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00화 (100/301)

100. 마주하다 (2)

“빚을 졌다고?”

“네.”

“내가 오 팀장에게 무슨 빚을 져요?”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제 덕분에 체면을 지키셨잖아요. 홍 대표가 누구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 많습니다.”

오 부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많다고? 누가 아는데?”

“그건 말 못 하죠.”

“······.”

“저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정의로운 직원이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TV에도 나올 만한 일인데.”

지혁은 이판사판이라 생각했기에 거침없이 말했다.

“더군다나, 통 크게 제대로 해 먹은 것도 아니고. 박스랑 폴리백 푼돈 챙긴 일이며, 그것도 장기간 거래입니다.”

“······.”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오 부회장은 지혁의 말을 멈추었다.

“잠깐, 오 팀장이 알게 된 게 다행이라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서, 밖에 떠벌리지 않고 이렇게 딜을 요구하잖아요. 오 부회장님 입장으로서는 다행이고, 저에게 빚진 게 아니겠습니까?”

“······.”

“저도 TV에 떠벌리는 거 잘할 자신 있습니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오 부회장에게 자신의 똘끼에 대해 상기시켰다.

“협박처럼 들리는데?”

“간절함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히 부회장님께 이렇게 말할 정도로, 비서실에 가고 싶습니다.”

“······.”

간절하다고 말은 했지만, 태도는 너무 당당했다.

오 부회장은 생각했다.

‘듣던 대로 정상인은 아닌데······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말은 아니란 말이야.’

오 부회장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

그나마 거슬리는 건 법과 세금. 그리고 여론이었다.

지혁이 밝혀낸 ‘홍 대표 사건’은 주가에도 영향이 갈 만한 일이었고, 오 부회장의 이미지 또한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오 회장이 뒤에 물러나 있지만, 건재하다. 아직은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오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질문 하나 하지.”

부회장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네, 말씀하세요.”

지혁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지혁보다 10살 이상 많은 친척 형이니까.

“세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포식자와 피식자로.”

“······.”

“어떤 피식자는 오래 살아남기도 하지만, 어떤 건 금방 잡아 먹히지. 왜 그럴까?”

지혁은 속으로 웃었다.

‘뻔한 질문을 하는군.’

지혁은 대답했다.

“피식자가 포식자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 부회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자신이 피식자임을 잘 알고,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포식자 눈에 잘 띄니까, 빨리 잡아 먹히죠.”

오 부회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알고 있군.”

그는 지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방금 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그 사실을 잊지 마.”

“······.”

“알겠나?”

‘그 세계’에서 경험으로 배운 지혜였다. 지혁은 단 한 번도 그 이치를 잊고 산적이 없다.

그리고······ 지혁은 포식자였다.

“네, 잊지 않겠습니다.”

지혁은 당분간 신분을 숨긴 포식자가 되기로 했다.

포식자가 피식자처럼 보이면, 훨씬 잡아먹기 수월하니까.

***

벌떡.

오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주변을 걸으며 말했다.

“그래, 어쨌든 간절함은 알겠고. 자네 요청은 받아들이기로 하지.”

오 부회장은 결정이 빠른 사람이었다.

불끈.

지혁은 앉은 자리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9부 능선은 넘은 것이다.

“단, 조건이 있네.”

오 부회장은 지혁을 무섭게 노려봤다.

“다시는 내 앞에서 이딴 식으로 버릇없게 굴지 말게.”

“······.”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신경 거슬리는 말은 하지 마.”

지혁은 오 부회장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볼 일도 없을 텐데. 다음에 봤을 때는 내가 당신 등을 찍어내고 있을 거고.’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지혁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네 직급이 차장 맞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직책은 팀장이고.”

“네.”

“비서실로는 팀원으로 가야 해. 자네 직책에 맞춰서 보낼 수는 없어. 그건 알고 있나?”

지혁은 사전 조사를 해서 알고 있다. 비서실장은 임원급이며, 비서실 팀원들은 최소 과장 이상인데, 과장도 몇 없으며 대부분 차장 이상이다.

“몰랐지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알지만, 모른다고 했다.

“팀장 하던 사람이 팀원 역할을 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회장님 비서실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오 부회장은 지혁을 유심히 보았다.

‘아주 출세에 눈이 멀었네. 이 정도 능력에 야망이면, 큰 실수만 하지 않는 한 임원까지는 가겠는걸.’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오 부회장 눈에는 하찮게 보였다.

‘주제에 맞게 적당히 살지. 굳이 뭘 이렇게.’

“그럼, 얘기는 얼추 끝난 거 같은데.”

“······.”

“두고 보겠어. 비서실로부터 자네에 대해 안 좋은 얘기가 들리면 아웃이야.”

오 부회장은 지혁의 눈을 바라봤고.

지혁은 그의 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비서실에서 아웃이 아니라, 그냥 아웃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

“본인이 결정한 일엔 책임을 져야지.”

‘초등학생도 아는 말을 하고 있어. 이것도 협박이라고.’

하지만, 생각과 달리 지혁은 쫄리는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식자처럼 보이기 위해서.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가봐. 인사발령은 바로 조치할 테니까. 무엇보다도 입조심하고.”

얘기가 끝났다는 생각에 오 부회장은 돌아섰는데, 지혁이 그를 불렀다.

“부회장님.”

“왜?”

“요구사항이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오 부회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봤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휴-

오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빨리 말해 봐.”

“비서 역할을 아주 잘 할 만한 분이 한 명 더 있는데······.”

지혁은 조곤조곤 인사청탁을 했고.

오 부회장은 실소를 머금었다.

‘뻔뻔한 거 하나는 인정이다.’

***

다음날 오전.

지혁은 오랜만에 아지트에서 황 과장을 만났다.

딸깍.

여느 때처럼 지혁은 캔 커피를 마셨고.

휴우-

황 과장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뿜으며 말했다.

“팀장님 여기서 뵙는 거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요즘 왜 이렇게 바쁘셨어요? 사무실에도 잘 안 계시고.”

“언제는 안 바빴나요. 항상 그렇죠. 뭐.”

황 과장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근데, 최근에 더 그랬던 거 같아서요.”

홍 대표 사건과 오 부회장 미팅까지.

외근이 많았었다.

“아~ 날씨 좋다~”

하늘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황 과장을 보며, 지혁은 생각했다.

‘요즘 참 좋아 보이는데.’

최근 황 과장은 상품기획 1팀에 완전히 적응을 마쳤다.

빡세긴 해도 좋아하는 팀장과 함께 일하고.

상품기획 팀원들과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았다.

게다가 생산 출신이라, 상품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일까.

업무 적응도 금방 마쳐서, 이젠 서브가 아니라 직접 시즌 상품기획까지 하고 있다.

“팀장님~ 우리 팀은 야유회 안 가요? 아, 운동 야유회는 말고요.”

지혁은 오늘만큼은 해맑게 웃는 황 과장을 보는 게 씁쓸했다.

‘좀 미안하긴 하네······.’

“저······ 황 과장님.”

지혁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네, 팀장님.”

“저 좋아하시죠?”

“네?”

황 과장은 황당한 질문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처음엔 좀 이상해 보였지만, 좋아하죠. 아니, 정확하게는 존경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에이······ 형이 동생한테 존경은 좀.”

“회사는 직급이 형이죠. 전 한 번도 오 팀장님을 동생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

황 과장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선도물산에서 오 팀장님이 해오신 일들을 보면······ 존경하지 않는 게 이상하죠.”

지혁은 황 과장이 이런 말을 할수록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오리엔테이션에서 오 팀장님 처음 만났을 때는 이상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황 과장은 싱긋 웃었다.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우-

지혁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그럼······ 황 과장님은 어디서 일하냐 보다는 저와 일하는 게 더 좋겠네요?”

“······?”

황 과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질문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지혁은 중요한 답을 들은 듯, 정중하게 말했고.

황 과장은 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 아닙니다. 뭐 감사할 것까지야.”

“우리 어디서든 잘해보죠.”

“아, 네.”

지혁은 황 과장의 눈을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저는 황 과장님이 필요하니까요.”

두근.

갑작스런 심쿵 멘트에 황 과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고민했다.

‘흠······ ‘저도요’라고 답해야 하나. 그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망설이는 사이, 지혁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담배 다 태우셨죠? 가시죠.”

***

지혁과 황 과장이 로비로 들어온 순간.

1층에 있던 직원들은 난리가 났다.

- 팀장님! 어디 가시려고요!

- 안 돼요. 팀장님······.

- 선도물산의 자랑인데. 유일하게 존경하는 팀장님인데······

- 말도 안 돼.

지혁은 직원들의 반응을 보며 짐작했다.

‘발령 메일이 왔나 보군.’

아무것도 모르는 황 과장은 이런 주변 반응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뭐야, 왜 이래? 오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지혁은 황 과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 상품기획 1팀에서 근무해보고 싶었는데.

- 오 팀장님 가시면 의미 없잖아.

- 아쉽다. 너무 아쉬워.

다들 지혁 주변을 둘러싸고 난리였다.

지혁은 얼굴을 굳히고, 가로막은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겨우 게이트를 통과하고.

상품기획 1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지혁아······”

최근 지혁에게 존대하던 정 차장이 나라 잃은 듯한 얼굴로 지혁을 불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가긴, 어디를 가.”

손정진은 울 듯한 얼굴이었다.

“팀장님, 어딜 가세요. 안 돼요.”

선도물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팀장의 인사발령을 전 팀원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풍경.

선도물산에서 근 10년 간 없었던 일이었다.

“봤어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지만.

그의 얼굴에도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정 차장의 물음에 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설명 드릴게요.”

옆에 있던 황 과장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오 팀장님 어디 가요?”

문 대리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자기는 몰랐어?”

“몰랐죠.”

“자기 자신에 대해 몰랐냐고.”

“네?”

황 과장은 순간 얼어버렸고.

좀 전에 아지트에서 지혁이 밑밥 깔던 게 떠올랐다.

“자, 잠깐!”

그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메일 창을 열었다.

[인사발령]

1) 오지혁 차장

이동 전 : 상품기획 1팀 팀장.

이동 후 : 그룹비서실 팀원.

황 과장은 여기까지만 봐도 놀라웠는데, 그 아래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2) 황성준 과장

이동 전 : 상품기획 1팀 팀원.

이동 후 : 그룹비서실 팀원.

“이······ 이게 무슨!”

누가 벌인 짓인지 안 봐도 훤했다.

황 과장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자.

지혁은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같이 가시죠. 잘해 드릴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