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구세력
“닮아요?”
지혁의 물음에 노 부회장은 회한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자네, 오종원 이사 아들 아닌가?”
“······!”
지혁은 많이 놀랐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어머니와 선도물산의 한 전무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한 전무에게 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왜? 놀랐나?”
“······.”
지혁은 좀 전에 그가 닮았다고 말하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듣던 대로’
그건 분명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는 거였다.
“부인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인할 이유가 있나. 딱 봐도 누구 아들인지 알겠구먼.”
지혁은 오랜 세월을 견딘 노 부회장의 깊은 눈빛을 바라봤다.
“출처가 어딥니까?”
“······.”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노 부회장은 지혁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대답 않고,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외모는 닮았지만, 성향은 완전 반대로군. 오 이사에게 이런 사나운 눈빛은 없었지.”
“제 질문 들으셨습니까?”
지혁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숨겨야 해. 아직 신분이 드러나서는 안 돼.’
특히, 오 회장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유대 관계가 약해. 그렇다고 결정적인 약점을 잡은 것도 아니고.’
노 부회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말할 수밖에 없겠군.”
“······.”
“노인네가 입이 방정이지. 괜한 소리를 해서······.”
노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최 부회장한테 얘기 들었네.”
“······!”
지혁은 눈을 부릅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았지?’
“누군지 알지? 현재 미래기획실장.”
“······.”
“내 후임자이기도 하지.”
‘후임자? 그러면 은퇴하기 전까지 이분이······.’
최 부회장이 미래기획실장을 맡은 건 꽤 오래전 일이었고.
그전까지 노 부회장이 미래기획실장을 맡았었다.
지혁이 입사하기 훨씬 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있었던 일.
‘부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은 알았지만, 미래기획실장까지 했을 줄은······.’
노 부회장이 달리 보였다.
미래기획실장은 오너가 아닌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네. 최 부회장도 오 이사와 함께 일했었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이라 자네를 쉽게 알아봤을 뿐이니까.”
“······.”
“뭐, 꼭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 어쨌든 둘은 경쟁자였으니까.”
노 부회장은 말을 뱉고 나서,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지혁은 혼란스러웠다.
일단, 최 부회장에 관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노 부회장을 만난 목적에 집중했다.
“부회장님.”
“얘기하게.”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잘 알지. 맨날 보던 사이였는데.”
지혁은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버지와 오 회장의 사이가 궁금합니다.”
“사이?”
“네, 두 분이 형제 관계인 건 아는데. 형제가 사이가 꼭 좋으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지혁은 뼈 있는 말을 했고, 노 부회장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아나 보군.”
“······.”
“그래, 자네 아버지는 오 회장에 의해 내쳐졌지. 그건 사실이야.”
“······.”
“하지만.”
노 부회장은 지혁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둘이 사이좋았네. 우애 좋은 형제 사이였어.”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애가 좋았다고?’
“그 누구도 배다른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자네 아버지가 오 회장을 참 잘 따랐어.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났으니까.”
“······.”
“오 회장이 오 이사를 잘 챙기기도 했고. 때로는 아빠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노 부회장이 지혁의 가족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사이가 좋았다면서, 왜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걸까.’
그 의구심에 대해서도 노 부회장이 곧 설명해주었다.
“다만, 순리를 벗어난 일이 비극을 낳았지.”
“······.”
“선대회장 탓이야.”
휴-
노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움켜쥐려는 자에게서 뺏으려 했고, 가지지 않으려는 자에게 떠밀었지.”
“······.”
“노인네가 제 뜻대로 하려고 난리 치다가, 이런 사달이 난 거야. 노인은 노인다워야 해. 그 나이에 뭘 자꾸 하려고. 쯧쯧.”
지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듣기만 했다.
“그게 선대 회장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실수인데, 여파가 꽤 컸지.”
“······.”
“오 회장 딴에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당연히 그가 밉겠지만······.”
노 부회장은 고개 숙인 지혁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아버지는? 잘 계시나? 회사 나간 뒤로 전혀 소식을 모르네.”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노 부회장은 긴 탄식 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자네 지금 뭔가 꾸미고 있지?”
“······.”
“며칠 전에 선도물산 인사팀장이란 자가 왔다 갔는데. 어찌나 꼬치꼬치 캐묻던지.”
지혁은 열정적인 인사팀장을 떠올렸다.
“요즘은 회사가 좀 한가한가? 근무 시간에 뒷조사나 하고 다니게?”
“꽤 중요한 회사일 일입니다.”
“비서실장 내치는 게 왜 회사에 중요한 일인가?”
.
.
.
.
노 부회장은 단숨에 핵심을 파고들었고.
지혁은 흠칫 놀랐다.
‘괜히 부회장 출신이 아니군. 통찰력이 굉장한데.’
“그거 개인적인 복수 아니야?”
“······.”
“비서실장이 회사에 뭘 잘못했는데? 비서실이 잘 안 돌아가나? 아니면 오 회장과 소통이 잘 안 되나?”
개인적인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부류의 인간은 조직에 해가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직원들을 기만합니다.”
“······.”
“그리고 철저히 본인 생각만 하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긴다면 조직이고 뭐고 내팽개칠 사람입니다.”
지혁은 노 부회장이 비서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비서실장이 두 형제 사이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아시잖아요.”
두 형제는 오 회장과 오종원 이사를 말한 거였고.
노 부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만으로도 내쳐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벌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죠.”
회사의 주요 인재들을 내보내고, 그룹의 조직을 흔들었던 일.
당시에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큰 일이었다.
“그래.”
노 부회장은 수긍했다. 그리고 지혁의 의견을 지지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약점 좀 알려주십시오.”
지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비서실장을 오래 봐온 것 같고, 조직을 잘 아는 분이니 뭔가 있을 거야.’
“그런 거 없어.”
“······.”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속내를 잘 숨기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야.”
“정말 없습니까? 조금도요?”
지혁은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기 관리가 철저한 비서실장이라고 해도······.
“글쎄.”
노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좋은 이미지를 쌓으려 노력한다는 거.”
“······.”
“왜 그런 걸까? 그걸 한번 생각해 보게.”
지혁은 방금 노 부회장 한 말을 곰곰이 씹었고.
그러다가, 눈을 번쩍 떴다.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쓴다는 것.’
“그 정도밖에 없겠군.”
약점을 숨기기 위해, 강점을 만드는 것.
즉, 비서실장에게서 강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취약점일 수 있다.
노 부회장의 한 마디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지혁은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할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도 중요해.”
노 부회장은 손으로 자신의 행색을 가리킨 후 말했다.
“어차피 다 끝나.”
지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다 끝난다는 거.
누구보다 지혁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거였다.
“네, 그래도 아는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
“최 부회장님께는 제가 찾아온 거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 뭐,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덕분에 옛날얘기하고 즐거웠네.”
“네, 그럼.”
지혁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노 부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네.”
“······.”
“자부심 가져도 돼.”
***
고려일보 언론인터뷰 날.
의전팀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국내 최대 신문사의 특집 인터뷰다.
선도그룹 총수. 오종건 회장의 정말 오랜만의 언론 나들이라 매스컴에서 관심이 많았다.
의미가 있는 의전행사인 만큼, 의전팀에서는 빈틈없이 준비했고.
미래기획실의 주요 직책자들도 동석했는데, 최 부회장까지도 따라나설 정도였다.
“와······ 이거 긴장되네요.”
고려일보 정문에서 대기 중이던 황 과장이 지혁에게 말했다.
“그룹이 다 나설 정도라니······.”
지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 후. 오 회장의 차가 정문 앞에 도착했고.
앞뒤로 선 차에서, 검은 정장의 남성들이 우르르 먼저 내렸다.
그중 한 사람이 뒷문을 열어주자, 오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찰칵! 찰칵!
정문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기자들은 난리였다.
오 회장이 공식적인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워낙 희귀한 일이라.
“잠시만요! 잠시만요!”
경호팀이 기자들을 밀치며 이동 공간을 확보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조금 움직이다가, 인파에 밀려 나아가지 못했고.
오 회장은 지원팀장에게 한마디 하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다시 들어가?
-우리가 너무 심했나?
-심할 게 뭐 있어. 그냥 사진 찍은 거지.
지원팀장이 지혁에게 다가왔다.
“오 차장.”
“네.”
“회장님이 부르시네. 에스코트 좀 해달라고.”
의전팀장은 황당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뭐야? 이제 대놓고 경호야?’
황 과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의전팀에 혼자 남게 되는 거 아니야? 안 되는데.’
어쨌든, 오 회장의 지시.
똑똑.
곱지 않은 시선을 뒤로 하고, 지혁은 차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모시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찰칵. 찰칵.
오 회장이 다시 차 밖으로 나오자, 기자들은 셔터를 눌러대었으나.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비키세요!”
지혁의 사자후에 셔터 소리가 멈췄다.
“다칩니다! 비켜요!”
지혁은 앞장서서 평형을 하듯 양손으로 사람들 사이를 갈랐고.
홍해 바다 갈라지듯, 인파 가운데가 쫙 뚫렸다.
-아오. 아파!
-살살 좀 해요!
-체격도 크지 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힘이 세?
체격의 크기와는 상관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단련된 지혁의 기세는 일반인들과 확연히 달랐다.
오 회장은 지혁의 뒤만 쫓아갔다.
“고맙네.”
“아닙니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요.”
“······.”
맞는 말이지만, 그룹 회장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피식.
하지만 오 회장은 웃었다.
그의 눈에는 이런 지혁의 말과 행동이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졌다.
한번도 이런 직원은 본 적이 없으니까.
신문사 안으로 진입.
오 회장은 지혁에게 의지하여 걸어갔다.
경호팀은 오 회장의 측면과 후면을 경호했고.
전방은 오로지 지혁 혼자 밀면서 갔다.
더 깊숙이 들어갔을 때쯤.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어? 저 사람 지난번에 한 손으로 괴한 때려잡은 사람 아니야?
-맞아. 경호팀으로 발령 난 건가?
-자, 잠깐. 팍스버거 콜라보 센세이션 일으켰던 그 오지혁 사원 같은데.
술렁이던 분위기는 어느 한 기자의 말에 정점을 찍었다.
-홍썬라인 대박 내서 인터뷰했던 사람이잖아!
-그게 다 동일 인물이라고?!
찰칵! 찰칵!
그때부터.
오 회장에게 더는 경호가 필요 없었다.
기자들이 지혁에게 몰려들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