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15화 (115/301)

115. 원흉 (2)

“뭐가 어째?”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던 비서실장.

잠시, 지혁의 도발에 눈꼬리가 올라가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에이~ 무슨 소리야. 하하.”

“······.”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봤다.

‘비서실장님이 저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구나.’

웃고는 있지만, 아직도 비서실장의 어금니 근육이 계속 불끈불끈했다.

‘숨기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

지혁은 비서실장의 진짜 얼굴을 본 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산재 때문에 뉴스에도 몇 번 나왔었고, 우리 회사 업무 강도가 센 건 다 아는 사실인데.”

“······.”

“인터뷰에서 굳이 불리한 얘기를 꺼내서,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자고요?”

지혁은 비서실장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직원들이 일하는 걸 좋아한다는 근거가 뭡니까?”

비서실장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지혁은 몰아세웠다.

“말씀해보세요. 근거가 있으니 하는 얘기 아닙니까?”

비서실장과 지혁의 대치.

선도본관의 대표 선수와 선도물산의 대표 선수가 맞붙은 상황.

회의실 안 분위기는 팽팽해졌고.

오 회장은 별다른 제지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근거?”

비서실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근거가 없을까? 그리고 필요하면 만들면 되는 거잖아?”

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비서실장을 바라봤고.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자네 생각하는 게 참 독특하군. 그걸 정직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 조직이 잘 되고, 오너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옳은 길이야. 그게 정의이자 정직이라고.”

지혁은 황당함에 잠시 말을 잃었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혁은 오 회장을 보며 말했다.

“전 국민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고, 어디서나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

“기업 경영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입니다.”

지혁은 비서실장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생존을 위한 필수라고요.”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누구에게나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뭐? 근거는 만들면 돼? 오늘만 사나? 본인 회사 아니라는 건가?”

꿈틀.

비서실장 이마의 핏줄이 꿈틀거렸고.

오 회장의 표정도 굳어졌다.

지금 상황은 여러모로 지혁에게 유리했다.

여러 직원이 모여 있는 공개적인 자리이며, 최고 직급자는 비서실장이 아니라 오 회장이다.

상황 자체가 비서실장의 운신의 폭을 좁게 했다.

그렇다고 임원 직급 체면에 지혁처럼 달려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서실장은 어쩌지 못했고.

그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려 할 때쯤.

“오 차장, 자네 입조심 해야겠는데.”

오 회장이 나섰다.

***

“말을 상당히 거슬리게 하는군.”

훅-

몇 마디 말 안 했는데.

느낌이 달랐다.

‘무게감이 다르네. 기업 총수라 그런가.’

오 회장의 몇 마디에, 회의실은 안은 얼어붙었고.

비서실장도 고개를 숙였다.

“오 차장.”

“네.”

“비서실장이 누군가?”

“······.”

“누구의 비서실장인가?”

“······.”

“할 말이 있어도 예의를 갖춰야지. 여러 사람 앞에서 지금 뭐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지혁은 곧바로 사과했다.

이유야 어쨌든, 오 회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오 회장도 비서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확실히 감싸주는 게 있네.’

지혁은 오 회장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비서실장.”

“네, 회장님.”

오 회장은 비서실장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다가.

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아닐세. 자넨 끝나고 따로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오 회장은 스크린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발표자를 보았다.

“홍 팀장이라고 했던가?”

“네! 맞습니다.”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팀의 홍지원 팀장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좀 전에 비서실장과 오 차장 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네?”

홍 팀장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뭘 말씀하시는 거지? 왜 이런 난감한 질문을 하필 나한테.’

오 회장은 다시 얘기했다.

“다른 건 제쳐두고, 두 사람이 나눴던 업무 얘기에 대해서만 말 해보게. 선도그룹 직원 처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 말일세.”

“······.”

“담당자로서 소신껏 얘기하면 되네. 난 그런 거 좋아하니까.”

오 회장은 이 말을 할 때, 지혁을 살짝 바라봤다.

좀 전에 싫은 소리를 했었으나, 지금 그를 보는 시선은 꽤 부드러웠다.

홍 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그 부분은 아까 발표할 때 말씀드린 대로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홍 팀장은 일부러 비서실장 쪽은 보지 않았다.

“오 차장님의 의견과 같습니다. 사내 설문 조사 및 업무 만족도를 봐도 대기업군에서는 평균 이하입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꿋꿋이 말했다.

“그나마 장점이 높은 연봉 수준인데, 인터뷰에서 그 얘기를 하기는 껄끄럽습니다. 국민께 괴리감을 안겨드릴 수도 있거든요. 회사 입장에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럼 직원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말자고?”

홍 팀장이 대답했다.

“성과보다는 비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

“괜찮으시다면, 비전을 얘기하시기 전에 부족했던 점을 먼저 말씀해주시면 국민들께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갈 것 같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홍 팀장을 바라봤다.

지혁도 놀랐다.

‘용기 있네?’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홍 팀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홍 팀장의 설명에, 회의실 사람들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나.

딱 한 사람. 비서실장의 얼굴만 굳어 있었다.

“흠······.”

오 회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바로 말했다.

“그래. 자네 의견에 따르겠네. 홍 팀장은 세부안 완성되는 대로 나한테 대면보고 하게.”

“네?”

홍 팀장은 놀라서 회장님을 바라봤다.

임원도 아닌 직원이 오 회장을 독대하여 대면보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비서실장을 통해서 한다.

“못 들었나?”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겁먹지 말고. 지금처럼 하면 돼.”

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 마치지. 비서실장은 나 따라오고.”

“알겠습니다.”

덜컹.

두 사람이 나가는 문소리가 들린 뒤.

휴-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지혁이 홍 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홍 팀장은 지혁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차장님.”

지혁은 꽤 멋진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합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 주세요. 제가 힘이 되어 드릴 테니까.”

홍 팀장은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대답했다.

“네! 차장님.”

***

회의가 끝난 후, 지혁은 황 과장과 함께 아지트로 갔다.

휴우-

황 과장은 오자마자 담배부터 물었다.

지혁도 캔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황 과장이 물었다.

“오 차장님은 언제 그런 걸 알아보셨데요?”

“뭘요?”

“직원 설문 조사, 업무 만족도 같은 거.”

“안 알아봤는데요.”

황 과장은 눈을 끔뻑였다.

“네? 그럼 아까 회장님 앞에서 말한 건 뭐예요?”

“말에 힘이 실리려면 전문성 있어 보이는 게 좋으니까, 살짝 갖다 붙인 거죠. 제가 인사팀도 아니고, 그런 걸 뭐하러 알아봅니까.”

“······.”

“회사 다니면서 직원들 얘기도 들리고 표정도 보이는데. 뻔하잖아요. 보나 마나 실제로도 그렇게 나왔을 거 같은데.”

실제로 선도그룹은 올해 업무 만족도는 대기업군 상위 55%로, 평균에 못 미쳤다.

‘순발력과 센스는 진짜······.’

“참······ 많이 배웁니다.”

황 과장은 다시 한번 지혁에게 탄복했다.

“별말씀을.”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황 과장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었다.

“근데······ 차장님.”

“네.”

“이제 시작하는 거죠?”

“······.”

비서실장을 내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는지 물은 거였고.

지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했다.

“좀 급하지 않아요? 온 지 얼마 안 됐고, 그룹 비서실장이면······ 너무 위험한 상대 같은데.”

“뭐, 언제는 안 그랬나요. 필요한 일은 망설이지 말고 하는 거죠.”

선도물산에서도 지혁은 마음을 먹었을 때, 망설이지 않았다.

황 과장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분명 그때와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번엔 좀 다르잖아요.”

“네?”

“저야 오 차장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만.”

“······.”

“직원들이 비서실장을 빌런으로 인식을 못 해요. 오히려 좋은 상사로 보고 있죠.”

황 과장은 이전에 지혁이 상대했던 대상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말해주었다.

선도물산에서 지혁이 내쳤던 사람들은 명실상부한 암적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주변인의 시각에서는 말이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정성 들여 포장을 해왔는지.

그를 따르는 직원들이 많았고, 심지어 멘토로 삼으며 존경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아무런 득 본 것도 없고, 비서실장에게 이용만 당했으면서도 말이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회의실에서 오 차장님이 비서실장님 몰아세울 때, 직원들 표정 진짜 안 좋았어요. 아랫사람이 입바른 소리 하면,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데.”

지혁은 이 말에 피식 웃었다.

“몰아세우는 거로 보였어요?”

“네? 아, 네.”

“그럼 됐네요. 비서실장에게 인식이 됐겠네.”

비서실장이 자신을 쉽게 보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조심할 거고, 지혁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

“직원들의 인식은 걱정하지 마세요.”

“······.”

“곧 바뀔 테니까.”

지혁은 살짝 웃었다.

***

주말. 토요일 오전.

지혁은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일찍부터 어디가?”

“어, 잠깐 회사일 때문에.”

수아는 가자미눈을 뜨고 말했다.

“어째 좀 잠잠하다 했다. 자기는 왜 그렇게 회사 일을 열심히 해?”

지혁은 잠시 생각했다.

‘회사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주말엔 좀 쉬어~”

어쨌든 주말에 함께 시간 보내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중요한 일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 금방 올 거야.”

수아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여자는 아니겠지?”

전철을 타고, 약 1시간 뒤.

지혁은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내의 정자에서 노인을 만났다.

‘前 부회장 노규일’

인사팀장에게 소개받은 선도그룹 원로.

수수한 옷차림에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8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을 보았다.

‘부회장씩이나 했어도 나이 들면 똑같구나.’

지혁은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지혁은 그를 선도그룹 전 직책인 ‘부회장’으로 불렀다.

“그래, 반갑네.”

후배인 데다가, 워낙 나이 차이가 크다 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연락드렸던 선도그룹 비서실 오지혁 차장이라고 합니다.”

“흠······.”

노 부회장은 지혁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뱉었다.

“듣던 대로 많이 닮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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