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원흉 (1)
두근. 두근.
맥박이 빨라지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빠르게 도는 기분.
지혁은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 하며, 항상 냉정을 유지해 왔지만.
지금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안색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서실장이 원흉이라고?’
꽉 말아쥔 주먹에 손바닥이 패일 것 같았다.
오 회장이 아버지를 몰아낸 얘기를 들었을 때도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이해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해할 만한 건 없었다.
‘그냥 제 생각만 한 거지.’
“저······ 팀장님?”
인사팀장은 지혁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고,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
지혁은 생각에 잠겨 인사팀장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알아봐달라고 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런 지혁을 보며 인사팀장은 더 불안해졌다.
잠시 더 기다린 후.
한 번 더 지혁을 불러보려는데.
“인사팀장님.”
고개 숙인 채, 미동도 없던 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고.
“네?”
인사팀장은 놀라서 대답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요?”
“······.”
인사팀장이 눈을 멀뚱거렸다.
‘어디까지?’
지혁은 자신의 출생 비밀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인사팀장은 질문의 의미를 고민하다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서, 알아봤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게 있다면 추가 조사를······.”
지혁은 인사팀장의 말을 끊었다.
“오종원 이사. 그다음은요?”
“네?”
“그다음은 뭐냐고요. 얘기해 보세요.”
인사팀장이 아직 모를 수도 있기에 풀어서 얘기할 수는 없었고.
그럴수록 인사팀장은 아리송했다.
‘오종원 이사에 대해 더 알아보라는 의미인가?’
“죄송합니다. 오종원 이사님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습니다.”
“······.”
“바로 그분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를 더······.”
지혁은 손을 살짝 들며 말했다.
“아니요. 됐습니다.”
인사팀장의 당황한 모습을 봤을 때,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팀장님 지금 저한테 솔직하게 얘기하고 계신 거죠?”
“물론이죠.”
“장난하시면······ 큰일 납니다.”
중요한 사안이기에 지혁은 약간 협박성으로 말했고.
꿀꺽.
인사팀장은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지혁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침착해야 해. 일어난 사실은 받아들여.’
흡- 휴우-
인사팀장은 심호흡하는 지혁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다음, 지혁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일단, 하나씩 짚어보자.’
“인사팀장님.”
“네? 아, 네!”
한동안 넋 놓고 있던 인사팀장은 지혁의 부름에 놀라서 대답했다.
“회장님이 오 부회장 승계에 대해 집착한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장자권 때문이라고요?”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 말은 탐탁지 않아도, 장남이라는 이유로 오 부회장을 지지한다는 걸까요?”
인사팀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오 회장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
“인사팀에만 10년을 넘게 있었습니다. 사람 행동을 좀 볼 줄 아는데, 호감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습니다. 직접 챙기죠.”
지혁은 묵묵히 인사팀장의 말을 들었다.
“네 명의 자식들 중에, 유독 오 부회장님에게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도움을 주셨거든요. 심지어 질책조차도 안 하고 키우셨다고 합니다. 이건 거리를 두는 거거든요.”
지혁은 인사팀장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부회장님에 대한 집착은 애정이 아니라, 회장님 자신의 문제 때문이라고 봅니다. 과정이 기형적인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지혁은 방금 얘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회장님의 오 부회장에 대한 집착은 애정이 아니라는 건데······.’
인사팀장의 의견은 추측에 가깝다.
하지만, 어쨌든 냉정하게 전체 상황을 보면, 틈이 있는 것이다.
“그 기형적인 이유가 자신의 후계과정과 관련이 있고, 그 일에 오종원 이사라는 분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거죠.”
후계 자리가 바뀔 수 있는 틈. 지혁은 지금 그 가능성을 살짝 봤다.
“네, 맞습니다.”
“근데, 왜 선대회장님은 막내인 오종원 이사님을 총애하셨고, 오 회장님은 왜 그분을 경계하셨을까요?”
인사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일 잘하시고, 평판도 좋으셨기 때문이겠죠. 원로분들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과연, 그 이유 때문만일까요?”
지혁은 다시 한번 인사팀장을 확인했다.
오종원 이사가 오 회장의 배다른 동생이며, 지혁의 아버지인 걸 알고 있는지.
인사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 말고 무슨 이유가 더 있겠습니까?”
“······.”
지혁은 대답 않고 물끄러미 인사팀장의 눈을 바라보았고.
인사팀장은 멀뚱거리며 지혁을 바라보다가.
‘눈빛이 너무 싸한데. 내가 뭐 또 말실수했나.’
본능적으로 눈을 깔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확실히 더 알아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비서실장님에 대해 집중하느라 주변 인물을 자세히 알아볼 생각은 못 했습니다.”
인사팀장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종원 이사님 행방과 가족관계, 자제분 등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
“그분 조사는 하실 필요 없고요.”
이제부터는 지혁이 직접 나서볼 생각이었다.
“만나셨던 원로분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
인사팀장과의 대화는 꽤 길어졌고.
회사를 나선 지 2시간쯤 지나, 인사팀장과 헤어져 카페를 나섰다.
오후에 의전 일정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잡은 약속이었다.
4시에 비서실 전체 언론인터뷰 관련 브리핑이 있는데, 오 회장이 참석한다.
그 시간에만 늦지 않게 도착하면 된다.
선도본관 27층.
지혁은 황 과장에게 연락한 후, 바로 미팅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여어~ 오 차장~”
어디선가 상냥한 목소리가 지혁을 불렀다.
‘젠장.’
비서실장이었다.
하필, 감정이 고조되어 있을 때,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보게 됐다.
“언론인터뷰 브리핑 가나?”
“네.”
“하하, 그래. 같이 가지.”
언론 인터뷰는 언론사로부터 예상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한다.
지면과 TV로 봤을 때는 단순해 보이지만, 꽤 많은 전략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보 공개를 어디까지 할건지, 어떤 어조로 말한 건지, 넥타이 색은 어떤 거로 할건지, 손에 펜을 들고 할건지, 종이를 들고 할 건 지 등 신경 쓸 게 많았다.
그 중요성 때문에 관련자들은 사전에 모여서, 브리핑 회의를 진행한다.
“자네 뭐 안 좋은 일 있나?”
비서실장 특유의 초승달 눈매로 웃으며 지혁에게 물었다.
“아니요. 없는데요.”
“안 좋은 일 있구먼. 말투가 쌀쌀맞아.”
“원래 이래요.”
비서실장은 부하 직원의 버릇없는 말투도 웃으며 넘겼다.
“웃으며 하자고~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스트레스받지 말고~”
사람 좋은 모습을 볼수록, 지혁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알고 나니······ 꼭 놀림당하는 거 같네.’
비서실장의 실체를 알기에, 이런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분 상한 만큼 비서실장의 기분도 안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아니다. 참자. 아직은 의미 없다.’
비서실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칼날을 들어냈다가 역공격당할 수 있으니까.
‘자신을 잘 숨기는 인간은 조심해야 해.’
지혁은 계속 마인드 컨트롤하며, 비서실장의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했다.
회의 시작 5분 전.
비서실장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도착해 있던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비서실장에게 인사했다.
“허허. 모두 앉게~”
비서실 직원들은 앉으려다가, 뒤에 따라 들어온 지혁을 보고 다시 일어섰다.
그중 의전팀장도 있었는데.
‘나 왜 일어섰지.’
***
투다닥.
회의실 밖에서 여러 사람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오셨나 보군.’
오 회장은 항상 많은 사람을 대동하고 다닌다. 그래서 등장하기 전에는 분주한 인기척이 꼭 들린다.
덜컹.
회의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지원팀장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오 회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지혁은 오 회장을 유심히 보았다.
‘오늘도 중절모를 쓰고 있군.’
오 회장은 속 알 머리가 빠지던 60대부터 항상 중절모를 쓰고 다닌다.
실내에서도 웬만하면 모자를 잘 벗지 않아서, 그의 이마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큰 의미 없으니까.’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앞으로 나와서 발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팀 홍지원 팀장입니다. 고려일보 인터뷰 건 관련하여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고려일보 특집 기사이며, 일간신문 2면에 게재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분량은 1페이지 전체 혹은 2페이지까지도 실릴 수도 있습니다. 담당 기자는······.”
발표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인터뷰 사전 설명을 했고.
이 미팅이 처음인 지혁은 많이 놀랐다.
‘고려일보가 선도그룹 자회사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정보까지 알 수 있지?’
맘만 먹으면 오 회장 입맛대로 기사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 발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내용은 완벽했다. 군더더기 없었으며, 정보 공개 수준도 적절해 보였다.
“홍 팀장님.”
비서실장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직원들에 대한 내용이 너무 없는 거 같은데요.”
“······.”
“회장님이 직접 나서서, 우리 그룹을 홍보할 기회잖아요.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는 점에 대한 내용이 인터뷰에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요?”
홍 팀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선도그룹은 연봉이 높은 편이지만, 대기업치곤 복지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현장 근로자들에 대한 산재 관련 이슈가 있었다.
“좀 민감할 수 있는 내용도 있어서, 해당 주제는 최소화했습니다.”
“민감하다니요? 뭐가요?”
비서실장이 웃으며 물었고.
홍 팀장은 오 회장 앞에서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비서실장이 말했다.
“우리 회사가 직원들에게 정말 잘해주잖아요?”
“······.”
“국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풀어드리면 좋다고 보거든요?”
비서실장은 오 회장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는 말했다.
“사실 우리 회사처럼 일하기 좋은 회사가 어디 있습니까? 안 그래요?”
회의실 뒤쪽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요.”
갑자기 회의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사람들은 일제히 대답이 들린 곳을 바라봤고.
모두의 시선이 지혁에게 향했다.
“뭐라고?”
비서실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지혁에게 물었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렇다고요. 비서실장님, 정말 몰라서 물으세요?”
“······.”
“회장님께 거짓말을 하라는 건가요? 전 국민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