊은 눈매.
동안은 아니지만, 사십 대 중반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외모.
무엇보다도······.
‘낯익다. 이상하게 낯익어.’
지혁이 타인을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이런 게 핏줄의 힘인가?’
두 사람은 사촌 관계. 할머니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한 핏줄이다.
분명히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얼굴 뚫어지겠네. 뭘 그렇게 봐?”
“······.”
그래도 지혁은 계속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특히, 이마를.
‘검은색.’
오혜진 사장에서 보이는 색은 ‘검은색’이었다.
강한 카리스마로 장악력이 좋은 사람들이 띠는 색깔이다.
빨간색과 함께 리더들에게 많이 보이는 색인데, 특히 위기 시에 검은색을 띤 리더들이 부각을 나타낸다.
‘여기선 처음 보네.’
지혁이 현실 세계에서 검은색을 띤 사람을 본 건 오 사장이 처음이었다.
‘자질이 나쁘지 않아. 괜찮네.’
지혁은 ‘그 세계’에서 검은색을 띤 리더들을 여럿 경험해 봤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단점은 있는데, 그 부분만 조심하면 괜찮은 리더였다.
“아니, 뭐 관상 보는 거야?”
하도 뚫어지게 보니, 오 사장은 지혁을 의심스럽게 보며 말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지혁은 시선을 거두었고,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음식을 테이블에 차린 뒤, 룸 밖으로 나가자마자.
오 사장은 쏘듯이 말했다.
“오 팀장.”
“네.”
“당신 정체가 뭐야?”
***
지혁은 오 사장이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홍 대표를 꺾어내는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그녀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으니까.
오 사장은 오 부회장과 직접적으로 엮이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지혁 때문에, 오 사장이 직접 오 부회장을 설득하여 홍 대표를 나가게 했다.
이 비리를 알아낸 것에 대한 오 부회장의 의심도 사면서 말이다.
“왜 일 처리를 이렇게 위험하게 한 거지?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심지어 협박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오 사장은 지혁을 무섭게 쳐다봤지만.
지혁은 개의치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오 사장님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이었죠. 하지만······.”
“······.”
“오 사장님은 저를 회장님 비서실로 보낼 수 없잖아요.”
.
.
.
.
오 사장은 눈을 부릅떴고.
“컥. 컥.”
물을 마시던 한 전무는 사레가 걸렸다.
오 사장은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뭐라고?”
“오 회장님 비서실이요.”
한 전무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자네가 거길 왜 가?!”
“먼저 묻는 말에 답해 보세요. 오 사장님이 저 비서실 보내줄 수 있으세요?”
“······.”
오 사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 회장의 비서실은 오 부회장의 측근들로 채워져 있다. 약간의 틈도 없었다.
자신의 후계 자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오 회장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안테나는 끊으려 했고.
그 일의 핵심은 오 회장의 비서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 사장이라고 해도, 그곳은 절대 손댈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오 사장은 이 말로 긍정을 대신했다.
“출세욕에 눈이 먼 사람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세계’에서 배운 방식으로 뒷조사를 한 거였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출세욕?”
“네.”
오 사장은 설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봤고. 지혁은 말을 이어갔다.
“전 삼십 대 젊은 경영자가 되고 싶은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 전무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단기간에 특진을 두 번 한 사람이 할 소리인가?”
“거기까지잖아요. 아무리 제가 성과를 더 낸다 한들. 부장 특진도 시켜주겠어요?”
“······.”
지혁의 비서실로 가려는 진짜 목적은 하나였다.
‘오 회장의 환심을 사는 것.’
출신은 오너일가지만, 지혁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출신을 인정받고, 우뚝 서는 길은 오 회장의 인정을 받는 게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를 통해 오 부회장과 맞설 힘을 기를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시간이 많지 않아.’
오 회장은 연세가 많다. 지혁이 서둘러서 일을 진행하려는 이유였다.
이 사실을 얘기할 수는 없기에, 지혁은 이들이 믿을 수 있는 말만 했다.
“어머······ 오 팀장이 머리가 좀 평범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오 사장은 ‘또라이’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이네. 부회장님이 그 자리를 쉽게 줄 것 같아? 측근 중의 측근들만 배치하는 곳인데?”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서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 사장의 눈이 커졌다.
***
“부회장님이 오 팀장을 만난다고?”
“네.”
오 사장은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많이 놀랐다.
‘오빠가 쉽게 외부인을 만나는 사람이 아닌데.’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지혁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이러다 진짜 비서실 가는 거 아니야?’
오 사장은 곰곰이 생각한 후, 지혁에게 물었다.
“지금······ 내 손을 놓겠다는 건가?”
“······.”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이해가 안 되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그랬으면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왔겠어요?”
“······.”
“오 사장님께 좋은 카드가 생긴 겁니다. 적의 핵심 시설에 침투한 첩보원이 생긴 거라고요.”
이 말에 오 사장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고.
한 전무도 짧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휴우- 깜짝 놀랐네.’
오 사장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어. 믿어야 해.’
“자네, 정말 괜찮겠나? 부회장님 보통 사람 아니야.”
“저에게 빚진 게 있으니까, 잘 말하면 들어줄 거로 생각합니다.”
홍 대표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원사격이 있으면 좋겠죠.”
지혁은 오 사장을 향해 싱긋 웃었고.
‘이걸 나보고 도와달라고?’
오 사장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