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기회가 왔다 (1)
선도물산 인근의 한 카페.
윤 팀장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양옆으로 인사팀장, 개발팀장, 생산팀장이 있었다.
윤 팀장의 호출로 모두 하던 일을 제쳐두고 모였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성격 급한 개발팀장이 가장 먼저 물었다.
2주에 한 번. 정기 모임 외에 만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받고 모이는 건 처음이었다.
생산팀장도 궁금했는지 물었다.
“오 팀장님이 뭐 요청하고 가신 게 있으신가요? 어제 왔다 가셨다면서요.”
말투에 내심 서운한 기색도 있었다.
지혁과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3개월간 만난 적도 없고, 회사를 방문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상품기획 1팀과 시간 보낸 건 이미 회사에 소문이 나 있었기에 알고 있었고.
당연히 윤 팀장도 함께였을 거로 생각했다.
“어제 오 팀장이 일이 있어서 왔었는데 사정상 시간을 못 가졌다고, 미안하다는 말 전해달라더군요.”
“그 얘기 하시려고 소집하신 건 아니시죠?”
인사팀장의 물음에 윤 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요. 다들 바쁘시잖아요.”
“······.”
윤 팀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오 팀장의 특별 지시가 있습니다.”
오 팀장의 지시라는 말에 다들 눈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오래 기다렸다.’
‘이제야 뭔가를 좀 하는군.’
통상 회사원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싫어해야 정상인데.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 욕심이 많았다. 회사에서 한자리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오매불망 기다렸던 지혁의 지령이라면······.
윤 팀장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비밀입니다. 혹시라도 밖에 새어 나가게 되면 오 팀장님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꿀꺽.
윤 팀장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며, 생산팀장은 침을 삼켰다.
‘뭔가 저지르려나 보네.’
윤 팀장은 이들의 표정을 살폈고,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입니다.”
“······.”
“그룹 비서실장. 강정철 전무요.”
비서실장이라는 말에 다들 어이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보통 상대가 아닐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와······ 이제 하다 하다.
-너무 센 거 아니에요? 회장님 최측근이잖아요.
-관계사 대표들도 꼼짝 못 하는 사람인데.
오로지 인사팀장만 놀라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결국 이렇게 하시는구나.’
지혁은 예전에 인사팀장에게 비서실장을 알아봐달라고 요청했었고.
그 일로 만나기까지 했었다.
인사팀장은 그때 비서실장을 조사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혁의 성향이라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설마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많이들 놀라셨죠? 저도 어제 얘기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하하.”
말을 뱉고 나서도 윤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할 거냐면요. 오 팀장이 명단을 줬거든요?”
곧바로 핸드폰을 터치하며 말했다.
“지금 톡으로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을 저희가 만나야 합니다.”
각자 톡으로 온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계열사별 한 명씩이네요?
-선도물산만 없는데요?
윤 팀장이 설명했다.
“선도물산만 없는 건, 어제 오 팀장이 왔던 이유에요. 직접 만나러 왔던 거거든요.”
“······.”
“명단에 아는 사람들 있죠?”
명단의 사람들은 부장 혹은 승진이 빠른 이사들로, 지혁라인의 멤버들과 경력이 비슷했다.
-내 동기만 세 명이 있네.
-2년 전에 상사로 모셨던 분도 있는데요?
윤 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일단 매칭부터 해봅시다. 아는 사람이 누군지 한 사람씩 알려주세요.”
지혁라인 멤버들은 근속기간 15년 이상이며, 더군다나 그 중엔 인사팀장도 있다.
차례대로 아는 사람들을 불렀고.
명단에서 불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네요?”
윤 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 쉽게 풀리겠는데?”
이후, 윤 팀장은 각자가 만나야 할 대상자를 나눈 후, 만나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모든 얘기가 끝난 뒤.
개발팀장은 싱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쉬운데요.”
***
선도물산을 갔다 온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지혁라인은 평일 저녁 혹은 주말에 명단의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에,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했다.
지혁은 기다렸다.
비서실장의 동정을 살피며, 조용히 지냈다.
간혹 황 과장과 아지트 가는 것 외에는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홍 팀장과 만나는 걸 조심했고, 할 얘기가 있으면 핸드폰으로만 했다.
그리고 언론사 인터뷰 이후, 오 회장이 외부 일정을 잡지 않아서 외근도 없었는데.
오랜만에 의전 일정이 잡혔다.
“오 차장.”
의전팀장의 부름에 지혁이 대답했다.
“네.”
“오늘 오후에 갑자기 자선행사 일정이 잡혔거든?”
“회장님 일정이 갑자기 잡히기도 합니까?”
오 회장 일정은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계획되어, 철저히 준비하여 진행한다.
의전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잡히기도 하고, 갑자기 취소될 수도 있지. 어차피 다 회장님 마음 아닌가?”
“······.”
“어떤 상황에서든 우린 회장님께서 편안히 일정 소화하실 수 있도록 보좌만 잘하면 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팀장님께 업무적으로 배울 게 참 많은 것 같습니다.”
“······.”
언론사 인터뷰 때, 의전팀장이 지혁의 벌인 일 뒷수습을 잘해준 이후부터.
지혁은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황 과장을 막 대하지 않으니,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흠! 배우긴 뭘······.”
의전팀장은 지혁이 이런 행동을 보일 때면 헷갈렸다.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자자. 어서 서두르자.”
“네.”
‘소망친구 기아대책’
기아대책은 개발도상국의 아이들을 돕는 프로그램인데, 회원이 되어 3만 원 정도를 매월 지급하면, 아이 한 명과 결연하여 후원하는 프로그램이다.
3만 원이 해당 국가에서는 공무원 월 급여 수준이라고 하니, 아이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프로그램인 건 분명하지만.
‘그룹 회장님이 이렇게 작은 일을 하신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며 자선행사 하는 모습을 상상했던 지혁으로서는 규모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이건 회장님 개인적으로 하시는 거네.”
지원팀장이 옆에서 말했다.
“그룹 차원에서 하는 자선행사가 아니라는 뜻이야. 원래 돈으로 후원만 해왔는데, 자선단체에서 방문 요청이 왔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말이야.”
“······.”
“그래서 이번에 큰맘 먹고 오신 거야.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냐고 하시면서······.”
오 회장은 거동하는 데는 문제 없지만,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설마 한 명 후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지원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1만 명은 넘을걸?”
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1만 명이면 매달 3억······ 역시, 규모가 다르네.’
띠링!
지원팀장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 차장.”
“네.”
“회장님이 찾으시는데?”
“저를요?”
지원팀장은 대답 대신 말했다.
“지금 대기실에서 쉬고 계시거든. 그리로 가봐.”
***
똑똑.
[오지혁입니다.]
“들어오게.”
덜컹.
지혁은 대기실로 들어왔다.
오 회장은 여든의 노령이라, 어딜 가든 쉴 수 있는 대기실을 마련해 놓는다.
지혁이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거기 앉게.”
지혁은 오 회장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둘이 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앉는 건 처음이었다.
오 회장은 오늘도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이마를 볼 것도 아니고, 지혁은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겠지.’
정적이 어색했지만, 지혁은 오 회장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저번에 말이야.”
“······.”
“언론사 인터뷰 준비하면서 했던 말 있지?”
오 회장은 천천히 말했다.
“직원 처우에 문제가 있다고.”
“네.”
“그 말이 자꾸 생각이 나더군.”
지혁은 가만히 얘기를 들었다.
“자네는 얼마 전까지 현장에 있던 사람이잖아. 비서실에서는 그런 사람은 자네가 유일하지 않나?”
“저와 함께 발령받아서 온 황성준 과장이라고, 한 명 더 있습니다.”
“아 그래?”
오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자네 얘기가 진정성 있게 들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자꾸 생각이 나더군. 특히, 자네가 비서실장에게 했던······.”
“······.”
“몰라서 묻냐고. 물었던 말이 말이야.”
두근두근.
지혁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온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난 직원들에게 좋은 회장이 되고 싶거든.”
“······.”
“지금까지는 직원이 잘되게 해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생각했다네.”
오 회장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 모든 직원이 성공을 바라는 건 아닐 테니까요.”
지혁은 회장의 말을 받았다.
“회사에서 임원이 되고, 경영자가 되어 성공하는 거. 모든 직원이 그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다 바란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리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흠······.”
“맡은 일 문제 없이 처리하고, 야근하지 않고, 동료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며, 때 되면 월급 받는 거.”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걸 추구하는 회사생활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역할 잘 해내는 건데. 그 정도만 해도 회사로부터 대우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오너는 직원들이 가진 능력의 200% 이상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고효율 투자’
돈 만지는 사람들의 기본 마인드가 그렇기 때문이다.
오 회장으로서는 지혁의 말을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직원을 이해하게 된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회사 처우가 다른 회사보다 못하다는 건 사실인가?”
“대기업군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때 홍 팀장 발표 자료에 평균 이하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오 회장에겐 이게 가장 컸다.
‘일등 기업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 회장은 지혁의 의견을 물었고.
지혁은 생각했다.
‘오 회장은 실행할 생각이 없으면 의견을 묻지 않아.’
몇 달간 관찰하면서 파악한 사실이기에,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회가 왔어.’
똑똑.
[회장님, 나가실 시간입니다. 관계자분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회장이 나가기 전, 지혁은 재빨리 질문에 대답했다.
“현장 직원들 얘기를 직접 들어보셔야 합니다.”
“······.”
“비서실 통해 듣지 마시고, 직접이요.”
“흠······.”
오 회장은 시계를 보았다.
“일단 나가지.”
오 회장은 문을 향해 걸으며 지혁에게 물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은가?”
지혁은 회장을 위해 움직이는 비서실에 있다.
이건, 시간 비워놓으라는 뜻이었다.
덜컹.
문을 열고 나가자.
지원팀장과 의전팀장이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봐.”
오 회장은 두 사람을 동시에 불렀다.
“이 이후로 오늘 일정 다 취소해.”
그리고 오 회장의 이어진 말에 두 남자는 귀를 의심했다.
“오지혁 차장은 자선행사 끝나는 대로, 내 집무실로 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