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10화 (110/301)

110. 스킬이 더 있었다 (2)

‘풀바디랭귀지.’(full body language)

‘그 세계’에서는 언어 없이 소통하는 스킬을 이렇게 불렀다.

‘풀바디랭귀지’ 스킬은 ‘세 번째 눈’처럼 지혁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세계’에서는 살길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개념이란 게 없다.

마음 맞고, 실력 좋은 사람들끼리 만나 하나의 캠프를 이룰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하루하루 생존하기도 힘든데, 언어를 배울 시간은 없었다.

'그 세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언어 없이 소통하는 방법을 익힌 것인데.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베트남 여자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건가?”

오 회장이 지혁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해했습니다.”

이 부장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저 베트남 여자랑 한국말로 대화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혹시, 저 여자분 한국말 할 줄 아시던가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니요. 한국말 못 하시던데요. 옆에서 들었잖아요.”

옆에서 분명히 베트남어로 거칠게 말하는 걸 들었다.

‘없는 얘기를 할 사람은 아닌데······.’

믿기지가 않았지만.

정말 알아듣지 못했다면, 지혁이 이렇게 나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 회장 또한 지혁의 괜히 하는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물었다.

“그래, 저 여자가 뭐라던가?”

“아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요.”

“······.”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봅니다.”

“아······.”

“그리고 다른 사람 얘기를 하던데, 한국 사람 이름은 아니었거든요.”

법인장 및 주요 스태프는 한국 사람이지만, 직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지 관리인을 여러명 두고 있었다.

“높은사람? 혹은 관리자 같은데. 그 분이 여자분 아들에게 못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신변과 관련된 일 같아 보이는데, 제대로 처리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회장님이 한국에서 온 높으신 분임을 알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 다가온 거고요.”

오 회장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뭐라고 했길래 여자분이 돌아갔나?”

지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회장님께서 잘 해결해 주실 테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

“용기 내길 잘 하셨다는 말씀도 드렸고요.”

주변엔 오 회장 외에 임원들과 비서실, 경호팀이 있었다.

모두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이렇게 말한 이상, 오 회장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부장은 오 회장을 은근히 푸쉬하는 지혁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당당한 걸까. 미친 걸까.’

***

“아이고, 싸는 줄 알았는데.”

통역사가 돌아왔다. 아주 후련한 얼굴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심각하지?’

화장실 가기 전에는 뿔뿔이 흩어져 있길래, 괜찮겠지 싶어서 빨리 다녀온 건데.

지금은 한곳에 모두 모여 있었고, 분위기도 심각했다.

이 부장이 통역사를 발견했다.

“아, 통역사님 오셨네요.”

곧바로, 이 부장은 지원팀 비서에게 요청했다.

“좀 전에 오 차장님과 대화했던 아주머니 찾아서 데려오실래요?”

“알겠습니다.”

“한국인 법인 직원들은 모르도록 움직이셔야 해요.”

“네.”

지혁의 말대로라면 ‘관리’의 문제로 보였고.

법인에서 알면서도 처리를 제대로 안 한 사안일 수도 있기에, 비밀리에 갔다 오라고 했다. 일종의 '감사'의 성격을 띤 일이 된 것이다.

잠시 후.

지원팀 비서는 오 회장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베트남 여성을 데려왔다.

이 부장은 통역사에게 말했다.

“통역사님 자리 비우셨을 때, 이분이 저희한테 찾아와서 말씀을 아주 많이 하셨거든요?”

“네.”

“저희 직원 중 한 명이······ 음······.”

결과적으로 지혁이 통역을 하긴 했으나, 그걸 통역이라 표현하기는 애매했다.

“해석을 했는데요.”

“해석이요?”

통역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베트남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

이 부장은 설명하기 어려워서, 빨리 목적만 말했다.

“어쨌든, 이 아주머니 얘기 통역 좀 해주세요. 급한 일이에요.”

“아, 네 알겠습니다.”

통역사는 베트남 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B n có thể kể cho t i nghe về cuộc trò chuyện mbạn đã có với người đó trước đó không?”

(아까 저 분과 했던 얘기 좀 해줄래요?)

베트남 여성은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남 여성은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하더니, 얘기할수록 감정이 올라와서.

아까처럼 다시 흥분하여 고성으로 말했다.

통역사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들어주었고.

어느덧 대화는 끝났다.

저벅. 저벅.

통역사는 오 회장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고.

꿀꺽.

이 부장은 왠지 긴장되었다.

‘설마······ 오 차장이 얘기한 내용과 맞을까?’

지혁에게 들은 내용으로 봤을 때, 바디랭귀지로 통할 수 있는 간단한 대화는 아니었다.

만약 지혁의 ‘해석’이 맞는다면······.

‘이 아저씨 더 무서워질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어려운데, 섬뜩한 기분마저 들것 같았다.

“뭐, 뭐랍니까?”

이 부장의 물음과 동시에.

오 회장, 최 부회장, 비서팀, 경호팀 모두가 통역사의 입을 집중했다.

‘왜들 이래? 부담스럽게.’

“흠!”

통역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들이 산재 처리를 제대로 못 받았답니다.”

“대박······.”

이 부장은 손으로 입을 막고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기겁하며 지혁을 바라봤다.

단어만 다를 뿐, 의미는 정확히 통한 것이다.

이 부장은 손짓하며 더 말했다.

“좀 자세하게 설명을······ 빨리요.”

지금은 아주머니의 사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혁의 통역 싱크로율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네, 여기 현지 공장장이 문제가 좀 있나 봅니다. 아주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아들이 근무 중에 사고를 당했고, 산재 처리를 제대로 안 해줬다고 하는데······.”

통역사의 말이 이어갈수록 사람들의 놀라움은 커져갔고, 지혁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싱크로율 90% 이상인데.’

‘오 차장님이 진짜 베트남어 모르는 거 맞아?’

‘바디랭귀지로 이런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도 안 돼······ 이게 사실이면, 오 차장님은 전 세계 언어가 다 가능하다는 건데.’

과장된 추측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지혁의 ‘풀바디랭귀지’는 언어의 종류와 상관없기 때문에, 전 세계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했다.

지혁은 주변 사람들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회사 관두면 학원을 차려볼까.’

사람들이 놀라서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니, 풀바디랭귀지가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회장은 통역사의 얘기를 다 들은 후.

턱.

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음?’

지혁도 놀랐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더 놀랐다. 오 회장은 신체접촉을 잘 안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재주를 가졌군.”

“······.”

“자네와 같이 다니면, 어느 나라를 가도 걱정 없겠어. 하하.”

덕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 말을 들은 통역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고맙네. 자네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한 일인데.”

처음 베트남 여성이 처음 다가왔을 때 통역사도 없었고.

지혁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저 이상한 여자 취급하며 쫓아냈을 것이다.

“우리 회사는 내부 관리에 신경을 잘 써야 하거든. 경쟁자와 격차가 많이 나는 압도적 1등 기업이니까. 외부보다 내부가 더 중요한 시기지.”

말을 마친 후, 오 회장은 곧바로 법인장을 불러서 이 일에 대해 논의했다.

***

약 1시간 전.

지혁이 손짓 발짓 하며 베트남 여성과 대화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우스꽝스럽게 혹은 어디 모자란 사람처럼 봤지만.

딱 한 사람.

최 부회장만은 그런 지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사실, 전용기 앞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혁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해······ 많이 닮았단 말이야.’

처음엔 오 회장을 떠올렸는데.

보면 볼수록 과거에 알던 누군가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상이 누군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는데.

지혁의 ‘풀바디랭귀지’를 보다가, 기억 속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혁은 잘 웃는 사람이 아니며, 표정 변화도 잘 없다.

그런 지혁이 ‘풀바디랭귀지’를 할 때만큼은 언어 없이 소통하려다 보니, 온몸으로 표현을 해야 했고, 표정 또한 다채로워졌는데.

최 부회장은 지혁의 다양한 표정을 보다가 지혁이 닮은 ‘그 남자’가 떠오른 것이다.

‘오종원 이사.’

최 부회장은 자신의 눈썰미에 확신이 있고, 분명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아니겠지.’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부인하려 했다.

'오종원 이사 아들? 에이~ 말도 안 돼.'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말투, 표정, 생김새, 목소리까지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물론,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 대조적이었지만.

그거 하나만 빼고, 최 회장이 기억하는 오종원 이사와 너무 비슷했다.

베트남 아주머니 통역 건이 일단락되었을 쯤.

최 부회장은 조용히 지혁 옆으로 따라붙었다.

“오 차장.”

“네, 부회장님.”

“오늘 밤에 시간 되나?”

오 회장이 숙소에 들어가면, 오늘 의전 일정이 끝난다. 숙소부터는 지원팀이 전담한다.

“네, 회장님 일정 끝나시면 시간 됩니다.”

최 부회장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입 인사는 오늘 밤에 받는 거로 할까?”

전용기 앞에서 최 부회장을 만났을 때, 발령받고 인사도 안 하러 왔다며 가볍게 타박을 받았었다.

지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

밤 11시.

하노이 호텔. 라운지 바.

지혁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났고.

최 부회장은 이미 혼자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먼저 와 계셨군요.”

“어, 방에 있기 답답해서.”

최 부회장은 하노이 야경이 잘 보이는 창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도 한잔 하지?”

“네.”

지혁은 칵테일 한잔을 주문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마주친 후 마셨다.

그리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뒤늦게 인사드리네요. 그래도 그 덕분에 부회장님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니 좋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혁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듣던 거랑 다른데? 상당히 날카로운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냥 뜬 소문이었나? 나한테 하는 거로 봐서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거든요.”

“하하!”

최 부회장은 큰 소리로 웃고는 잔을 들이켰다.

“단어 선택이 독특하군. 소문대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 같긴 해. 아까 바디랭귀지 하는 것도 그렇고.”

지혁은 정확한 명칭 ‘풀바디랭귀지’를 알려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두 남자는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술을 서너 잔 더 마셨고.

만난 지 약 20분쯤 되었을 때.

최 부회장은 천천히 말했다.

“오 차장.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진짜 비서실에 온 이유가 뭔가?”

지혁은 최 부회장의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흠칫 놀랐다.

“오 부회장님한테 말한 표면적인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궁금한데.”

지혁은 생각했다.

‘오 부회장한테 말한 표면적인 이유? 그걸 최 부회장이 어떻게 알지?’

선도그룹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컨트롤타워 ‘미래기획실’이 모르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권력 및 후계 구도와 관련된 일은.

지혁이 할 말을 생각하느라 가만히 있자, 최 부회장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오혜진 사장이 보내기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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