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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22화 (122/301)

122. 지령 전달

“어딜 나가요?”

윤 팀장과 지혁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지혁의 물음에 윤 팀장이 말했다.

“반차 썼다며?”

“네?”

“손정진한테 들었는데?”

지혁은 손정진을 바라봤고,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참 빠르다.’

“휴가 썼으면 나가야지. 사무실에서 뭐 하게?”

“대화나 좀 하게요.”

윤 팀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씰룩거렸고.

지혁은 그 표정이 새삼 반가웠다.

‘옛 생각 나네.’

툭 하면 윤 팀장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 피우던 게 떠올랐다.

“맨입으로 대화하면 심심하잖아? 낮술 한잔해야지.”

“낮술이요?”

윤 팀장은 다짜고짜 사람들을 밀치며 말했다.

“아, 뭐해! 어서 나가자니까. 정 팀장! 우린 공식적으로는 외근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정 팀장은 웃으며 손으로 OK 사인을 보내며 말했다.

“네!”

오후 4시. 선도물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날씨가 참 맑았다.

“캬~ 날씨 좋다~ 낮술 먹기 딱 좋은 날이네~”

윤 팀장의 말에 손정진이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저 설렙니다. 대학생 때 이후로 낮술은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근무 중에······ 하하. 땡땡이치는 기분이라 더 좋은데요?”

근무 시간에 나왔지만.

정 팀장, 그리고 지혁이 함께 있으니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그냥 맘 편히 즐기면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혁은 못마땅했다. 낮술은 선호하지 않았다.

“뭔 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운동이나 좀 하다가 저녁에 마시는 게······.”

지혁의 입에서 ‘운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팀원들은 식겁한 얼굴로 걸음을 빨리했고.

윤 팀장이 빠르게 지시했다.

“정진아. 식당 예약한 거지?”

“지금 전화 걸고 있습니다!”

“오 팀장 말 못 하게 해라. 운동은 절대 안 돼.”

“네! 알겠습니다.”

한강공원에서 한번 데인 적이 있기에, 운동만큼은 피하려 했다.

***

순댓국집.

지혁을 배려해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 순댓국집으로 왔다.

“오 팀장은 아마 삼시 세끼 순댓국 먹여도 불만 없을 거야.”

윤 팀장의 말에 지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집 순댓국이면 가능하죠.”

잠시 후, 순댓국이 나왔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 아래.

상품기획 1팀은 막걸리가 채워진 잔을 부딪쳤다.

-지혁아~ 어서 와~

-앞으로 자주 좀 오세요!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잔을 부딪치며 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고.

지혁 또한 웃으며 말했다.

“반겨주셔서 고마워요. 황 과장님이 없어서 좀 아쉽네.”

손정진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황 과장님은 팀장님 매일 보잖아요.”

지혁은 어이없는 눈길로 손정진에게 말했다.

“너무하는데? 너 황 과장님이랑 친하지 않았냐?”

“친하긴 하죠.”

“안 보고 싶어?”

“남자끼리 남사스럽게 뭘 보고 싶고 그래요. 그냥 보게 되면 보는 거죠.”

지혁은 손정진을 이상한 눈으로 봤다.

‘근데, 나한텐 왜 이래?’

분명 손정진은 로비에서 지혁을 처음 봤을 때, 보고 싶었다고 난리를 쳤었다.

“팀장님 제가 한잔 따라 드릴게요.”

손정진은 지혁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잔을 채워주었다.

“어, 그래. 그 잔 따르고, 문 대리님이랑 자리 바꿔라.”

“네? 왜요?”

“그냥, 바꾸라면 바꿔.”

지혁은 정색하며 말했고, 손정진은 입을 삐죽이며 문 대리와 자리를 바꿨다.

술잔이 몇 번 더 돈 뒤.

지혁이 말했다.

“선도물산 소식 좀 들려주세요. 궁금해요. 한 전무님은 여전하시죠?”

한 전무와도 연락 안 한 지 꽤 오래됐다.

지혁이 한 전무 얘기를 꺼내자 팀원들 얼굴이 어두워졌고,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왜요? 뭐 있어요?”

지혁이 정 팀장을 향해 묻자. 그는 술잔을 털어 넣고 말했다.

“좋은 소리 안 나올 거 같아서. 자기 한 전무랑 친하잖아.”

“친하긴 하지만, 언제든 안 친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냥 얘기하세요.”

지혁은 정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가 가족도 아니고.

정 팀장은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요즘 선도물산은 완전히 한 전무님 세상이야.”

“달라졌나요?”

지혁은 간단하게 물었다.

홍 대표 쳐낸 지 이제 겨우 3개월 지났다.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없는데. 영업부를 너무 챙기셔.”

“······.”

“생산본부장, 인사본부장, 회계팀장 등 회사 주요 직책자들을 다 영업 출신으로 바꿨거든.”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생산본부장 같은 특수 부서까지도 영업 출신을 세웠다는 건 의외였다.

듣고 있던 문 대리가 말했다.

“최근엔 상품본부장도 바꿀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유 본부장을요?”

“네.”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송 상무 쳐내는 조건으로 약속받은 자리인데. 그걸 바꾼다고?’

천년만년 한 자리를 오래 지킬 수는 없지만, 유 본부장이 상품본부장 발령받은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오 사장 생각인가?’

한 전무가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앉힐 수는 있어도, 약속을 어기고 유 본부장 자리를 1년 만에 바꿔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정 팀장이 툴툴거렸다.

“오 팀장 가고 나서, 상품본부 완전 개털 됐어. 유 본부장은 자리 뺏길까 봐 눈치만 보고 있고.”

“······.”

“선도물산의 핵심부서가······ 이게 말이 돼? 그나마 윤 팀장님이 막아주셔서 인사권은 안 건드리고 있는데.”

정 팀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시간문제야. 한 전무님 그렇게 안 봤는데, 변한 거 같아.”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변했다기보다도······ 자리에 맞춰가는 거죠.”

“······.”

“그래서 경쟁자가 필요한가 봐요. 견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윤 팀장이 살짝 눈치를 보고 말했다.

“가기 전에 한 전무님 좀 보고 가면 안 돼? 오 팀장 얼굴 보면 정신 차리실 것 같은데.”

지혁은 빈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낮술 처먹고, 선도물산 대표 대행하는 분을 만나라고요?”

큭.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누가 웃었어?!”

윤 팀장은 민망한 나머지 험악한 얼굴로 물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지혁은 윤 팀장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 좀 들으세요. 낮술 먹지 말자고 했잖아요.”

“쳇.”

지혁은 정 팀장에게 말했다.

“정 팀장님.”

“어.”

“혹시, 한 전무가 유 본부장 바꿔버리면 그땐 저한테 알려주세요.”

“어쩌려고?”

지혁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술잔을 들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

오후 4시에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쌓인 얘기가 많기도 했고, 언제 또 만날지 모르기에 누구도 먼저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도 이렇게 만나기가 어렵다.

“윤 팀장님. 바람 좀 쐴까요?”

지혁의 말에, 윤 팀장은 담배를 챙기고 좋다고 따라나섰다.

“좋지!”

밖으로 나와 윤 팀장은 담배를 꼬나물었고.

지혁은 밤하늘을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술 많이 마셨어요?”

“적당히 마셨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술은 잘 마시잖아.”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다른 분들도 잘 지내죠?”

‘지혁라인’을 말하는 거였고, 윤 팀장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어, 다들 잘 지내. 도대체 뭔 짓을 해놨기에 그런 충성심을 보이는지. 내가 집합시키면 다들 칼같이 모인다니까.”

지혁은 선도물산을 떠나기 전, ‘지혁라인’을 모아놓고 윤 팀장을 자신처럼 생각하라고 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윤 팀장에게 물었다.

“좀 중요한 얘기할 게 있는데. 지금 괜찮아요?”

“뭔데. 말해 봐. 나 혀 안 꼬였잖아.”

“······.”

“나중에 전화로 말하는 거보다 지금이 나아. 나 술 안 취했어. 얘기해 봐.”

‘지혁라인’은 최소 경력이 15년 이상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홍 팀장이 알려준 ‘샤이 피플’들은 그룹 각지에 퍼져 있는 높은 직급의 사람들이다.

처음엔 혼자서 차츰 다 만나볼 생각이었으나, 경력 높은 ‘지혁라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요.”

“어 얘기해 봐.”

지혁은 비서실장에 관한 얘기를 살짝 하였고.

“뭐?! 그룹 비서실장을?”

윤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오 팀장······ 내가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느낀다.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하하.”

지혁은 윤 팀장의 말이 재밌어서 웃었고.

“웃음이 나와? 회사 관두고 싶으면 곱게 그만두지 왜 굳이······.”

윤 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혁으로서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사를 위해서, 그리고 지혁 자신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하아······ 참나.”

흔들림 없는 지혁의 모습을 보며, 윤 팀장을 한숨을 쉬었다.

“하긴, 회사 대표도 보내버렸는데, 뭐 놀랄 일도 아니지. 내 생각에 자기는 독립해서 회사 차리면 대박 날 거 같아.”

“어떤 회사요?”

“퇴사 청부 업체.”

윤 팀장 덕분에 심각한 얘기가 유쾌해졌다.

“하하. 내가 이래서 윤 팀장님을 좋아한다니까.”

“웃지 마. 더 정들기 싫어~”

지혁은 조곤조곤 지혁라인이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었고.

윤 팀장은 웃음기 싹 거두고, 집중하여 들었다.

***

다음날.

지혁은 선도본관에 출근하자마자, 황 과장부터 찾았다.

“황 과장님.”

“아, 차장님, 오셨어요? 어제 외근 갔던 일은 잘 해결됐어요?”

황 과장은 어제 지혁이 무슨 일로 선도물산을 갔는지 알고 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황 과장을 보며 지혁은 기분이 착잡했다.

“뭐든 도울 거 있으면 말씀만 주세요. 대기 중이니까.”

황 과장의 헌신적인 태도를 보며, 지혁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커피 안 드셨죠? 저랑 잠깐 어때요?”

“좋죠~”

아지트.

황 과장은 담배를 피우며 지혁의 얘기를 들었고, 너무 아쉬워했다.

“아~ 뭐에요. 저도 불러주시지. 그렇게 다 만나는 줄 알았으면.”

“어제 여자친구랑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자친구야 뭐, 다른 날에도 만날 수 있는 거니까요.”

“······.”

황 과장은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정정했다.

“물론 저에겐 여자친구가 가장 소중합니다. 김진아 씨한테는 비밀이에요.”

지혁답지 않게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황 과장님.”

황 과장은 이 모습이 의아하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침부터 안색이 안 좋으시더라고.”

‘나 또한 황 과장님을 가스라이팅 하는 거라면······.’

이젠 황 과장을 진심으로 생각하기에, 절대로 그런 일은 계속할 수 없었다.

“제가 과장님을 이용했던 거 같아요. 아니, 지금도요.”

“네?”

“기억하시나요?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에서 제가 조건을 들며 접근했던 거.”

“······.”

“비서실장이 직원들을 이용하는 짓. 제가 황 과장님께 똑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과장은 입을 꾹 다물고, 지혁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동안 제 취향대로 과장님 이용했던 거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이라도 원하시는 직무가 있다면 제가 어떻게든······.”

황 과장이 지혁의 말을 막았다.

“차장님.”

“······.”

“차장님은 다릅니다. 비서실장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

“이 얘기를 꺼내는 거부터가 다르죠.”

황 과장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글쎄요······ 처음 차장님을 만났을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어요. 근데 지금 확실한 건.”

“······.”

“전 차장님께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꿀꺽.

지혁은 고마운 마음에 약간 울컥했다.

“부탁인데, 다시는 저한테 이런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

“또 이러시면, 저 진짜 서운해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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