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메스를 대다 (1)
선도전기 김일중 이사
선도물산 정민경 이사
선도중공업 홍은우 부장
선도증권 최시경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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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5명의 간담회 계열사 대표들은 모두 단상 위로 올라왔고.
비서실장은 핏발 선 눈으로 단상 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했다.
몸이 사시나무 흔들리듯 떨리고 있었다.
‘다 내 사람들이잖아. 한 명도 빠짐없이.’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려웠다.
긴 시간 동안 각 계열사에 심어놓은 비서실장의 사람들.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았던 ‘샤이 피플’들이었다.
“왜 그래요?”
옆에 앉은 오 부회장은 비서실장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닙니다.”
“몸 안 좋으면 좀 쉬었다 오세요. 간담회 내용은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
오 부회장은 모르는 비서실장의 사람들.
지금 비서실장은 오 부회장도 부담스러웠다. 혹시 이중 첩자를 심었던 걸 알게 될까 봐.
차라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두 눈 똑바로 떠야 해.’
비서실장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위기일수록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들어도 주먹을 꽉 쥐고 자리를 지켰다.
지혁은 패널들이 모두 올라온 걸 확인한 후, 관객들에게 말했다.
“오늘 간담회를 이끌어갈 각 계열사 대표분들입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휘이익~
-인원 선정 잘했다!
-이사님 화이팅!
-부장님 멋져요~
직원들은 패널들을 큰 박수로 환영했다.
회사 내에서 평판이 좋고,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아······ 속 쓰려.’
패널들이 아주 정직하게 간담회에 임할 것만 같은 기분에 비서실장은 속이 쓰려왔다.
‘시작하기 전에 한번 만나기만 했어도······.’
이 사람들은 비서실장에게 꼼짝 못 한다. 오랜 시간 그렇게 조종당해 왔다.
‘잠깐이면 되는데······.’
그렇게 아쉬워하던 중, 패널 한 명이 비서실장과 눈이 마주쳤고.
‘옳거니.’
비서실장은 그 패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어?’
그 패널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
“소개만으로도 직원들이 좋아하는군요. 패널분들이 어떻게 회사생활을 하셨는지 짐작이 됩니다.”
단상 위에 선 지혁은, 평소와 달랐다.
말수가 적고, 그나마 하는 말도 항상 날카로웠던 사람이.
지금은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세트장 뒤에서 황 과장은 그런 지혁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역시, 잘하실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부드러운 인사말은 여기까지였다.
“진행방식 설명하겠습니다. 패널분들이 각자 준비해 온 주제로 말씀을 드릴 겁니다.”
“······.”
“발표가 끝나면, 다 함께 토론할 거고요. 객석에 앉아 계신 직원 여러분들의 의견도 들을 겁니다.”
지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토론 시간은 무제한입니다. 그래도 밥은 챙겨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
“오늘 이 자리에서 그룹에 쌓였던 혹은 거론하기 어려웠던 문제, 애매한 기준들은 다 풀고 정리하는 겁니다. 집에는 늦을 수 있다고 미리 연락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꿀꺽.
일부 직원은 지혁의 기세에 마른침을 삼켰다.
‘결론 나기 전까지 집에 안 보내겠다는 거잖아.’
‘에이~ 설마.’
‘저 사람은 진짜 할 거 같아.’
‘여기 회장님도 계시잖아. 회장님 집에 안 가면 못 가는 거지 뭐······.’
“오늘 간담회에서 다룰 주제 중, 성역은 없습니다.”
지혁은 객석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경영자들을 바라봤다.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늘은 직원 처우 개선을 위한 내용이 주가 될 거고, 여러 불편한 얘기가 나올 수 있거든요.”
각 계열사 경영자들은 묵묵히 지혁의 말을 들었다.
“그룹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고 회장님께서 판단하신 겁니다.”
“······.”
“그러니, 별다른 불만을 없을 거로 예상합니다만······ 그래도 불편하실 수는 있으니 잘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지혁은 경영자들이 돌발 행동하지 않도록 미리 경고하였다. ‘오 회장’의 이름을 빌려서.
지혁은 객석 가장 앞줄 정중앙에 앉아 있는 오 회장에게 마이크를 들고 다가갔다.
“회장님, 개회선언 부탁드립니다.”
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제가 그동안 말로만 직원들 생각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소홀했던 부분 오늘 듣고 개선할 테니, 마음껏 의견 주시면 좋겠습니다. 경영자분들은 주의 깊게 경청하도록 하세요.”
-짝짝짝.
큰 박수 소리와 함께 간담회는 시작되었다.
***
“안녕하세요. 선도전기 김일중 이사라고 합니다.”
지혁은 선빵을 중요시 생각한다.
도봉산 사전 미팅에서 용기 있게 질문했던 김일중 이사에게 가장 중요한 첫 순서를 맡겼다.
“저는 직원 처우와 관련하여 우리 회사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평가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맞아. 맞아.
-옳소!
‘평가제도’라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직원들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임원이기에 평가를 받는 것보다, 주는 일을 더 많이 합니다.”
김일중 이사는 자신감 있게 말을 이어갔다.
“수년째 매년 평가 철이면 많은 직원에게 평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평소 정량평가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다.”
너무나 솔직한 의견에 대강당은 정적에 휩싸여, 김일중 이사의 말에 집중했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한 정량평가······ 뭐 취지는 좋습니다만, 그게 개인 평가를 하기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부서마다 정량 기준이 다르고 어느 부서에 있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죠. 예를 들어, 성과 나는 부서에 있어서 좋은 수치가 나올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음에도 성과가 나오기 힘든 부서에 있으면 수치가 나오기 어렵죠.”
“······.”
“전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이 본인 자리를 지키고, 적자를 방어해 내는 직원을 더 인정하거든요. 하지만!”
김일중은 눈에 핏발이 섰다.
“제가 줄 수 있는 정성평가의 기준은 한계가 있고, 그놈의 정량평가 때문에 고생한 직원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단 말입니다.”
“······.”
“힘든 부서에 발령받은 이유로 계속 안 좋은 평가 받고, 불만 쌓이고, 회사 나가게 되고.”
지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옳소!
-맞습니다! 아! 속이 시원하네!
-제기랄, 누가 원해서 적자 부서에 발령받았냐고.
한동안 객석은 웅성거렸고.
조용해진 후에 지혁이 물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김 이사님께서 생각하는 대안이 있습니까?”
김일중 이사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인사와 평가는 너무 어려운 부분이라. 하지만 확실한 건.”
“······.”
“어설픈 제도에 편승하는 것보다는 평가자에게 전권을 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평가자 주관이 강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검증자를 두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뭐,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직원 중 일부는 고개를 갸웃했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제도를 위한 제도는 벗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김일중 이사는 큰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고, 지혁은 객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 주제 관련하여 좋은 의견 있으신 분 계십니까?”
“······.”
객석엔 1만 명이나 앉아 있었지만, 손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 팀에서 메시지로 링크 보내드릴 거거든요. 익명이니까 염려 마시고 의견 써서 보내주세요.”
“······.”
“욕만 아니면 심한 말 쓰셔도 됩니다. 그 또한 직원들의 뉘앙스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뭐······.”
지혁은 고개를 살짝 웃고는 말했다.
“예를 들어. 젠장, 제기랄, 미친 뭐 이 정도 선에는 괜찮다는 뜻입니다. ‘씨발’이라든가 ‘개새끼’ 같은 표현은 삼가셔야겠죠.”
객석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앞줄에 앉은 경영자들은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뭐, 저딴 걸 설명해 주고 그러냐.’
하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더 유해졌다.
“다음 분 모시겠습니다. 이제 한 명 끝났고, 열네 분 남았네요.”
14명 남았다는 말에 경영자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 발표하고, 얘기 나누는 데 30분 걸렸다.
2번 타자는 선도물산의 디자인실장이다.
“안녕하세요. 선도물산의 정민경 이사라고 합니다.”
디자인실장은 꾸벅 인사하고 말을 시작했다.
“저는 직원 처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문화’입니다.”
“······.”
“저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경영자들은 직책에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요. 예를 들어.”
디자인실장이 스크린을 가리키자, 간단한 표 하나가 나타났다.
“선도물산 패션 부문은 의류리테일이 주 사업 분야입니다. 매출을 일으키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
디자인실장은 살짝 미소 짓고는 말했다.
“판매가를 내리는 거죠. 어제 3만 원에 팔던 걸 만 원 내려서 2만 원에 팔면 매출이 확 오르죠. 가장 손쉬운 마케팅 기법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 손대서는 안 되는 전략이죠. 왜냐면, 가격은 내리기는 쉽지만, 올리기는 어렵거든요. ”
“······.”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런 무리수 전략은 말 그대로 단기성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가격을 더 내려도 팔리지 않으면, 매출이 꺾이고, 그러면 가격을 더 내리고. 이 패턴이 반복되어 가격이 끝도 없이 내려가다, 결국 마이너스 마진율이 되어······.”
디자인실장은 답답한 듯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브랜드 적자로 이어지고요. 이는 곧 인원 감축으로 연결됩니다. 경영자가 단기성과에 집착하여, 회사와 직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끼치게 되는 거죠.”
디자인실장은 용감했다.
이번엔 미래기획실 임원들을 보며 말했다.
“전 우리 회장님께서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기에, 지금의 선도그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등 기업인 우리 회사가, 뭐가 급해서,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문화가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오전에 시작한 간담회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15번째 패널의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엔 초긴장 상태로 간담회를 지켜보던 비서실장은 어느새 느슨해졌다.
워낙 간담회가 길어진 데다가, 순수하게 회사 발전을 위한 얘기만 나왔기 때문이다.
“노인네가 꽤 버티네.”
오 부회장은 건너편 옆에 앉아 있는 오 회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간담회를 온종일 하고 있지만, 오 회장은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오 회장만 없었다면, 진작에 나갔을 것이다.
“거의 끝난 거 같은데, 조금만 참으시죠.”
“······.”
15번째 패널의 발표가 끝난 후.
지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각 패널의 간담회 발표는 끝났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패널들은 모두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직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비서실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야, 끝난 게 아니야?’
“제가 한가지 문제 제기하겠습니다. 이 열다섯 분을 아우르는 공통 문제인데요. 이분들을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안한 기분에 비서실장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몸에 문제를 발견하면 치료를 해야 하죠.”
지혁과 비서실장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치료가 안 되는 부분은 수술로 깨끗이 도려내야 합니다.”
1만 명이 모인 대강당에······ 지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우리 그룹에 그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