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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29화 (129/301)

129. 메스를 대다 (2)

-도려낸다고?

-뭘 말하는 거지?

-조직과 제도에 관련된 얘기면 지금까지 다 했잖아.

-혹시 사람을 지칭하는 건가?

-에이~ 설마.

지혁이 던진 말에.

긴 간담회로 인해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술렁임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지혁은 소란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은.”

-대박! 사람이었어.

-제도를 얘기한 게 아니라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어떻게 해. 미쳤나 봐.

‘그 사람은’ 한마디에 직원들은 아까보다 더 술렁였고, 앞줄에 앉은 경영자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오 회장도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친구가······ 지금 뭐하는 거지?’

“흠! 얘기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지혁은 주변이 소란스러워 말이 자꾸 끊기니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제야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그 사람은 회장님의 눈과 귀를 막고.”

-눈과 귀?

-회장님 측근이라는 말이잖아.

다시 또 술렁였지만, 지혁은 멈추지 않고 목소리를 더 크게 해서 이어 나갔다.

“그룹을 자기 입맛대로 구성하여, 막후 정치를 벌였습니다.”

“······.”

“지금 감쪽같이 당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분이 회장님이고요.”

오 회장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고.

오 부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다.

“비서실장님, 쟤 미쳤나 봐요.”

“······.”

“비서실장님?”

오 부회장은 지혁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비서실장에게 돌렸고.

“뭐, 뭐야?”

눈은 뜨고 있는데, 초점이 없었으며.

입가에 백태처럼 하얀 거품을 끼고 있었다.

“뭐예요. 입 좀 닦아요.”

“······.”

“비서실장님?”

그는 넋이 나가서 대답할 정신이 없었고. 오 부회장은 비서실장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아······ 엿됐다.”

비서실장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오 부회장은 비서실장이 이상하다 못해, 거부감이 느껴지려 했다.

“어떡하지. 이제 어떡해야 할까.”

오 부회장은 비서실장에게서 살짝 떨어져 앉았고.

지혁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오늘 이분들을 패널로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객석에 앉은 직원들은 이제 숨죽이고 지혁의 얘기를 들었다.

“오랜 기간 그분에게 이용당했고요. 그 때문에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

“열다섯 분의 증인께서 그 인간이 어떤 일을 벌여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

‘그 인간이 어떤 일을 벌여왔는지······.’

지혁의 이 말이 끝나자, 비서실장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혁은 아직 직접적으로 비서실장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지혁의 칼끝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게.’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도망치려 했다.

“부회장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네, 다녀오세요. 가서 세수도 좀 하시고. 비서실장님 좀 이상해 보여요.”

오 부회장은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고.

비서실장은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와도 돼요.”

비서실장은 일어서서 출입구 쪽을 봤는데.

‘뭐, 뭐야?’

안내요원들이 가로막고 서서, 모두 비서실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 혼자 일어나니까 본 거겠지?’

안내요원의 눈빛을 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걸 수도 있지만.

섣불리 문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비서실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앉았고.

오 부회장이 물었다.

“뭡니까?”

“중요한 얘기할 거 같아서, 마저 듣고 가려고요.”

오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이상해······ 그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건가.’

비서실장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도중공업 홍은우 부장입니다.”

패널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저는 20년 전에 선도그룹에 입사했습니다. 당시에 그분은 높은 직책은 아니었으나, 그룹에서 촉망받는 중간관리자였습니다. 승진 후 교육과정에서 처음 만났는데.”

막 승진해서 그룹 교육과정에 온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있고 향상심이 강하다.

그 심리를 이용하여, 비서실장은 각 관계사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룹 교육과정에서 심복을 만드는 것은 비서실장의 수법이었다. 선도물산의 디자인실장 등 여러 명이 이런 방식으로 비서실장에게 걸려들었다.

“달콤한 말로 제게 접근했고, 선도중공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룹을 위해서요.”

“······.”

“말이 그룹이지, 이 모든 일은 그분 개인을 위해서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홍은우 부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챙겨주는 게 있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요청하는 별의별 잡다한 일을 했고요. 간혹, 상식적이지 않은 짓도 벌였습니다. 제가 잠시 인사팀에 있을 때는 주요 직책자 신상정보까지 캐내어 보고할 정도였으니까요.”

직원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홍은우 부장은 본인에게도 피해가 갈 만한 일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지혁이 여기서 발설한 얘기는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그 약속을 믿었다.

“이번에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저 같은 사람이 계열사마다 있다는 걸 알고 많이 놀랐습니다. 말하기 정말 어려웠지만, 정말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용기 냈습니다.”

잠시 후, 홍은우 부장은 얘기를 끝마쳤으며.

“······.”

객석은 고요했고, 박수 소리는 없었다.

한 사람에 의해 그룹 내에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홍은우 부장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직 14명이나 더 있었다.

‘말도 안 돼······.’

가장 놀란 사람은 오 회장이었다.

의자를 부여잡은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혁은 그의 반응을 힐끔 보고는, 바로 다음 사람을 진행했다.

“다음 분이요.”

패널 중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얘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도증권 최시경 부장입니다.”

꿀꺽.

객석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1만 명이 모인 대강당은 지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까 한 간담회의 집중도와는 비교도 안 됐다.

“저도 똑같습니다. 승진 그룹 교육과정에서 그분을 만나게 되어 인연을 맺었습니다.”

조금 전 홍은우 부장이 하는 얘기와 비슷했다. 만남부터 업무와 관계없는 지시까지.

“제가 가장 곤욕스러웠던 점은 그분이 지목하는 사람을 찍어내야 할 때였습니다.”

“······.”

“상급자인 경우는 ‘블러인드’같은 익명 회사 커뮤니티 앱을 활용하거나, 동료들에게 안 좋은 말을 퍼트려 흠집을 내게 했고요.”

최시경 부장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하급자인 경우는 업무량 조정 혹은 업무 결과에 대한 과도한 질책으로 조직에서 버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벌인 후 힘들어할 때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최시경 부장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게 다 회사를 위해서라고요.”

“······.”

“바보같이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게 회사를 위할 리가 없는데, 왜 그랬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비서실장은 패널들의 얘기를 들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빌었다.

‘제발 이름만 얘기하지 마라.’

처음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명확하게 이름을 지칭하지 않으니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이 자리만 모면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또한 지혁의 계획이었다.

‘절망에서 일말의 희망을 줬다가. 사정없이 뺏는다.’

확실히 밟아서 모든 의지를 꺾어 놓기 위한 전략.

15명의 패널의 얘기는 간담회처럼 오래 걸리지 않았고, 마지막 사람이 끝날 때쯤.

“비서실장님.”

지혁은 비서실장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흡!’

비서실장은 놀라서 숨이 턱 막혔고.

직원들은 술렁였다.

-비서실장님을 왜 부르지?

-이 타이밍에 왜?

-설마······.

-에이~ 아니겠지.

“얘기 잘 들으셨어요?”

“네? 하하.”

비서실장은 너무 당황하여, 자기가 웃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당신이잖아.”

지혁은 망설이지 않고 지목했다.

“뭘 자꾸 아닌 척해.”

***

술렁. 술렁.

-대박.

-지금 말한 대상자가 비서실장님이라고?

-좋으신 분이잖아?

-아까 패널들의 공통된 얘기였어. 겉보기에 좋은 분이라는 게.

-미쳤다, 진짜.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오 부회장도 기겁하는 눈으로 옆에 앉은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이 아저씨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패널 중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오 부회장 또한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비서실장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하니 있었고.

지혁의 융단 폭격은 시작됐다.

“회장님을 기만하고, 그룹을 자기 입맛대로 주무른 사람입니다. 이 인간은 나쁜 놈보다도 더 나쁜 놈이죠.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하니까요.”

“······.”

“심지어 그 더러운 짓은 꼭 타인의 손을 빌려서 했죠. 심리를 조작하여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의존하게 만들어서요.”

지혁은 비서실장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변수를 최소화하는 거죠. 지금까지 자신의 쌓아온 것들이 흔들릴 수 있는 변수를요.”

지혁은 직원들과 경영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회사에 제안한 좋은 안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대부분을 이 사람이 다 커트했어요. 제가 증거자료 제시할 수 있습니다.”

지혁은 비서실 소속이다. 그 정도 기록 확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 모든 걸 걸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만 명 앞에 당당하게 선 남자.

지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만 없어도 그룹 문제의 반은 해결됩니다.”

대강당에는 마치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한 정적이 흘렀고.

지혁은 객석 가장 앞줄에 앉은 한 노인을 바라봤다.

“오종건 회장님.”

오 회장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비서실장 문제 있는 거 아시죠? 과거에도 뭔가 있었잖아요.”

꿈틀.

오 회장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일 이후로, 오 회장이 지혁을 멀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을 감수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종 결정권자 입을 열어야 해.’

“과거에 어땠었던. 지금 이 사람은 그룹을 흔들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오 부회장 후계 문제를 도와준 일 때문에, 오 회장이 그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 회장은 고민했고.

“용기 내어 단상에 오른 열다섯 분을 외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혁은 계속 그를 몰아붙였다.

“회장님의 용단이 필요합니다.”

꿀꺽.

지혁은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아무리 신명 나게 칼춤을 췄어도, 결정권자가 뭉개버리면 그만이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끝이야.’

“회장님, 그룹의 뿌리 깊은 문제를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오 회장은 지혁의 말을 끊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

비서실장은 간절한 눈빛으로 오 회장의 눈을 바라봤으나.

‘아······ 안돼.’

그의 눈빛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었다.

오 회장은 1만 명의 직원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힘주어 말했다.

“당신에게 퇴사를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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