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웃는 얼굴 뒤에 (1)
황 과장의 모습을 보니, 둘이 잘 지낸 것 같아 보였다.
지혁은 의전팀장에게 말했다.
“긴장 푸세요.”
팀원이 팀장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의전팀장은 지혁의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혁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 부장님은요?”
“오늘 연차야. 여독이 안 풀렸다며 하루만 쉬겠다고 하더군.”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부장이 고생 좀 했지.’
출장 간에 지혁이 아무리 도우려 해도, 이 부장은 혼자 하려 했었고
그러다 보니 업무 부담이 컸었다.
“오 차장은 괜찮아?”
의전팀장의 물음에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뭐, 한 게 있어야죠.”
“······.”
“괜찮아요.”
의전팀장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팀장이 물어보는데, 한 게 없어서 괜찮다니······.’
너무 솔직한 답변이 좀 불편했지만.
그래도 의전팀장은 웃었다.
지혁 앞에서는 항상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 부장보다는 낫네.’
지혁은 그런 의전팀장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의전팀장은 자신이 피식자임을 잘 알고 있었고, 포식자인 지혁을 알아보고 피식자답게 행동했다.
이러면, 쉽게 잡아먹히지 않는다.
“아, 오 차장. 소문 들었어~ 베트남에서 활약이 대단했다며?”
의전팀장이 운을 띄우자, 황 과장도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요~ 대박! 통역 능력 뭐에요? 듣고도 믿기지 않아서. 하하. 진짜 베트남어 모르면서 통역 한 거예요?”
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황 과장에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풀바디랭귀지라고.”
“풀바디? 마사지?”
황 과장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고, 지혁은 아차 싶었다.
‘이 용어는 쓰면 안 되겠군.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네.’
“바디랭귀지요. 바디랭귀지.”
“아~ 그러니까요. 그 정도 바디랭귀지면 거의 신의 영역인데.”
황 과장의 말에 의전팀장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하하. 그러니까. 오 차장 부서 잘못 온 거 아니야?”
“······.”
“그 정도면 통역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룹에 통역팀이 따로 있었나? 하하.”
의전팀장은 웃으며 얘기하다가, 싸늘함을 느꼈다.
지혁이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요? 저 팀에서 내보내고 싶으세요?”
“어?”
“방금 그 얘기 아니었나?”
꿀꺽.
의전팀장은 미소 지은 채로 표정이 굳었다.
‘아니, 뭘 이렇게 정색을······ 내가 그렇게 큰 실수를 했나.’
“아, 아니야~ 그냥 농담한 거야. 농담.”
“재미없는데요.”
“······.”
“저도 장난으로 의전팀장님 딴 데 보내드려 볼까요.”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의전팀장의 동공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황 과장은 지혁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
“에이······ 그만 해요. 제가 듣기에도 농담이었어요.”
의전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지혁은 황 과장만 보이게 눈썹을 찡긋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 일부러 그러는 거구나.’
황 과장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혁이 의전팀장에게 말했다.
“앞으로 유쾌한 농담만 하시죠.”
“그래.”
“피는 피를 부른다는 황금률의 법칙 아시죠?”
의전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률의 법칙은 남에게 대우받고 싶은 대로 행하라는 뜻 아닌가? 피는 피를 불러? 의미는 비슷한데, 어째 비유가······.’
“잘합시다.”
“알았어.”
지혁은 의전팀장을 내치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래서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그래서 좀 더 혹독하게 대했다.
“오 차장님!”
그때 한 남자가 찾아와 지혁을 불렀다.
“네?”
“비서실장님이 찾으십니다.”
“지금요?”
“네.”
지혁은 아쉬운 듯 의전팀장을 보며 말했다.
“대화는 나중에 더해야겠네요.”
곧바로 남자를 따라서 의전팀을 나갔고.
휴우-
의전팀장은 가슴을 쓸며 한숨을 쉬었다.
‘아오, 스트레스 받아.’
토닥. 토닥.
황 과장이 가볍게 의전팀장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
똑똑.
“들어오세요.”
지혁은 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지혁 차장입니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아요.”
“네.”
지혁은 비서실장을 오늘 처음 대면한다.
‘비서실장 강전철 전무’
그의 책상 가운데 놓인 명판을 보았다.
‘인상도 온화하고, 목소리도 좋네.’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있어서 비서실장의 색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외모와 분위기를 살폈을 때는 호인 같아 보였다.
‘평판도 꽤 괜찮았어.’
비서실에 온 후, 여러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을 때, 상급자로서 비서실장의 평판은 꽤 좋았다.
비서실장이 말했다.
“우리 처음 보죠?”
“네.”
“때맞춰 자꾸 바쁜 일이 생겨서 면담을 이제야 하네요. 타이밍이 안 맞기도 했고. 오 차장도 바빴잖아요? 병원 신세에 베트남 출장까지.”
지혁은 비서실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으나, 꽤 많은 일을 겪었다.
“내가 한가할 때는 오 차장이 바쁘고. 오 차장이 여유가 될 때는 내가 바쁘고. 하하. 우리 궁합이 안 맞는 건가?”
비서실장은 웃으며 사람 좋게 말했지만, 지혁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났으면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아, 이제 말 좀 편하게 해도 될까?”
“네, 저도 그게 좋습니다. 편하게 하십시오.”
비서실장은 나이가 꽤 많아 보였는데. 못 해도 오십 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이 나이에 비서실장 자리에 있는 거면······ 확실히 뭔가 있는 사람이야.’
그게 실력일지, 연줄일지 모르겠지만, 남다른 특별함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활약상이 자자하더군. 특히, 회장님께서 자네에 대한 인상이 좋으시던데.”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비서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튀지 말게.”
‘음?’
지혁은 약간 당황해서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대화 내용과 표정이 완전 반대였다.
분명 경고성 발언인 것 같은데,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뭐, 자네로서는 열심히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비서실장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럼 열심히 하지 마. 열심히 안 해도 돼.”
“······.”
“자네를 지원팀에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비서실장은 지혁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지혁은 놀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의 초승달 같은 눈이 지혁의 반응을 살피다가 말했다.
“뭐, 내가 잘못 짚은 거면 말고. 어쨌든 튀지 말게.”
지혁은 생각했다.
‘아직 비서실장은 파악 못 했어. 일단, 넘어가자.’
지혁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뭐 하고 싶은 얘기 있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이고요.”
“뭐?”
“명목상 면담이지, 얘기 전하려고 부르신 거잖아요. 기록 남길 여지를 피하려는 목적도 있으실 거 같고.”
통화나 메시지로 하면 기록이 남을 수 있다.
비서실장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 봐라. 듣던 대로 재밌는 놈이네.’
하지만 그 또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 생각이 많군. 그냥 면담한 거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런 셈 치죠. 얘기 다 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말리지 않았고.
지혁은 고개 숙여 인사 후, 비서실장실을 나왔다.
***
흡~ 휴우~
황 과장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뱉어냈다.
선도본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
지혁과 황 과장은 선도물산에서처럼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맘 편히 담배 피울 수 있는 곳.
“아~ 좋다. 차장님은 좋은 장소 정말 잘 찾으시는 거 같아요.”
황 과장은 행복한 얼굴로 연신 담배를 내뿜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요즘 너구리 굴 같은 흡연 구역에서만 담배를 태웠었는데.
쾌적한 공기와 함께 담배를 피니, 황 과장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지혁은 웃으며 물었다.
“정말 이틀간 별일 없었어요?”
아까는 황 과장이 괜찮다고 했지만, 의전팀장이 함께 있는 자리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네~ 괜찮았어요. 이젠 오 차장님 안 계실 때도, 팀장님이 잘해주세요.”
“다행이네요.”
황 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그때 큰 실수할 뻔했는데. 아니 뭐······ 사실 정말 힘들긴 했거든요. 오 차장님 아니었으면 정말 회사 관뒀을 수도 있어요.”
“알아요. 그래서 칼춤 한번 췄잖아요.”
“하하.”
지혁의 표현이 재밌었는지 황 과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지혁 또한 빙그레 웃다가 물었다.
“혹시 비서실장님이랑 대화해 본 적 있어요?”
“비서실장님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황 과장은 헤벌쭉해졌다.
“그냥 오다가다 인사만 드렸죠~ 너무 젠틀하시고, 친절하셔서. 그분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던데.”
“······.”
“저만 그런 게 아닌 거 같던데요? 직원들이 다 좋아해요. 그런 실장님 둔 건 정말 행운이죠.”
하지만, 지혁은 웃지 않고, 황 과장에게 물었다.
“그분이 과장님께 뭘 잘해주셨는데요?”
“네?”
“콕 집어서 말해봐요. 뭘 잘해줬죠?”
“······.”
황 과장은 잠시 생각했는데.
“아······ 글쎄요.”
“······.”
“인사 잘 받아주는 거?”
지혁은 피식 웃었다.
“이미지 관리만 잘하는 거예요. 실상은 전입해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면담 한번 하지 않았고. 계속 사람들을 내치는 의전팀장을 몇 년째 그 자리에 두고 있죠.”
“······.”
“허울 좋은 인상에 다들 속고 있는 거라고요. 결론이 뭐냐고요. 잘해준다고? 도대체 뭘 잘해주는데요?”
황 과장은 지혁의 말을 들어 보니, 수긍이 되었다.
지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디를 가나 암적인 존재들은 꼭 있네요.”
“그래도······ 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황 과장은 지혁을 알기에 걱정되어 말했다.
뭔가 일을 저지를 거 같아서.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황 과장 발 아래 어지러이 떨어진 꽁초들을 보았다.
“과장님.”
“네.”
“평소에 운동 좀 하세요?”
“그냥 뭐······ 가끔 스쿼트 정도?”
흠······.
지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3차 세계대전은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른다고들 하죠. 핵무기일 수도 있고, 그 외에 어떤 최신형 무기가 있을지 모르죠. 무기는 계속 개발되고 있고, 워낙 많으니까.”
황 과장은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서 지혁을 바라봤다.
“4차 세계대전은 어떨 거 같아요?”
황 과장은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웬 4차야?’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지혁은 이어서 말했다.
“3차 세계대전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은 어떤 무기를 쓸지 예상할 수 있어요.”
“······.”
“아마 돌도끼 들고 싸울 거에요. 운 좋으면 칼자루라도 챙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
꿀꺽.
뜬금없고 허무맹랑한 말인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상상이 아닌.
직접 본 사람이 전하는 말의 무게는 다르다.
“체력과 건강. 절대로 쉽게 보지 마세요.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황 과장은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갈게요.”
“네.”
황 과장이 이동한 후, 지혁은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선도물산 인사팀장.’
“여보세요? 인사팀장님. 잘 지내셨죠?”
[아이고~ 오 팀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인사팀장은 지혁을 여전히 팀장이라고 불렀다.
“하하. 네 오랜만이네요. 인사팀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오 팀장님 안 계시니, 선도물산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굴러가고 있습니다~ 아, 요즘 한 전무님이······.]
인사팀장은 갑자기 선도물산 현황보고를 하려 했고.
지혁에 대해서만큼은 매사에 열정인 그의 성향을 알기에, 말을 끊었다.
“네네. 그 얘기는 나중에 듣고요. 용건이 있어서 전화드린 건데.”
[네네~ 팀장님 말씀하세요.]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비서실장 강전철 전무라고 아세요?”
[비서실장님이요? 당연히 알죠~]
“잘 아세요?”
[잘은 모르죠~ 뵌 적은 없고, 유명한 분이라 이름 정도만 압니다.]
“그럼,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