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두 번째 비행
이 부장과 지혁은 호텔 예약부터 차량부킹, 동선, 하노이 법인 미팅 시간 조정 등 출장 전체 일정을 준비했다.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점.
이 부장은 업무를 챙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지혁이 그를 불렀다.
“이 부장님.”
“네, 말씀하세요.”
“근데 왜 의전팀의 반만 갑니까? 해외 출장은 중요한 일정 아닌가요?”
이 부장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회장님을 근거리에서 모시는 게 의전팀의 주요 업무이지만, 회장님의 주요 일정을 대신하는 업무도 있습니다.”
“······.”
“자잘한 일정까지 고려하면 국내 일정이 더 많기 때문에, 해외 출장 중일 때 의전팀 일부는 남아야 해요.”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두 명 갖고 그 일정 감당이 되나? 동행 인원 명단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동행하는 임원들이 꽤 많았다.
“대신 지원팀이 같이 갑니다. 지원팀이야말로 회장님이 한국에 안 계시면 할 일이 없으니까.”
“아······.”
이제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닥. 타닥.
말이 끝나자, 이 부장은 다시 또 정신없이 타이핑을 시작했다.
집중하느라 눈에서 불꽃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왜 안 시키는 걸까.’
지혁은 출장이라는 걸 가본 적이 없다.
뭘 알아야 나서서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니, 뭔가를 주도적으로 하기도 애매했다.
같이 가기로 했으면 업무를 분담해야 하는데, 이 부장은 지혁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거의 혼자 다 준비했다.
‘업무를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왜냐면 그가 너무 바빴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장 또한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저 인간한테 어떻게 일을 시키냐.’
일을 시키기는커녕, 지혁에게 말 거는 것도 어려웠다.
안 그래도 선도 물산에서 들려온 소문 때문에 지혁이 좀 껄끄러웠는데, 황 과장 사건 이후로는 눈 마주치기도 불편해졌다.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
맘 편하게 혼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장님.”
지혁이 그를 또 불렀다.
“네.”
이 부장은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대답은 꼬박꼬박 잘했다.
“뭐 시키실 거 없어요? 아무거나 편하게 시키셔도 되는데.”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있어도 얘기 안 할 것이다.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커피라도 한잔 타다 드릴게요.”
이 부장은 하던 걸 멈추고 황급히 지혁을 막았다.
“돼, 됐어요!”
***
일주일이 더 지나, 드디어 D-DAY.
지혁은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하와이 이후로 처음이네.’
생애 두 번째 비행기 탑승.
이번은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지만, 지혁은 왠지 신이 났다.
비행기 탑승 시간은 오후 6시지만, 지혁과 이 부장은 1시까지 공항에 도착했다.
‘이렇게까지 빨리 올 필요가 있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혁은 묵묵히 이 부장을 따랐으나, 미리 도착하여 시간 허비하는 걸 싫어하는 지혁의 성향상. 내심 못마땅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특별 게이트를 지나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탑승구로 향했다.
“어디 가세요?”
지혁은 활주로를 걸어가며 이 부장에게 물었다.
“비행기는 저쪽에 있는데?”
이 부장은 비행기들이 모여 있는 활주로의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귀찮은 얼굴이었지만, 대답은 공손했다.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회장님이 일반인과 같은 곳에서 비행기를 타겠어요?”
“······.”
잠시 후.
금색으로 도금된 거대한 비행기 앞에 섰다.
비행기야 물론 다 크겠지만, 이 비행기는 특별히 더 커 보였다.
“국적기가 아닌가 봐요.”
지혁은 당연히 코리언 혹은 아시안 에어를 생각했었다.
“회장님은 당연히 전용기 타시죠.”
“아······ 전용기.”
그제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멋진데?’
전용기는 생각도 못 했었다.
비행기를 두 번째 타보는 사람이기에, 그 정도까지 생각할 그릇은 되지 못했다.
이 부장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비행기 내부 세팅 및 출장 일정 재점검할 거예요. 약 2시간 뒤면 지원팀이 회장님 모시고 올 건데, 그때까지 완벽하게 끝내 놔야 해요.”
“역시, 의전팀이 선발대군요.”
지혁은 전용기 안으로 들어갔다.
“오~!”
내부를 보고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비행기 가장 뒤쪽의 마스터 룸이 인상적이었는데.
대형 더블베드와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크기의 탁자. 두 개의 소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에는 대형 TV 2대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오 회장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게 호텔이야 비행기야?”
이 부장은 이런 지혁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그러려니 했다.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
비행기 중간에 거실이 있었고, 그 안에 12개의 자리가 있었다.
좌석 간의 거리는 사람 두 사람 간격 정도로 널찍했고,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운 베이지색으로 되어 있었다.
“비행기는 큰데, 좌석 수는 적네요?”
총 16개의 좌석.
일반 항공기로 치면 140개가 넘는 좌석이 있어야 하지만, 달랑 16개였다.
“전용기니까요. 좌석이 많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 부장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서두릅시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우선 오 회장님 즐겨보시는 책과 신문부터 세팅하죠.”
“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이 부장은 불편함도 잊고 지혁에게 이런저런 업무지시를 했고.
두 사람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
오후 6시.
전용기 앞에서 오 회장 일행을 맞았다.
오 회장 뒤로 지원팀과 경호팀이 보였다.
항상 오 회장과 세트로 다니는 사람들이기에 지혁에게 비서실과 경호팀은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하하. 회장님, 건강이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눈썹 숱이 많아서 일(一)자에 가까운 장년 남성이 회장이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러게. 자네와 해외 출장은 정말 오랜만이군.”
“오 회장님 방문이라니! 현지 직원들이 많이 놀라겠는데요?”
지혁은 이 부장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이 부장은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저분을 몰라요? 선도그룹에서는 오너일가 다음으로 유명한 분인데?”
“이름 들으면 알 겁니다. 얼굴 매칭이 안 돼서.”
“미래기획실장 최재훈 부회장님이요.”
지혁은 놀라서, 최 부회장을 자세히 바라봤다.
선도그룹에 부회장은 두 명이 있다.
오종건 회장의 아들, 오진양 부회장.
그리고 아무런 뒷배경 없이 사원에서 시작하여 부회장까지 올라온 최재훈 부회장.
그는 평가원들에게 살아있는 신화 같은 존재다.
지혁 또한 최 부회장을 선도그룹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런 입지전적인 인물을 실제로 대면했다.
“안녕하십니까!”
오 회장이 다가오자, 이 부장은 큰 소리로 인사했고, 지혁 또한 고개를 숙였다.
“어, 그래. 수고가 많네.”
고개를 들자, 오 회장이 지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냈나?”
“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다 나았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오 회장은 전용기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최 부회장은 지혁을 보며 이 부장에게 물었다.
“새로 온 비서인가?”
이 부장은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말했다.
“네, 부회장님. 선도물산에서 근무하다가 2주 전에 비서실에 왔습니다.”
이 부장은 지혁에게 눈치를 주었고.
지혁은 한 발짝 앞으로 나가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오지혁 차장이라고 합니다.”
“아~”
최 부회장은 지혁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누군지 아네. 유명인사를 여기서 만나는군.”
지혁은 공손히 악수하며 그의 이마를 살폈다.
‘하늘색’
그의 이마에서 ‘하늘색’이 보였다.
‘인물이군······.’
하늘색을 띠는 사람은 고귀한 품성을 지녔다.
성격이 급진적일 수도 있고, 모날 수도 있고, 게으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색 사람들의 공통점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
끝없는 하늘처럼 이상이 높고,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며 계속 성장해 나간다.
가장 보기 드문 색깔이다.
하늘색을 가진 자가 조금만 과욕을 부리면 송 상무처럼 ‘청록색’이 되고 말기에, 품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색이기도 하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이런 하늘색을 유지하는 걸 보면······.’
최 부회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근데 왜 인사하러 안 왔어?”
최 부회장은 장난스럽게 눈에 살짝 힘을 주고 말했다.
“네?”
“비서실에서 왔으면 인사하러 와야지. 미래기획실도 크게 보면 비서실이고, 한 가족인 거 모르나?”
지나가듯 말했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따로 한번 찾아오라는 신호였고, 지혁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늦었지만, 곧 인사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최 부회장은 싱긋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기다리는 거 싫어하거든? 베트남에서 시간 한번 갖지.”
“알겠습니다.”
최 부회장이 전용기에 올랐고, 대기 중이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전용기에 탔다.
***
약 5시간의 비행 뒤.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지혁은 창밖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활주로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많이 보였다.
심지어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앞에 안경을 쓴 배가 볼록 나온 남성이 활짝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산업부 장관이겠죠?”
지혁의 물음에 이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활주로에 마중 나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원래는 출국장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선도그룹 총수의 방문에 베트남에서 신경을 많이 쓴 듯 보였다.
군악대까지 준비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국가원수 저리 가라네.”
지혁이 중얼거리던 중, 비행기가 드디어 활주로에 멈췄다.
“오 차장님.”
“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지혁은 이 부장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 지혁을 어려워하고 슬금슬금 피하던 이 부장이 아니었다.
‘의전팀장 아래서 오랜 기간 버텨냈으니, 이 사람도 뭔가 특출남이 있겠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문 열리면 오 차장님이 동선확보부터 하세요. 회장님은 제가 에스코트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위이잉-
전용기 문이 열리고, 경호팀 다음으로 지혁이 따라 내렸다.
경호팀이 사주 경계를 함과 동시에 지혁은 전용기 계단 앞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만약을 대비해 오른손은 안주머니 과도에 올려져 있었다.
오 회장이 전용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었고, 계단 위에서 손을 흔들자.
-와아~!
-웰컴! 회장님~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베트남 환영인파는 일제히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오 회장은 웃으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고.
그와 동시에 베트남 사람 일부가 웃으며 계단 아래로 다가왔다.
“헤이! 헤이! 스탑!”
그때, 지혁이 나타나 다가오던 사람들을 막아 세웠다.
그는 짐승처럼 바짝 날을 세우고, 베트남 사람들을 경계했고.
심상치 않은 기운에, 꽃을 들고 다가오던 베트남 사람들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니, 저 양반은 의전을 하라니까, 왜 경호를 하고 있어.”
이 부장은 전용기 위에서 이 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았고.
그건 경호팀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