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받은대로
-오지혁씨 맞죠?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비서실? 부서이동을 하신 건가요?
기자들은 가장 앞에서 경호하고 있는 지혁에게 몰려들었고.
함께 움직이던 경호팀, 앞서가던 비서실 등 모두가 황당한 눈길로 이 상황을 바라봤다.
누구보다도.
지혁이 가장 황당했다.
‘갑자기 뭐야 이게.’
더는 오 회장의 경호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자신을 지켜야 할 상황이었다.
-오지혁씨! 젊은 회사원들의 롤모델인 거 아시나요?
-고려일보에서 특집기사 나간 이후에 후속기사 요청이 많이 들어왔었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시간 좀 내주시죠!
지혁은 오 회장을 바라봤다.
“······.”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다지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이 상황은 마치, 인기 가수가 오랜만에 컴백 스페셜을 하는데.
관객들이 가수 말고, 백댄서에 집중하는 것과 비슷했다.
가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걸 어쩐다.’
지혁은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며,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일하는 중이잖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지혁을 오 회장과 경호팀을 바라봤다.
“지금 빨리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세요. 기자들이 저를 집중하고 있으니까.”
멀뚱거리는 경호팀장에게 지혁이 소리쳤다.
“어서요! 제가 미끼가 될 테니까, 빨리 가시라고요.”
경호팀장은 지혁의 말을 생각했다.
‘미끼? 이 상황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군사작전 하는 것도 아니고.’
지혁은 오 회장에게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어······ 그래.”
오 회장은 지혁의 이런 태도가 의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이 쓸데없는 비장함 뭐야.’
하지만 지혁은 진지했다.
다급한 상황에 놓이니, 몸에 밴 말투가 나온 거였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황을 이용한다.’
생존에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다.
지혁은 경호팀장에게 호통쳤다.
“뭐 하세요? 회장님 모시고 빨리 이동하시라니까.”
“아, 알았어요. 회장님! 이쪽으로 가시죠.”
기자들이 오 회장 이동하는 쪽으로 시선이 가려 하자.
지혁은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짧게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궁금한 거 물어보세요!”
찰칵! 찰칵!
지혁의 주변에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아니, 오 차장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의전팀장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곧 있으면 인터뷰가 시작되는데, 의전팀원들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황 과장에게 사정 설명은 들었지만······.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의전하러 왔다가 의전 당하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황당했다.
오 회장도 지혁이 신경 쓰였다.
어쨌든 스스로를 희생해서 이동할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희생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어쨌든.’
“장 팀장.”
오 회장은 의전팀장을 불렀다.
“네! 회장님.”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오 차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팀원까지 신경을 써주시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알겠습니다. 황 과장.”
“네, 팀장님.”
“로비로 가봐. 아직도 둘러싸여 있으면 끌고라도 와. 기자들이 이 안까지는 못 들어올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황 과장이 막 세트장을 나서려는데.
저벅. 저벅.
지혁이 들어오고 있었다.
넥타이도 약간 풀려있고, 아주 피곤한 얼굴이었다.
“좀 늦었습니다.”
“······.”
세트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 지혁을 주시했다.
의전팀장은 다가가 지혁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괜찮나?”
“네.”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멀리서 피디의 큐 사인이 들렸다.
[회장님 스튜디오 중앙에 앉아 주시고요. 전 스태프 스탠바이 해주세요! 5분 전!]
카메라 불이 켜지자, 홍 팀장은 재빨리 피디에게 다가갔다. 영상 촬영은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었고, 오 회장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지혁은 세트장 안을 살피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늦었나?”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최 부회장이었다.
“부회장님도 오신 겁니까?”
“와야지. 회장님 언론 인터뷰잖아. 이게 다 기록이고 몇십 년이 가도 회자될 건데. 선도그룹이 어디 보통 회사인가.”
“······.”
선도그룹 원로인 노 부회장을 만난 이후, 최 부회장을 처음 만났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지.’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최 부회장을 대하는 게 조금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네 표정이 안 좋은데?”
“······.”
“무슨 일 있나? 술 한잔해야 해?”
‘술 한잔······.’
지혁은 최 부회장의 얘기는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최 부회장은 지혁이 현실 세계에 돌아온 후, 가장 수준 높게 보는 강자다.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해.’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하이~ 큐!]
최 부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하나 보군. 얘기는 끝나고 나눌까?”
“네, 그러시죠.”
카메라는 다 꺼져 있었고.
스튜디오 중앙에는 오 회장과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선임 기자가 앉아 있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오시는데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입구에서 좀 혼잡했었는데요, 우리 비서실 직원이 일을 잘해줘서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직원을 두셨네요. 우리 기자들 꽤 극성 맞는데. 하하.”
오 회장의 말에.
황 과장은 마치 자신이 칭찬이라도 들은 듯, 지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피디의 큐 사인과 함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오 회장님. 오늘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박 기자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도그룹은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대기업 아닙니까? 그리고 세계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죠. 최근 핸드폰 사업에서 피치(peach)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계시는데······.”
인터뷰는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오 회장은 예정대로 답변을 잘해 나갔다.
사전 질문을 알았던 데다가.
며칠간 여러 사람이 함께 철저히 준비했으니, 어찌 보면 못 하는 게 이상했다.
이렇게 순탄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
“얼마 전에 코엑스 가전 전시회 때 말입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즘.
기자는 약속에 없던 얘기를 꺼내었다.
“네.”
오 회장이 대답했다.
“회장님을 노리는 노동자들은 뭐였을까요? 그것도 신체에 위해를 가할 정도의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서요.”
“······.”
홍 팀장은 당황하여 피디에게 항의했지만, 피디는 기자를 막지 않았다.
“글쎄요. 그분들의 입장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우리 회사 분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뭐, 그분이 ㅇㅇ연대라는 건 저도 소식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현장에 꽤 많은 선도그룹 노동자들도 시위 중이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
“정말 그분들이 어떤 심정으로 회장님을 찾아왔는지 모르십니까?”
“······.”
“정말 모르신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기자는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오 회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고 답변 좀 해주십시오. 독자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건 이런 겁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직원들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는 잘 들었습니다만, 노동자들 처우에 대한 비전은 뭡니까?”
기자는 작정한 듯 덤벼들었고.
멀찍이서 보고 있던 지혁은 중얼거렸다.
“저 양반도 ㅇㅇ연대 출신인가.”
황 과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틀린 소리는 아니잖아요. 아무리 소수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선도그룹이 노동자의 소리에 둔감하긴 했죠.”
“그래도 여기서 할 소리는 아니죠. 약속하고 온 자리인데.”
오 회장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멀찍이서 봐도 좌불안석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배다른 형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노 전 부회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를 닮은 오 회장.
그가 곤경에 빠진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도저히 못 보겠다.’
저벅. 저벅.
지혁은 스튜디오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엔 오 회장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인터뷰 중단해 주세요.”
지혁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스태프들은 일동 당황했다.
“회장님, 일어나시죠. 약속되지 않은 것에 응할 필요 없습니다.”
지혁은 다짜고짜 오 회장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무리 선도그룹이라고 해도, 정치인들도 눈치 보는 거대 언론사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인터뷰하던 기자는 지혁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어딜 감히! 당신 뭐야?”
지혁은 기자를 바라봤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내공이 있어 보였다.
“그럼, 당신은 뭔데?”
“뭐?”
기자는 당황했다.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반말하니.
지혁은 기자를 향해 말했다.
“난 받은 대로 응했을 뿐. 괜찮죠?”
“······.”
분명 기자가 흥분하여 먼저 말을 놨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정상인인가?’
각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였지만, 지혁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말 길게 하지 맙시다. 여기까지만 해요.”
오 회장은 지혁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기자는 소리쳤다.
“거기 안 서?! 어디 기자한테!”
지혁은 걸음을 멈추었고.
고개만 돌려 기자를 보았다.
꿀꺽.
맹수의 눈빛이었다.
수많은 취재를 해봤어도, 저런 눈빛을 마주해 본 적은 없었다.
‘회사원이라며? 무늬만 회사원인가?’
지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
“고려일보 성 상납 추문 건 제가 물어보면 답해줄 건가요?”
“뭐요?”
기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무엇이든지 간에, 서로 약속된 건 지키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자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
“필요하면 약속은 어겨도 되는 건가요?”
스튜디오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지혁이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사전 약속을 지키라는 거였고, 지키지 않았으니 그만하겠다는 거였다.
“회장님 가시죠.”
지혁은 오 회장과 함께 나가버렸고.
의전팀장은 난감한 얼굴로 고려일보 관계자들을 보았다.
‘젠장, 뒷수습은 누가 하냐.’
***
오 회장은 차에 탄 뒤, 창문을 열었다.
“오 차장, 오늘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아무래도 자네를 가까이 둬야 할 것 같군.”
허리를 숙이고 있던 지혁은 놀라서 차 안의 오 회장을 바라보자.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조만간 또 보세.”
붕-
오 회장 차가 출발했고.
지혁은 가버린 차를 보며 생각했다.
‘방금 엄청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짝짝짝.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자, 최 부회장이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착착 진행이 잘 되어가는군?”
“······.”
“이번 건 백 퍼센트 의도한 건 아닌 것 같긴 한데 말이야. 운도 따르고~ 하늘이 오 차장을 돕는구먼.”
“무슨 말씀이신지.”
지혁은 일부러 모른 척 말했고.
최 부회장은 대답 대신 웃으며 말했다.
“차 한잔할까? 나한테 궁금한 거 있지 않아?”
“······.”
“며칠 전에 노 전 부회장 만났잖아.”
흠칫!
지혁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고.
최 부회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