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실체
디자인실장의 표정이 복잡했다.
몇 번을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쉬는데, 힘들어 보였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어차피 전 오늘 이 일 때문에 온 거니까요.”
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상기시켜주었지만.
“아니에요. 빨리 끝내고 싶어요.”
“······.”
지혁은 다음 얘기가 궁금했기에 말리지 않았고.
디자인 실장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승진 교육과정 마지막 날 저녁에 참석자들과 강연자들 모두 어우러져서 만찬을 했거든요.”
“······.”
“만찬이 길어지면서, 끼리끼리 얘기하고 자리가 혼란스러워질 때쯤이었어요. 비서실장님이 다가오시더니, 바람 좀 쐬자고 하더라고요.”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지혁은 비서실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꽤 멋지게 하고 다니는 패셔너블한 사람이다. 그 나이와 직급에 어울리지 않게 앞머리까지 내리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왜 저러고 다니냐고 의전팀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헤어스타일은 수시로 바꾼다고 했었다.
“저는 뭐······ 상급자가 바람 좀 쐬자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죠. 제가 흠모하는 분이기도 했으니까.”
디자인실장은 살짝 홍조를 띠며 말했고.
지혁은 궁금하여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혹시 실장님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아, 네.”
디자인실장은 오십이 넘은 나이지만, 못 한 게 아니라 아직 안 했다고 대답했다.
‘할 생각은 있었나 보네. 아, 설마······.’
지혁은 혹시나 한 마음에 물었다.
“비서실장님은 결혼하셨겠죠?”
“아니요. 그분도 미혼이세요.”
“혹시, 갔다 온 건······.”
디자인실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혼이셨어요.”
지혁은 이 말에 실망했다.
‘젠장, 가족도 없어?’
적에게 가족이 없다는 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카드 하나가 없다는 거였다.
수아와 어머니의 존재가 지혁에게 있어서 힘이자, 유일한 약점이듯이.
“계속 얘기할까요?”
“네.”
디자인실장은 눈을 어렴풋이 뜨고, 기억을 더듬으며 얘기했다.
“비서실장님 따라서 밖으로 나오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
“이 회사에서 성공하고 싶냐고.”
‘어?!’
지혁의 입술이 떨렸다.
“본인이 성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이런 제기랄······.’
지혁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대신, 본인을 좀 도와줘야겠다는 조건을 드셨고요.”
이건 분명히.
지혁이 황 과장에게 처음 접근했을 때 했던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지혁은 비서실장. 두 사람의 행동은 어딘가 닮아있었다.
***
홍 팀장과의 대화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편한 기분을 느꼈었는데.
디자인실장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그 불편함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냥 똑같았다.
지혁이 황 과장에게 처음 접근했던 것과 비서실장이 디자인실장에게 접근했던 것.
장소와 상대만 다를 뿐.
똑같은 방식이었다.
‘왜 하필······.’
지혁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지만, 디자인실장은 눈치 못 했다.
그녀는 남의 감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갔다.
“저에게 선택권은 없었어요.”
“······.”
“지나고 생각해보니, 비서실장님은 이미 제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지혁은 얘기를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세 번째 눈’을 통해 황 과장이 흰색의 사람인 걸 알고, 거절 못 할 거라는 생각에 접근했던 게 컸었다.
“제 눈이 비서실장님을 계속 쫓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디자인실장은 피식 웃고 말했다.
“바보 같죠. 그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기뻤으니까. 비서실장님 같은 분이 절 선택해주셨다는 게.”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혁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근데, 성공하고 싶지 않은 회사원이 어딨겠어요? 안 그래요?”
맞는 말이었다.
지혁 또한 그 심리를 이용하여 황 과장에게 접근했었으니까.
그녀의 말들이 이상하게 비수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전 더 고민하지 않고 비서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승진 교육과정이 끝난 뒤 선도물산 디자인실로 발령받았죠.”
“디자인실장으로 발령받은 건가요?”
“네. 당시에 말들이 많았죠. 실장급 직책에 부장이 가는 경우는 잘 없는 데다가, 디자이너 출신도 아니며, 관계사도 달랐으니까요.”
부장이 실장을 맡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흔한 일은 아니었다.
“비서실장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전 열심히 일했어요. 얼마 되지 않아서 전 이사가 되었고.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죠. 아마 그분이 힘써주신 것도 있었을 거예요.”
“······.”
“비서실장님은 약속을 지켰죠. 누가 봐도 전 성공한 회사원이었으니까요. 사십 대에 임원이 되어 실장 직책을 맡고 있다면 꽤 괜찮은 거잖아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선도그룹에서 그 정도 커리어라면, 상위 1%의 성공한 회사원이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지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분명히 있었겠죠?”
“네.”
“······.”
“전 비서실장님의 눈과 귀가 되어야 했고. 선도물산에서의 중요한 포지션을 지키기 위해 계속 싸워야 했죠.”
디자인실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비서실장님이 오 부회장님 라인인 거 아시죠?”
디자인실장은 지혁이 비서실장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고 찾아왔다면, 모르는 게 없을 거로 생각했다.
“네.”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 못 믿어요. 홍 대표, 송 상무 등 오 부회장의 사람들이 선도물산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비서실장은 자신만의 사람을 심어놓은 거예요. 오 부회장이 짐작 못 하는 사람으로요.”
‘이중 첩자.’
비서실장은 아주 철저한 사람이었다.
“전 회사에서 비서실장의 장기 말이 되어버린 거고, 저 자신은 사라졌죠.”
“몇 년 동안요?”
“흠······ 한 7년 됐나?”
“그 긴 시간 동안 원치 않는 일을 해왔다고요?”
“네. 조금도요. 아주 조금도 원치 않는 일을요.”
디자인실장은 한이 맺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직무도 안 맞고, 남의 눈이 되는 삶도 싫어요. 그저 위안이 된 건 훌륭한 보수와 인정 말고는 없었어요.”
“말씀해보시지 그랬어요.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휴······.”
이 말에 디자인실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분은 저한테 너무 잘해주세요.”
“······.”
“특히, 이런 얘기할 타이밍을 잡고 있을 때는 더 잘해줘요.”
디자인실장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짜증이 나는데, 화도 못 내겠다는 거 아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든다니까요?”
디자인실장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이젠 지쳤어요. 어차피 돈 벌려고 회사 다니는 거고. 그냥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진짜 장기 말이 되어버렸네.’
지혁은 안타까웠다.
“다 말씀드린 거 같은데.”
“······.”
“제가 협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
이걸로는 안 된다.
적절한 때에 그녀가 직접 나서줘야 한다. 그래야 힘이 실린다.
“우선······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떤 설득이 있더라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디자인실장의 눈빛은 또렷해져 있었다.
“실장님 입장······ 이해됩니다.”
지혁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를 이대로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텐데.’
앞에 나서게 했다가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방법은 찾아가면 돼.’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선택은 디자인실장이 하도록 두자고 생각했다.
“7년이라고 하셨죠.”
“······.”
“그 시간을 생각해보세요. 이대로 가만 있기에······ 자신한테 너무 미안하지 않으세요?”
디자인실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감옥이나 마찬가지지 뭐예요. 자유의지 없이 살아온 건데.”
“내 탓이죠. 누구 탓을 하겠어요. 내가 미친 거죠.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냐고요.”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장님 탓이 아닙니다.”
“······.”
“그 인간이 그렇게 만들고 조종한 거예요. 그냥······ 당하신 겁니다.”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지혁은 명확하게 얘기했다.
“배려도 아니고, 내 사람도 아니에요. 계획적으로 당하신 거예요. 질 나쁜 인간한테요.”
“······.”
“이렇게 넘어가면 바보 되는 겁니다. 그 인간만 좋은 일 시키는 거예요. 돌려주셔야죠. 되갚아 주셔야죠.”
지혁은 눈빛을 빛냈다.
“저도 그놈한테 꼭 갚아 줘야 할 게 있거든요.”
“······.”
“함께 하시죠.”
디자인실장은 불안한 나머지 다시 손톱을 뜯었다.
지혁은 그녀의 망설이는 마음을 잡기 위해,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저 오지혁입니다. 아시잖아요.”
디자인실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고민했고.
지혁은 기다려주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선택이야. 더 밀어붙이지 말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녀가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고.
디자인실장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지혁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확신했다.
‘됐구나.’
***
디자인실장과의 대화는 꽤 길어졌었고.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었다.
‘반차도 썼고, 오랜만에 왔으니까.’
빨리 다음 단계를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10층 A 구역’
입사 후 최근까지 일했던 곳.
오랜만에 왔어도 눈감고 찾아갈 정도의 익숙한 복도를 걸으며, 업무 중인 동료들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말도 없이 가셔서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지혁은 부서 이동 전 마지막 날에 야근하며,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갔었다.
10층에서는 지혁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걸음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참······ 고맙긴 하다.’
같은 팀도 아니고 함께 일한 적도 없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생각했다.
‘홈그라운드가 다르긴 하네.’
어느새 지혁은 ‘상품기획 1팀’에 도착했고.
뭉클.
지혁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분 참 묘하네.'
피식 웃고는 문을 힘차게 열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우와~!
-오 팀장님이다!
-정진이한테 얘기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왜 이렇게 늦었어!
정 팀장, 문 대리, 손정진 세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온 지혁에게 달려갔다.
팔을 주무르고, 어깨를 토닥이고, 양손으로 악수하고.
다들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지혁 또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 팀장의 눈가에 물기가 살짝 보였다.
“지혁아······ 잘 지낸 거지? 보고 싶었다고.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어? 눈에 지금.”
지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정 팀장은 재빨리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미안해서 그래. 미안해서.”
“뭐가요?”
“팀장 해보니까 알겠더라. 네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
“너 팀장으로 있을 때 내가 더 도왔어야 했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관두고요. 우리 차나 한잔할까요?”
덜컹!
그때 거친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 사무실로 급하게 들어왔다.
“차는 무슨!”
윤 팀장이었다.
“다들 가방 챙겨! 나가자!”
시침은 이제 막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