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리더의 자격
최 부회장이 ‘오 사장’을 언급한 건 지혁으로서는 정말 의외였다.
놀란 내색을 최대한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혁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 이 남자의 속을 모르니까······.’
“전 비서실에서 일해보고 싶었고, 기회가 생겨서 지원했을 뿐입니다.”
지혁은 교과서적인 답변을 했고.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오 사장은 유능한 사람이지만, 리더 감은 아니야.”
최 부회장은 지혁이 오 사장 사람이라는 걸 기정사실로 한 듯 말했다.
“내 사람으로 품고 있으면 좋지만, 기댈 곳은 아니라는 의미일세.”
지혁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고,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 자네가 오 사장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겠지. 편한 자리에서 편하게 한 얘기였으니, 부담 갖지는 말게.”
지혁은 생각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건가?’
최 부회장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봐서는 지혁과 오 사장과의 관계를 아는 듯 보였다.
그래도 말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혁은 모르는 척 물어봤다.
“그럼 오 부회장님이 최선입니까?”
그가 오 부회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오 부회장의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했다.
지혁의 물음을 듣고, 최 부회장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제법 하는군.’
“타이밍 좋았어. 좋은 질문이야.”
“······.”
최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오 부회장?”
지혁은 그다음에 이어질 최 부회장의 말에 집중했다.
“그 새끼는 안 돼.”
.
.
.
.
답변은 간단했다.
너무 노골적인 그의 표현에 지혁은 놀랐고.
최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오 부회장이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기도 하고, 우리끼리 있으니까 편하게 얘기한 거야. 괜찮겠지?”
“······.”
“그리고 자네도 오 부회장 싫어하잖아?”
“네?”
지혁은 깜짝 놀라서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최 부회장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내가 잘못 짚었나? 그럼 지금 나 실수한 건데. 하하.”
지혁은 기괴한 눈빛으로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나보다 더한 사람이네. 정보력 수준이······.’
지혁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사람에게서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
몇 번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간 보지 말아야 한다.’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사람에게는 잔머리 굴리다가, 역효과 날 수 있다.
“부회장님.”
“얘기하게.”
“그럼 부회장님 생각에는 오 회장님 다음 사람은 누군 거 같습니까? 오 사장님도 아니고, 오 부회장도 아니면.”
최 부회장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별로 의미 없는데. 어차피 다 끝난 얘기 아닌가.”
“끝나요?”
“그래. 오 부회장 자리가 너무 확고하잖아. 회장님 신임도 두텁고. 뭐, 두텁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어버린 거지만. 어쨌든, 너무 늦었어.”
지혁도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오 부회장을 대신할 사람이 생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그래도 부회장님의 혜안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밤은 길지 않습니까?”
지혁은 살짝 웃으며 말했고.
최 부회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이 친구 아주 요물일세~ 무뚝뚝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말할 줄도 아는구먼?”
“과찬이십니다.”
“음~”
최 부회장은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더 마신 후,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래, 다 지난 일이니까 얘기하는 건데.”
“네.”
“오 회장님 자제 중에 오진원이라는 아들이 있어.”
‘오진원’
일전에 한 전무와 오 회장의 자식들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오너일가에 대한 얘기라서 온 신경을 집중하여 들었기에 확실히 기억했다.
“오 회장님의 셋째아들인데.”
“네.”
“그 사람이 참 괜찮아. 지금은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야인으로 살고 있지만······ 안타깝지.”
지혁이 물었다.
“어떤 점 때문에 그 사람을 좋게 보십니까?”
“······.”
중요한 질문이었다.
최 부회장은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는 역으로 질문을 했다.
“자네는 리더의 자격이 뭐라고 생각하나?”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글쎄요.”
최 부회장은 지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난 ‘경청’이라고 생각하네.”
“······.”
“경청’할 줄 아는 자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야 아래 두고 쓰면 되는 거고.”
“······.”
“그런 유능한 사람들의 지혜를 들을 줄 알고, 쓴소리도 새겨들을 줄 아는 자.”
최 부회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회장님의 셋째 아들은 그 부분에선 완벽했지. 꽤 지혜롭기도 했고.”
지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회장님은 그걸 몰라보셨습니까?”
출장 간 관찰해봤을 때, 오 회장은 기록까지 해가며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경청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 나이가 되도록 습관을 유지하는 거로 생각했다. 근데, 그런 오 회장이 오진원을 몰라봤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알아봤지.”
“······.”
“하지만 오진원은 장남이 아니잖아.”
지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남이 아니라서 알아봤는데도 모른 척했다는 건가?’
“회장님은 장자의 권리에 대한 생각이 매우 강하네. 오진원은 무능해야 했어. 오히려 비범함이 그분한테는 독이 된 거지.”
지혁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설마······ 그게 야인이 된 이유인가?’
최 부회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운 인재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기회 되면 해주기로 하고. 어쨌든! 그래서 오 부회장은 안 되는 거야. 그 인간은 남의 말을 조금도 안 듣거든.”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부회장을 한번 대면해 봤기에, 최 부회장의 말이 대번에 이해가 갔다.
‘하긴, 말 정말 안 듣게 생기긴 했어.’
“아, 근데 무슨 얘기 하다가 오진원이랑 오진양 얘기가 나왔지.”
최 부회장은 위스키를 꽤 많이 마신 상태였고, 혀가 살짝 꼬여 있었다.
“어, 그래! 리더의 자격.”
“좀 전에 경청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혁은 최 부회장이 술 취해서 했던 말 또 하려는 줄 알고 막으려 했다.
“경청은 범인일 경우에 최선의 자격이고.”
최 부회장은 주먹을 꽉 쥐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리더의 자질은 타고나는 거야. 특별히 덕목을 집어서 말할 수 없지.”
“······.”
“사람 아래 말고, 사람 위에 있을 때 빛을 발하는 자. 여왕벌처럼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이상적인 얘기네요. 과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최 부회장은 또 잔을 비우며 말했다.
“잘 없지. 하지만 분명 있고, 간혹 보이기도 해. 예를 들어.”
“······.”
“오 차장 같은 사람 말이야.”
***
“네?!”
아무리 부드럽게 말해도, 최 부회장의 말은 묵직하며 뼈가 있었다.
술 마시며 농담하듯 대화하고 있지만.
지혁은 그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이건 뭐지? 경고의 의미인가?’
지혁은 최 부회장이 누구의 사람인지, 어떤 의도로 본인에게 접근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최 부회장의 의미심장한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하하.”
지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헛웃음을 짓는 걸 싫어했지만, 이 타이밍에는 어쩔 수 없었다.
“자넨 리더 감이야.”
최 부회장은 술기운에 눈도 살짝 풀렸고, 혀도 꼬여 있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멀쩡했다.
“기회가 생기면, 절대로 놓치지 말게.”
“······.”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피하는 것······.”
최 부회장은 지혁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건 죄야. 알겠나?”
지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본부장 자리라도 오면 절대 피하지 않을게요. 하하.”
지혁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야 월급 많이 받고 좋은데, 왜 피하겠습니까?”
최 부회장은 지혁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선도그룹은 내 평생을 바쳐서 지켜온 회사네. 내 인생 그 자체야.”
“······.”
“오 회장님의 다음이 솔직히 많이 걱정되네.”
지혁은 가능한 한 빨리 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도그룹에 인재는 많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그 얘기는 인제 그만하시죠.”
최 부회장이 말들이, 지혁으로서는 이상하게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만하지.”
최 부회장은 일어날 채비를 했다.
“술도 꽤 마셨고, 밤도 늦었으니 이제 슬슬 일어날까?”
“그러시죠.”
최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오 차장.”
“네.”
“자네, 회장님 눈에 띄려고 애쓰는 건 좋은데 말이야.”
지혁은 뜨끔했다.
“회장님 젠틀해 보이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야. 너무 믿지 말게.”
“······.”
“선도그룹이 어떤 회사인가? 영광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희생도 많았지. 수많은 희생을 밟고 올라선 사람이야.”
최 부회장은 검지를 펼치며 말했다.
“조심해.”
지혁은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최 부회장은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고.
지혁은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다.
‘오 부회장 이름까지 불러가며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아닐세. 이 얘긴 나중에 하지.”
그리고 최 부회장은 지혁의 눈을 응시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반가웠네.”
***
다음날 오전 일정까지 마친 뒤.
오 회장 일행은 노이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출장은 SEH(Sundo Electronics Hanoi) 법인 방문이 다였다.
“도대체 출장을 왜 온 건지 모르겠네.”
전용기에 오르며 지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환영 인사를 받으러 온 건지, 이 대규모 인원이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옆에서 지혁의 혼잣말을 들은 이 부장이 말했다.
“현장 지도 방문이잖아요. 현장 지도.”
“무슨 지도를 했는데요?”
“······.”
이 물음에 이 부장은 입맛만 다시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혁은 오늘 일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이딴 식의 출장은 다니지 말아야지. 차라리 이 비용으로 직원들과 놀러 가는 게 낫지. 이건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지혁은 오 회장의 요청으로 직접 그를 자택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자네가 옆에 있는 게 참 든든하구만.”
지혁을 보는 오 회장의 눈빛이 출장 전과 달라져 있었다.
출장 자체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지혁은 이런 오 회장의 태도를 보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든든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래. 수고했고, 조심히 들어가게.”
“네, 회장님. 편히 쉬십시오.”
그날 밤.
수아는 지혁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겨우 하루였지만, 현실 세계에 돌아온 후 처음 떨어져 본 것이기에 두 사람은 참 반가웠다.
한 달은 못 본 사이처럼, 아내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지혁은 가뿐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의전팀.
똑똑.
“안녕하세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전팀장과 황 과장이 대화 중이었다.
사무실을 이틀 간 비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혁은 가자미눈을 뜨고 의전팀장과 황 과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흠! 오 차장. 잘 갔다 왔어?”
의전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혁을 맞았고.
“네. 팀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 잘 지냈지.”
그리고 지혁은 황 과장을 바라보았다.
“황 과장님도······잘 지내신 거죠?”
“네! 덕분에요.”
황 과장은 의전팀장 쪽을 향해 눈썹을 찡긋해 보인 후.
씩 웃으며 지혁에게만 보이도록 엄지를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