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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27화 (127/301)

127. 겨누어진 칼날 (2)

오 부회장은 분명 들었지만, 실감이 안 났다.

‘수신 거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거부당한 적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날 거부한다고?’

원하는 건 다 손에 넣었고, 아첨하는 자들 속에 살았던 오 부회장.

단순한 안내 메시지였지만······ 생소한 충격이었다.

“방금 수신 거부라고 했어요?”

옆에 있던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의 혼잣말을 듣고 물었다.

“······.”

오 부회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혁에게 수신 거부당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뭐해요? 급하다니까. 다시 전화해보세요.”

“지금 못 받는데요.”

오 부회장은 ‘수신 거부’ 메시지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보네요?”

비서실장은 황당한 눈빛으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둘이 아는 사이 아니었어요?”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직책은 오 부회장이 높지만, 서로 어려운 사이는 아니었다.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의 후계를 도와준 인물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봐왔던 삼촌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비서실로 보냈길래, 난 특별한 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끙······.’

오 부회장은 속으로 앓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홍 대표 비리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비서실 보내줬다고 말할 수는 없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 같아요.”

“꺼져 있다고 해서 ‘수신 거부’ 메시지가 나오진 않는데.”

말하고 나서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수신 거부를 해놓았다고 해서 솔직하게 ‘수신 거부했다’라며 메시지가 나오지도 않을 텐데요.”

“······.”

“이거 오 차장이 계획적으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오 부회장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글쎄, 난 모르겠고. 이 얘기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수신 거부했다고, 수신 거부를 했습니다라고 나오면. 수신 거부당한 사람은 기분 나빠서 다른 방식으로 연락해올 수 있고. 그럼 수신 거부를 한 취지가······.”

“그만하시죠.”

결국 오 부회장은 비서실장의 말을 막았다.

“오늘 평소와 좀 다르신데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비서실장은 이제야 오 부회장의 썩어 있는 표정을 확인했다.

“아,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오 부회장은 기분 나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요?”

“······.”

“어차피 전화는 안 받고. 오지혁은 멀리 있는 게 아닌데.”

지금 상황에서는 결국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으나······ 비서실장은 뭔가 좀 껄끄러웠다.

오 회장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는 줄은 알아요?”

“대강당에 있을 겁니다.”

오 부회장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갑시다.”

***

간담회 1시간 전.

지혁은 단상 위에 서서 간담회 최종 점검 중이었다.

선도캠퍼스에는 사무직과 현장 근로자 모두 합쳐서 약 5만여 명이 상주해 있다.

선도그룹에서 가장 큰 산업단지인데, 부지가 큰 만큼 많은 시설이 있으며, 그만큼 직원 수도 많다.

오늘 1만 명의 관객석은 꽉 채워진다. 질서유지를 위해 안내요원들을 빈틈없이 배치했다.

벽면에 걸린 3개의 대형 스크린도 잘 나오는지, 스피커도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대강당이 너무 커서, 뒤쪽에서는 단상이 잘 안 보일 수 있다. 전달이 잘 되려면 장비가 매우 중요하다.

‘공개 처형’

지혁이 그리는 모습은 바로 ‘공개 처형’이다.

이번엔 개인적인 감정까지 들어가 있기에, 조금의 자비도 베풀 생각이 없었다.

“카메라 이상 없죠?”

녹화를 위한 중계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었고. 카메라 감독은 지혁의 물음에 OK 사인을 보냈다.

“와······ 일 너무 크게 만든 거 아니에요?”

황 과장은 대규모 빈 객석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느껴졌다.

“이번 일은 크게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요.”

지혁의 표정에서 걱정과 불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상 큰일 앞두면 긴장해야 정상인데······.’

알고는 있었지만, 황 과장은 이런 지혁의 모습이 새삼 신기했다.

“오 차장. 오랜만이야.”

저벅. 저벅.

입구 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면서 말했다.

1만 명 규모 객석 끝 쪽에서 걸어오기 때문에, 얼굴이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야 왔군.’

지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지?”

황 과장은 멀리 있는 그를 알아보려고 눈을 찡그리며 보다가······.

“엇!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멀리 있는 부회장에게 황 과장은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

오 부회장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단상을 향해 걸어왔고.

그의 뒤에는 비서실장이 따라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 부회장이 단상 위로 올라오자, 지혁은 가볍게 인사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곧 있으면 직원 간담회 합니다.”

“그걸 왜 해?”

“글쎄요. 그건 회장님께 물어보세요.”

지혁은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오 부회장이 공격할 목적으로 물어본다는 걸 알기에, 오 회장에게 공을 넘겼다.

아무리 그라도, 오 회장에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이 사람이 진짜······.”

오 부회장의 표정은 험악하게 변했다.

“자네, 나와 한 약속을 기억 못 하는 모양인데.”

“······.”

“내 앞에서 버릇없게 굴지 말라는 말 잊었나?”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방금 뭐가 버릇이 없었던 거죠?”

“······.”

“강아지처럼 굴어야 버릇이 있는 건가요? 누구처럼?”

지혁은 ‘개’ 대신 ‘강아지’라는 표현을 썼다. 오 부회장은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 말 할때, 비서실장을 슬쩍 한번 쳐다봤다.

“······.”

오 부회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관두자. 주변에 사람도 있고. 넌 나중에 보자.’

오 부회장은 지혁에게 물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았나?”

“전화요? 전화 안 왔었는데요.”

오 부회장은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안내 음성이 나오던데. ‘수신 거부’라고.”

지혁은 오 부회장과 비서실장이 제 발로 찾아오도록 만들기 위해, 부재 중 일 때 수신 거부 메시지가 나오도록 설정해 놓은 거였다.

안내 메시지 설정은 업체 통해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바꿔놔야지.’

“제가 모르는 번호는 받기 싫어서 수신 거부해놓거든요.”

“······.”

지혁은 얼버무리듯 대답했고, 오 부회장은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여 넘어갔다.

옆에 황 과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모르는 번호를 수신 거부할 수가 있나?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새로 나온 기능?’

의심할만했지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오 부회장과 비서실장은 그런 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혁을 근거리에 지켜봐 온 황 과장은 알고 있었다.

‘지금 오 차장님이 두 분을 갖고 놀고 있구나.’

오 부회장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고. 간담회 패널이 있다며.”

“네.”

“명단 줘 봐.”

“······.”

오 부회장은 손을 내밀었고, 지혁은 그 손을 가만히 보았다.

“뭐해?”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 뒤에서 피식 웃고 있었다.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부회장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지.’

“모릅니다.”

“······뭐어?!”

“모른다고요.”

오 부회장은 지혁을 보다가,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모른다는데요?”

비서실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앞으로 나섰다.

“오 차장!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총진행 책임자가 패널이 누군지 모를 수 있나?”

“알아도 몰라요. 기밀 유지하라는 건 회장님 지시사항인데. 여기 회장님보다 높은 사람 있어요?”

“······.”

이 와중에도 지혁의 얼굴은 평온했으며, 비서실장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어서 말 안 해?”

“······.”

“야!”

비서실장은 흥분한 나머지 지혁의 멱살을 잡으려 했고.

지혁은 어서 잡으라는 듯 목을 쑥 내밀었다.

‘뭐지?’

순간,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비서실장은 뻗은 손을 멈췄다.

그때.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세트장 뒤에서 오 회장이 나타났다.

***

“회, 회장님!”

비서실장은 화들짝 놀라서, 뻗었던 손을 재빨리 허벅지에 붙이고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좀 전에 나와 같이 차 타고 왔는데, 뭘 그렇게 놀라서 인사하나?”

“······.”

오 회장은 오 부회장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네, 회장님. 잘 지내셨어요.”

오 부회장은 그를 아버지가 아닌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지혁은 이 두 사람 간의 분위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직책을 부르는 게 맞긴 하지만······.’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세트장 뒤에서 쉬고 있다가······ 아무래도 영 이상해서 나왔는데.”

지혁은 대강당의 출연자 대기실 하나를 비워서, 오 회장이 쉴 자리를 마련해 놓았었다.

굳이 대강당 안에 말이다.

오 회장은 비서실장을 향해 물었다.

“왜 패널 명단을 알려고 하는 거지?”

꿀꺽.

비서실장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오 차장의 설명이 부족했나? 간담회는 비밀리에 진행한다는 얘기하는 거 같던데. 아, 하도 큰 소리로 대화들을 해서, 다 들렸거든.”

“······.”

“왜 대답을 안 해? 패널 명단을 알려고 한 이유가 뭐냐니까?”

비서실장은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오 회장은 계속 비서실장의 대답을 기다렸고.

질문을 뭉개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서실장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회장님을 걱정했습니다.”

비서실장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그룹의 비서실장으로서 회장님의 명예와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많은 직원 앞에 서는 대규모 행사에서는 특히 더 만전을 기해야 하거든요. 만약, 패널들이 돌발행동을 하기라도 한다면······.”

비서실장은 너무나 뻔하지만, 틀리지는 않은 말들을 지껄였고. 그것도 아주 길게 했다.

논지를 흐리고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오 회장은 얼굴은 점점 피곤해져 갔고.

비서실장의 긴 해명 중.

웅성. 웅성.

객석 가장 끝에서부터 직원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지혁은 오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직원들 들어옵니다. 이동하시죠.”

“그래.”

***

-저분이 오지혁 팀장님이구나.

-이제 팀장님 아니시잖아.

-몰라. 팀장님으로 유명하셔서 그런가. 그게 어울려.

-그렇긴 해~

-근데, 실물이 더 멋지시다.

-유부남이 저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객석은 꽉 채워졌고.

단상 위에는 지혁 혼자 있었다.

1만 명 앞에서 위압감을 느낄 만도 한데, 그는 흔들림 없이 당당했다.

그 모습이 참 거대해 보였다.

‘우리 팀장님. 진짜 멋지다.’

황 과장 마음속에도 지혁은 여전히 팀장이었고. 이런 그를 볼 때마다 괜한 자부심마저 느꼈다.

자리가 정돈되자, 지혁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도그룹 비서실 오지혁 차장입니다.”

-우와~!

-짝짝짝.

소개 한마디에 큰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뭐야?’

뜨거운 반응에 지혁도 살짝 놀랐다.

-오지혁 팀장님 화이팅!

-뵙고 싶었습니다!

-멋있다아~!

지혁은 선도그룹 직원들에게 꽤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비서실과 미래기획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간담회를 이끌어 갈 패널분들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혁은 세트장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주세요.”

두근두근.

비서실장은 긴장된 마음으로 지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고.

‘설마······.’

저벅. 저벅.

한 사람씩 들어올수록······.

그의 눈은 경악으로 점점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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