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스킬이 더 있었다 (1)
“오 차장님,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베트남 하노이 법인 공장에 도착한 후에도, 지혁은 오 회장 주변을 철저히 감시했다.
“각자 역할이 있어요. 경호는 경호팀이 합니다. 의전팀 역할이 아니에요.”
지혁은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경호팀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고 말했다.
“미덥지가 않아서 그렇죠. 코엑스에서 봤잖아요. 눈에 뻔히 보이는 위험도 막지를 못하는데······.”
이 부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사실, 눈에 뻔히 보이지 않았다.
그 초록색 점퍼 남자의 은밀한 행동을 눈치채고 움직인 지혁이 특별한 거였다.
어쨌든, 경호팀이 제 역할을 못 한 건 사실이니까.
“오 차장님은 일하면서 실수 안 합니까? 경호팀도 놓칠 때가······.”
흠칫!
이 부장은 지혁의 눈빛을 보고,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실수요?”
“······.”
“실수할 게 따로 있지.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꿀꺽.
이 부장은 지혁의 눈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거 원 무서워서 말 한마디를 못 하겠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알죠. 전 경호팀 믿음이 안 갑니다.”
이 부장은 포기했다.
“그래요.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기본 업무는 놓치면 안 됩니다. 저 혼자 회장님 의전 못 해요.”
“그건 염려 마세요.”
그때 체격이 큰 남자가 다가왔다.
“저기요.”
경호팀장이었다. 이 부장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얘기하는 거 들렸나 보다.’
“저요?”
지혁은 여전히 사주경계를 하며, 대꾸했고.
“네, 저 좀 보시죠.”
때마침, 오 회장은 회의실로 들어갔고, 지혁은 주변 경계를 풀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경호팀장은 험악한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다.
“월권 좀 하지 마세요. 의전팀이라 가만 두고 봤더니. 해도 너무하시네.”
경호팀장답게 체격도 크고 외모도 강인했다. 풍기는 포스가 만만치 않았기에 이 부장은 옆으로 약간 피해 있었지만.
지혁은 끄떡도 없었다.
“저도 월권하기 싫은데요.”
“······.”
“두고 볼 수가 없잖아요. 믿음이 가야 말이지.”
경호팀장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뭐요?”
지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일이나 똑바로 하고 월권이니 뭐니 그런 소리 하세요. 사고 터지고 뒷수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그날 일 마음에 두고 계시나 본데······ 사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경호팀장을 무시하며 지나쳤다.
“하여간 성격 이상한 사람 많아.”
이 부장은 이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구한테 이상하다고 하는 거야?’
***
선도전자 SEH(Sundo Electronics Hanoi) 법인.
공장을 시찰하기 전, 법인장은 오 회장에게 베트남 시장 상황과 사업 현황을 보고 중이었다.
“현재 우리 법인은 A구역 사업장에서 핸드폰과 청소기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오더량 증가로 인해, 10만 평 용지를 마련하여, B구역 생산시설을 증축 중입니다. 그리고······.”
지혁은 회의실 뒤에 서서 오 회장을 관찰 중이었는데.
‘회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오 회장은 수첩을 꺼내어, 계속 기록하면서 법인장의 보고를 들었다.
삼색 볼펜으로 색깔까지 구분해 가며 필기하는데, 지혁으로서는 임원급 이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신선했다.
또한, 기록만 하는 게 아니었다.
“법인장님, 잠깐만.”
“네, 회장님.”
오 회장이 말을 끊자, SEH 법인 관계자들은 모두 긴장했다.
“B구역 부지는 임대가 아니라 매입이 맞나?”
“네, 맞습니다.”
“지금 핸드폰 생산량이 많이 증가해서 오더량이 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금 같다는 법은 없지 않소?”
“······.”
“판매량이 급감할 수도 있고, 선도전자 주력사업이 바뀌면서 전략적으로 생산물량을 줄일 수도 있지. 시장 상황은 모르는 거니까.”
오 회장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부지 매입할 때, 그에 대한 고려도 한 건가?”
“······.”
“미래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본 건 아니겠지? 10만 평 부지면 적지 않은데. 나중에 되팔 수 있을 만한 지역도 아니고 말이야.”
법인장은 입술을 떨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룹 회장’의 무게 때문일 수도 있다.
답변을 기다리는 정적 속에.
회의실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었는데.
“회장님, 제가 대신 설명드려도 될까요?”
최 부회장이 나섰다.
오 회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법인장님이 긴장하셔서 입이 잘 안 떨어지시는 것 같은데요.”
최 회장의 가벼운 농담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좀 풀렸다.
“B구역은 조립식으로 시공됩니다. 해체와 구성이 간단하게 설계되기 때문에, 만약 생산 품목이 바뀌면 어렵지 않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수치를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고 읽는 게 아니라, 모두 숙지해서 하는 말이었다.
“재료만 준비되면 공장 라인 바꾸는 건 7일이면 가능합니다. 자체 시뮬레이션도 해봤습니다. 회장님이 염려하시는 건 충분히 고려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래, 공장 체질을 바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상관없지. 선도전자가 망하지 않는 한 생산 공장은 필요할 테니.”
오 회장이 법인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왜 일 처리 잘해 놓고 말을 못 하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겁먹지 마. 회장이 뭐 별거야? 법인에서는 법인장이 왕이지.”
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으로 가보세. 근로자들 일하는 모습 좀 보고 싶네.”
“네, 회장님.”
지혁은 회의실에서 오 회장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그가 선호하는 태도를 파악했다.
‘배움, 경청, 적극성.’
지혁이 비서실로 온 것은 오 회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이다.
‘이제 좀 움직여 볼까.’
***
오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현장 시찰을 했고.
그는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참 따뜻했다.
지혁은 보면 안다. 그러는 척하는 건지, 진짜인지.
‘정말, 의외네.’
지혁은 어머니로부터 가족 비화를 들었을 때, 오 회장이 욕심 많고 삐뚤어진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근로자들 대하는 모습은 꼭 ‘아버지’ 같았다.
통찰력도 대단해 보이고, 매사 배우려는 태도, 사람을 생각하는 모습까지.
오 회장을 관찰할수록 지혁은 마음속에 감탄하는 마음이 커졌다.
‘괜히 글로벌 기업을 일군 게 아니야.’
오 회장이 창업자는 아니지만, 분명 그가 경영하던 시기에 선도그룹은 큰 도약을 하여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지혁은 오 회장 근거리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오 차장.”
오 회장이 갑자기 지혁을 불렀다.
그가 지혁을 지목했다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들은 놀라웠다.
그건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얼마 전까지 사업 현장에 있던 사람이잖아.”
“네.”
“선도물산에 있었다고 했지? 상품기획 팀장이라고 했던가?”
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런 얘기까지 했었나?’
병원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선도물산에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까지는 얘기하지 않았었다.
의아했지만, 일단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의류 또한 생산 공장이 있잖아? 그건 아무래도 사람 손을 더 많이 타지? 가전 생산은 기계가 많이 하지만.”
지혁은 의류 생산 공장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황 과장에게 ‘생산’을 배울 때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다.
“네, 의류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인건비가 싼 제 3세계 국가에서 소싱을 많이 하고 있고요.”
“자네 생각에 의류는 앞으로도 인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가?”
오 회장은 가볍게 말했지만.
지혁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오 회장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잘 없으며.
그 몇 번 없는 기회에 보여주는 지혁의 태도는 오 회장 뇌리에 남을 것이다.
‘잘 대답해야 해.’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래?”
“네.”
“왜지?”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요.”
“효율만 따지고 미래는 안 보겠다는 건가? 의류도 기계로 만들 수 있다면, 인건비를 줄일 수 있을 텐데.”
“네, 이상적인 결과로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꼭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혁의 언어 선택에 이 부장이 놀랐다.
‘아니, 회장님 앞에서 뭔 말을 저렇게 해?’
틀린 비유는 아니지만, 굳이 회장님 앞에서 할 만한 비유는 아니었다.
지혁은 말하는데 거침이 없고.
오 회장은 경청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비효율적인 이상 실현은 출혈을 필요로 하기에, 경쟁자들을 보고 따라가는 게 좋다고 봅니다. 기계로 옷 만드는 게 필수 불가결한 일은 아니니까요. 전략적으로요.”
“흠······.”
오 회장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고, 옆에 있던 최 부회장도 피식 웃었다.
“회장님, 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혁은 당돌하게도 오 회장에게 질문하려 했다.
그런데······ 오 회장은 좋아했다.
“좋지. 해보게.”
“인력에서 기계로 공장 체질을 개선하면 초기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선도전자의 경우 오래전에 그 과정을 거쳤을 텐데, 그 결심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혁을 있는 힘껏 눈빛을 반짝였고.
오 회장은 활짝 미소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 초기 비용은 많이 들지. 하지만 경영자는 시대의 흐름을······.”
오 회장과 의전팀 팀원 지혁.
분명 오너와 비서의 관계인데.
옆에서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마치 신임 경영자가 오너에게 현장 지도를 받는 것 같았다.
***
“회장님.”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을 불렀다.
두 사람은 일행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얘기하게.”
“오 차장 흥미롭죠?”
“······.”
오 회장과 최 부회장.
회사생활을 30년 넘게 했으며, 많은 사람을 상대해왔다.
될성싶은 떡잎은 한번 보면 안다.
오 회장은 최 부회장에게만큼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 자네가 보기엔 어때?”
“눈빛, 말하는 태도, 생각하는 거······ 범상치 않습니다. 비서실에 두기에 좀 아까운데요.”
최 부회장은 지혁은 그룹 컨드롤타워 ‘미래기획실’로 끌어올 생각을 했다.
원래부터 좀 관심이 있었는데, 출장 간에 행동을 보니 더 확신이 생겼다.
오 회장 또한 최 부회장이 어떤 의도로 이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좀 두게.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
오 회장은 이상하게 지혁에게 끌리는 감정이 있었고, 가까이서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었다.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이 일개 직원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별일이네.’
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산발한 풍만한 베트남 여자가 오 회장에게 다가와서 소리치듯 말했다.
“Xin l i cho t i h i. Con trai của t i đ u!”
베트남어를 하는데, 통역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Anh ấy đã chết khi l m việc ở đây. C u t i v i!”
황급히 다가온 경호팀은 일단 그 여자를 떼어내었고.
오 회장은 당혹스러웠다.
경호팀에게 제지당한 상태에서도, 베트남 여자는 계속 뭐라고 말을 했고.
그때, 지혁이 나섰다.
“아줌마. 왜 그러는데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에게 당당히 한국말을 시전하는데.
“아~ 그랬어요?”
지혁과 베트남 여자는 손짓·발짓을 해가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언어를 쓰면서 말이다.
이 부장은 이 진귀한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처음엔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분명 대화를 하는 모습이었고.
잠시 후.
베트남 여자는 지혁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갔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
지혁은 당연한 듯 일행에게 다가와 여자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어 없이 소통하는 방법.
‘그 세계’에서 배운 스킬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