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99화 (99/301)

99. 마주하다 (1)

지혁의 얘기를 들은 뒤.

룸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오 사장이나 한 전무는 식사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정적을 먼저 깬 건 지혁이었다.

“안 도와주실 거예요?”

“······.”

“지원사격 좀 해달라니까, 왜 말이 없으세요.”

어느새부터인가 지혁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가만있어 봐. 생각하고 있잖아.”

오 사장은 차갑게 대꾸한 후, 조금 뒤에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부회장님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듣는 사람이라서.”

“······.”

“다만, 내가 부회장님을 좀 아니까. 조심해야 할 부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지혁이 말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얘기해주세요.”

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부회장님과 대화할 때는 절대로 말을 돌리면 안 돼. 핵심만 말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부회장님은 직관적인 걸 좋아해서 말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고민하는 걸 아주 싫어하시거든.”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장난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거군.’

오 사장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감정 상하게 하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간 다시는 부회장님 뵐 일 없을 테니까.”

지혁은 피식 웃었다.

‘까다롭네. 말은 직설적으로 하되, 신경 거슬리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네.’

오 사장이 알려주는 주의 사항을 굳이 다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회장님께 요청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아.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거든.”

“······.”

“특히, 한 번 거절당한 건에 대해서는 절대 재요청하지 마. 바로 아웃이니까.”

지혁은 이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흠······ 이건 쉽지 않겠는데.’

오 사장 말대로면 설득이라는 걸 하지 말라는 건데, 이건 좀 지키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말이야.”

“또 있어요?”

오 사장은 피식 웃었다.

“부회장님 까다로운 사람이야. 아직 한참 남았어.”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중요한 것부터 얘기해주세요. 그것 먼저 집중해서 기억하게.”

오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절대로 부회장님 눈을 응시하지 마.”

“네?”

“부회장님과 대화할 때는 턱이나 넥타이 매듭에 시선을 두고 얘기해. 타인이 본인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거 질색하셔.”

지혁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자존감? 아니, 선민의식이라고 할까.”

“······.”

“같은 형제들 간에서도 본인은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열등한 인간들이 감히 자기 눈을 똑바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지혁은 생각했다.

‘완전 또라이네. 보라색 인간답다.’

“오케이. 계속하시죠.”

이후로 오 사장의 조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

그날 밤.

지혁은 집에 10시쯤 들어왔다.

수아가 파자마 차림으로 지혁을 맞았다.

“어서 와. 밥은?”

“먹었지~”

지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아를 꽉 안았다.

킁킁.

수아는 안긴 채로 지혁의 냄새를 맡고 물었다.

“술 안 마셨나 보네?”

“그냥 저녁 약속이었어.”

“그래. 술 냄새는 안 나고, 여자 향수 냄새가 나네······.”

수아는 지혁에게서 몸을 떼고, 째려보았고.

지혁은 웃으며 수아에게 말했다.

“에이~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알아! 그래도 내 남편이 너무 멋져서 여자들이 가만 안 둘까 봐 그렇지.”

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지만, 수아는 계속 말했다.

“아무리 철벽남이어도, 이쁜 여자가 매달리면 남자들은 호로록 넘어가는 거 같더라고.”

“하하 참나.”

지혁은 수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철벽남이 아니라, 수아밖에 모르는 또라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머······,”

오글거리는 말이었으나, 수아는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됐고. 어서 앉아. 어디서 뭐 하고 왔는지 다 얘기해 봐.”

수아는 소파를 가리켰고.

지혁은 코를 찡긋하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가져와 앉았다.

딸깍!

캔 뚜껑을 따며 말했다.

“회사 얘긴데.”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수아는 신나는 얼굴로 말했고.

지혁은 피식 웃고는 오 사장과 만남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비서실을 갈 거라고?”

‘그 세계’, ‘오 부회장의 색깔’ 등 수아에게는 숨김없이 얘기를 했었다.

어차피 모든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비서실을 가려는 진짜 목적에 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수아는 심각하게 얘기를 듣다가.

“그러니까. 적의 핵심 소굴로 들어간다는 거잖아.”

“맞아.”

“나 왜 이렇게 걱정되지?”

“······.”

“그냥 회사 내에서 부서 이동하겠다는 건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될까.”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비장하게 얘기했나?”

“아니야. 담담했어.”

“······.”

“그래서 더 걱정돼.”

수아는 지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기 지금 사업부에서 잘 지내고 있잖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만들었고.”

수아의 말이 맞다. 지혁은 현재 위치에서 회사생활 하는데, 전혀 거리낄 게 없다.

대부분의 정적은 제거되었고, 심지어 홍 대표까지도 나갔다.

현재 선도물산은 지혁의 세상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어.”

“······.”

“오 부회장. 정말 위험한 사람이야.”

“자긴······ 정말 확신하는구나.”

수아는 한숨을 쉬었다.

지혁이 꽤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동료들을 다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보라색’의 트라우마는 벗어나지 못했다.

지혁은 수아를 꼭 안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남았던 사람인데.”

수아의 표정이 그래도 풀리지 않자, 지혁은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해보고 정 힘들면 다 놓을게. 약속할게.”

수아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켜.”

***

다음날.

“외근 갔다 올게.”

“네!”

오후 2시.

오 부회장을 만나러 사무실을 나섰다.

오 부회장실은 화성에 있다.

강남에서 화성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늦은 오후에 화성 선도캠퍼스에 도착했다.

‘와······ 크네.’

지혁은 선도캠퍼스에 처음 와봤다.

강남에 3개 빌딩이 모여 있는 선도 빌리지도 크지만.

화성의 선도캠퍼스는 하나의 지역 수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지혁은 선도캠퍼스 정문의 경비원에게 길을 물었다.

“부회장실이 어딥니까?”

“부회장실이요?”

경비원은 지혁의 행색을 살폈고.

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선도그룹 강남 본사에서 왔습니다. 약속 잡고 온 거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오지혁입니다.”

경비원은 인터폰으로 전화를 해본 후, 다시 나와서 말했다.

“A-13 동으로 가셔서, 리셉션에서 방문 목적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네. A-13 동이 어느 쪽입니까?”

“설명보다는 지도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경비원은 정문 옆에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고, 지혁은 눈으로 길을 외웠다.

“걸어서 한 10분이면 갑니까?”

“걸어서요? 걸어가면 30분도 넘게 걸릴 텐데.”

지혁은 놀랐다.

‘엄청나게 크네?’

“잠시 기다리세요. 셔틀버스 곧 오니까.”

“네.”

약 10분 뒤. 지혁은 셔틀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잠시 후.

A-13 동에 도착했다.

지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리셉션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오지혁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부회장님 뵙기로 했습니다.”

“네, 어서 오세요. 안내하겠습니다.”

단아한 외모의 여직원을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또각. 또각.

높은 천장에 널찍한 복도.

건물은 큰데, 인적이 없다. 검은색 대리석으로 인테리어 된 건물 내부가 위압감을 주었다.

엘리베이터는 24층에 멈췄다.

드르륵.

문이 열렸고, 아무 장식도 화초도 없는 뻥 뚫린 복도가 지혁을 맞이했다.

‘참 인간미 없네.’

인테리어만 봐도 오 부회장이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었다.

또각. 또각.

너무 조용해서일까. 앞서 걸어가는 여직원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졌다.

“여깁니다.”

여직원은 커다란 진갈색의 문 앞에 섰다.

“그럼, 전 이만.”

“네, 고맙습니다.”

여직원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인 뒤, 왔던 길로 돌아갔다.

후우-

지혁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안 주머니에 있는 과도를 만지작거렸다.

긴장될 때 하는 습관이었다.

‘하던 대로.’

지혁은 마음을 다잡은 뒤, 문을 두드렸다.

“오지혁입니다.”

***

안으로 들어가, 이어진 방을 두 개를 더 지난 뒤.

부회장 집무실 앞에 섰다.

똑. 똑.

“부회장님, 선도물산 오지혁 팀장 오셨습니다.”

비서가 말이 끝난 후.

잠시 정적이 흘렀고.

[들어오세요.]

오 부회장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비서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네, 고맙습니다.”

뚜벅. 뚜벅.

지혁은 천천히 부회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히 넘긴, 40대 중반의 미끈한 남성이 지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혁이 집무실 가운데까지 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오 부회장은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오 부회장이 먼저 앉은 뒤, 지혁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채, 정적이 흘렀다.

지혁은 오 사장이 알려준 대로, 오 부회장의 눈 대신 턱에 시선을 두었다.

잠시 후.

그의 턱의 조금씩 움직였다.

“유명인사를 봬서 영광이네요.”

오 부회장의 턱 한쪽만 실룩이는 게 보였다.

약간 비꼬듯이 말하는 거였다.

지혁은 이미 그의 성향을 알기에, 그의 이마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대화와 분위기에 집중했다.

“부회장님을 뵙게 되어, 제가 영광입니다.”

“훗.”

오 부회장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우리 내부고발자님. 저는 왜 보자고 했을까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뵙기를 희망했습니다.”

“말해 보세요.”

지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 회장님 비서실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뭐?!”

오 부회장은 황당해서 곧바로 반문했다.

포상금이나 승진을 요구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을 줄 알았다.

일개 팀장이 부회장에게 면담 요청을 한 것 자체가 거슬렸지만. 어쨌든 홍 대표 문제를 끌어낸 장본인이기에 시간을 내준 거였는데.

“비서실은 왜요?”

이런 황당한 제안을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선도그룹에 입사하기 전부터 오 회장님을 존경해왔습니다. 가까이서 모시고 싶습니다.”

“······.”

지혁은 사람은 욕망을 드러내야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한마디 더 했다.

“또한 회장님 비서실이 요직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로 알고 있습니다. 전 선도그룹에서 큰 성공을 이루고 싶거든요.”

“하하, 어이가 없네. 소문대로 정상인이 아니네.”

오 부회장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만남이기에 최소한의 조사를 했고, 지혁의 행각에 대해 간략하게는 알고 있었다.

“근데, 어쩌죠? 싫은데.”

오 부회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런 건 명확하게 말해주는 게 좋잖아요.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지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판사판.’

찔러 보고 아니면 말 일이 아니었다.

다시 없을 기회.

오 사장이 주의하라고 했던 말을 무시하고, 지혁은 오 부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부회장님.”

“음?”

부회장은 지혁의 달라진 태도에 약간 당황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요구입니다.”

“······.”

“저한테 빚지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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