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기회가 왔다 (2)
자선행사 일정은 20분 뒤에 끝이 났고.
비서실과 경호팀이 대기하는 중에, 오 회장은 차에 오르며 지혁을 불렀다.
“오 차장.”
“네.”
“자네 보고 준비하려면, 빨리 출발해야 하지 않나?”
“······.”
그 한마디를 남기고, 오 회장이 탄 차는 출발했다.
의전팀장은 멀어져가는 오 회장의 차를 보다가.
지혁에게 물었다.
“회장님과 뭐 하기로 했어?”
“집무실에서 좀 보자고 하셨어요.”
“그래? 오늘 회장님 시간이 되시나? 오후에 일정 있는데.”
옆에 있던 지원팀장이 의전팀장에게 말했다.
“자네 없을 때, 일정 다 취소하라고 하셨어.”
“그래?”
의전팀장은 생각했다.
‘그래서 방금 그런 말씀을 하신 거군.’
지원팀장은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의전팀장에게 말했다.
“오 차장 먼저 보내야겠는데? 방금 회장님 말씀 들었잖아.”
오 회장이 출발하기 전에 했던 말. 지혁을 빨리 보내라는 뉘앙스였다.
의전팀장은 지혁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먼저 복귀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궁금하지만, 오 회장과 관련된 일이라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런 경우 보통은 빨리 정리하고 출발하겠다고 말한다. 빈말이라도.
하지만 지혁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의전팀장도 지혁의 그런 성향을 이제는 잘 알고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 어서 가.”
“그럼 수고하세요.”
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쩝······.”
의전팀장은 지혁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누가 누굴 모시는지 모르겠네. 이래서 너무 잘난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두면 피곤해.’
지원팀장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의전팀장님 성격이 많이 죽었네.”
“뭐?”
“오 차장한테 꼼짝 못 하는 거 같은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잖아?”
의전팀장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라면 뭐 다를 줄 아나? 오 차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보통 사람이 아니면 뭔데?”
“몰라서 물어?”
온몸으로 괴한을 막았던 일, 베트남에서 말도 안 되는 바디랭귀지로 놓칠 뻔한 문제를 발견해 냈고, 전체 회의에서 그 대단한 비서실장에게 맞서기도 했다.
비서실에 온 지 이제 3개월이 좀 지났지만, 지혁은 보여준 게 많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인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불안해.’
지원팀장은 갈수록 지혁이 신경 쓰였다.
오 회장에게 가장 가까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까 봐.
툭. 툭.
의전팀장은 지원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일이나 하자고.”
“······.”
의전팀장은 지혁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뒤집니다’라고 들었던 그 순간을 말이다.
그는 지원팀장에게 말했다.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냥 잘해줘. 그게 좋을 거야.”
***
오 회장 집무실.
그는 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 회장은 성격이 급하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빨리 끝장을 봐야 했다.
‘현장 직원들 얘기를 직접 들어보셔야 합니다.’
자선행사 대기실에서 지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오 회장은 원래 현장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새부터인가 참모들의 보고만 받고 있었다.
처음엔 노령으로 인한 체력 저하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장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내가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도 아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스스로 원했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된 건지 헷갈렸다.
‘비서실 통해 듣지 마시고, 직접이요.’
지혁의 말이 또 생각났다.
오 회장은 빨리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전화기를 들어 어서 오라고 채근하려는 찰나에.
똑. 똑.
[오지혁입니다.]
“들어오게!”
지혁은 들어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고.
오 회장은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거기 소파에 앉게.”
“네.”
오 회장은 집무실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던 얘기 마저 해볼까?”
그는 곧바로 일 얘기를 시작했고, 지혁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핏줄은 핏줄이네. 오 사장과 오 부회장 모두 회장님을 닮은 거였군.’
만나자마자 군더더기 없이 본론부터 말했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근데, 사실······ 지혁도 그랬다.
“생각이 있어서 얘기 꺼낸 거였겠지?”
“······.”
“어떻게 하면 현장 직원들 얘기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을까?”
“······.”
“나인 줄 모르게 변장해서 잠행이라도 해야 하나?”
오 회장은 선도그룹 그 자체였이며, 아무리 오너라도 제약이 많았다.
현금 운용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뜻대로 정할 수 없었다.
거쳐야 할 단계와 사람들이 있었다.
지혁과 이런 시간 갖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혁 또한 오 회장과의 독대는 예상 못 했던 일이기에.
자선사업 일정을 끝마친 뒤, 사무실로 최대한 빨리 왔다. 웬만하면 행사 뒷정리는 함께 하려고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 사무실에서 20분 정도 고민한 걸 말하려는 거였다.
‘지금은 꼼꼼함보다는 타이밍이야.’
“간담회를 했으면 합니다.”
“간담회?!”
오 회장은 피식 웃었다.
‘고작 생각한 게 그거야? 난 또······’
지혁의 대답이 실망스러웠다.
간담회를 과거에 안 해본 게 아니다.
직원들은 눈치 보며 진짜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속 마음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오 회장에게는 시간 허비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봤는데. 별거 없던데?”
“······.”
“그리고 간담회를 모르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아깐 비서실도 모르게 직원 얘기 들어보라며?”
지혁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과거처럼 하면 의미 없습니다.”
“······.”
“과정과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흠······.”
이제야 오 회장의 눈빛이 좀 달라졌다.
“설명해보게.”
“계열사별로 오랜 기간 근무했고 직원들에게 평판이 좋은 분들을 모셔서 허심탄회한 얘기를 들어보는 겁니다.”
“······.”
“다만, 간담회 참석 인원은 비밀리에 선정합니다.”
“비밀?”
“네, 선정된 인원은 간담회 자리에서 만날 때까지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
“······.”
“정말 아무도 모르도록요. 예를 들어······.”
그리고 지혁의 눈빛이 빛났다.
“비서실장과 최 부회장도 몰라야 합니다.”
오 회장은 최측근의 이름이 거론되자, 눈빛이 달라졌다.
***
“그 두 사람도 모르게 진행한다고?”
“네.”
“그건 좀 내키지 않는데.”
비서실장과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지혁이 아무리 오 회장을 위험에서 구해내고,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어도.
함께 지낸 시간은 무시 못 한다.
비밀로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비서실장과 최 부회장을 배제한다는 건 오 회장 머릿속에는 없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혁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특히, 비서실장이 알게 되면 아무 의미 없게 되기 때문에.
“회장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 회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간담회는 처우, 업무 만족도 등 직원들 얘기를 들어 보려는 거죠.”
“······.”
“지금까지 비서실장과 최 부회장이 뭐 했습니까?”
지혁은 대놓고 깠다.
“탁월하신 분들이죠. 업적도 많으시고요. 하지만 지금 간담회에서 다룰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
“의심할 여지 없이 실패한 참모입니다.”
오 회장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것 봐라······.’
자기 눈앞에서 최측근을 맹비난하는 지혁의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신기했다.
‘일단 들어나 보자.’
“계속하게.”
“새로운 사람에게 일을 맡겨보려는데, 작전에 실패했던 참모를 끼게 한다? 과연, 새로운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
“만약 좋은 성과가 나더라도, 논공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지혁은 차분하면서도 차갑게 말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씀을 드렸습니다.”
“······.”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 회장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당장 회사 매출에 영향을 주는 일도 아니며, 문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
“즉,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잃을 게 없습니다.”
오 회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과감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 책상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눈을 또렷이 보며 말했다.
“믿고 맡겨보시죠.”
“······.”
“이전과는 다른 간담회.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 회장은 그런 지혁을 멍하니 보다가.
“허, 참나.”
헛웃음이 나왔다.
당돌해도 너무 당돌했다.
‘이 친구가 과연 나를 그룹 회장으로 보고 있는 건가?’
예전처럼 하면 달라질 게 없으며, 별거 아닌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살살 달래며 밀고 당기는 게 참 기가 막혔다.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황당하면서도 묘하게 흐뭇했다.
최 부회장도 오 회장 앞에서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못했다.
이런 패기 넘치는 도발적인 대화를 해본 게, 몇 년 만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알았어. 해봐.”
오 회장은 토 달지 않았다.
시원하게 허락했다.
“단, 제대로 해야 해.”
당부의 말도 한마디 덧붙였고.
지혁 또한 시원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
토요일 주말.
지혁은 평소처럼 아침에 운동을 갔다 온 이후,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
하는 거 없이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수아는 왜 저러나 싶어서 물었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
“응?”
“지난주에도 중요한 사람 만나러 간다고 했었고······ 최근 주말에 계속 바빴잖아.”
지혁은 수아를 꼭 껴안고 말했다.
“오늘은 당신이랑 집에 있으려고.”
수아는 자기 몸을 휘감은 지혁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웬일이래?”
“왜? 싫어? 집에 혼자 있는 게 편한가?”
“호호. 아니. 난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지혁은 수아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이제 멀지 않았어.”
“뭐가?”
지혁은 비서실장을 쳐내고 나면, 오 부회장에게 접근할 수 있을 거로 봤다.
회사생활을 하는 목적.
이제 멀지 않았다.
본인이 끝나든, 오 부회장이 끝나든.
어쨌든 결말이 이제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워라밸 지키면서 자기랑 함께 시간 많이 보낼 거야.”
“믿을만한 소리를 해야지.”
다정한 말에도 수아는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지혁은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진짠데?”
“됐어요~ 내가 오지혁을 몰라?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워라벨 챙기면서 회사생활 했겠지.”
“······.”
“누가 보면 회사 오너인 줄 알겠어. 그것도 참 복이다.~ 남들은 죽지 못해서 다니는 회사를 재밌다며 다니고 있으니.”
수아는 싱긋 웃다가, 흠칫 놀랐다.
“어? 그 눈빛 뭐야?”
지혁의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 단둘이 시간이 많네?”
“이러지 마~ 가족끼리 대낮에 이러는 거 아니야.”
지혁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띠리링-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 왔다. 어서 받아봐~ 어서~”
수아는 지혁의 품에서 빠져나가며 소리쳤고.
“에이~”
지혁은 입맛을 다시며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웬일이세요?”
윤 팀장이었다.
[어, 나도 주말에 전화하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끝나면 바로 연락 달라며.]
흥분으로 고조되었던 지혁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명단 줬던 사람들. 설득 끝났어.]
지혁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참 잔인해 보였다.
‘이제 쳐 죽일 시간과 장소만 정하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