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낙하산을 펴다 (2)
오 회장과 어머니는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거의 30년 만에 만남이니, 쌓인 얘기가 많았다.
주로 오 회장이 듣는 쪽이었는데.
오종원 이사의 얘기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해서 들었고.
듣는 내내 눈가를 훔쳤다.
“단둘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얘기 듣는 중에 오 회장은 지혁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지혁은 오 회장이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독고다이로 살아온 인생에 굳건한 머릿돌 하나가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부재를 채워주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함이 있다.
“저녁 드시고 가시죠.”
“아니요. 갑자기 찾아왔는데. 저녁까지 먹는 건 실례죠.”
“실례라니요. 저희가 뭐 남······.”
어머니는 ‘남인가요’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너무 오랜만에 본 사이라 그런 말을 뱉기가 쑥스러웠다.
오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죠. 하하.”
“······.”
“다음엔 아내와 함께 정식으로 오겠습니다. 초대해 주신다면.”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형님이랑요.”
어머니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듯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고.
오 회장은 웃으며 안심시켜주었다.
“제 아내도 나이가 꽤 들었어요. 옛날하고는 달라요.”
“네······.”
오 회장은 집을 나섰고.
어머니는 밖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오늘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지혁도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오 회장 차에 탔다.
“어머니, 저 가볼게요. 어서 들어가세요.”
“그래, 항상 조심하렴.”
이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식 걱정이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차 안.
지혁은 오 회장과 함께 뒷자리에 앉았다.
“집이 어느 쪽이야?”
“신림입니다.”
“흠······.”
오 회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아파트에 사나?”
“아니요. 빌라에 삽니다.”
“살기 불편하지 않나? 신림이면 출근 거리가 꽤 될 텐데.”
강남에 있던 선도빌리지는 출근하기 편했지만, 선도본관이 있는 종로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 봐야 1시간 거리인데요. 많이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오 회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사 가까운 곳에 아파트 하나 마련해 줄까?”
지혁은 잠자코 들었고, 오 회장은 그가 불쾌해할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아파트 하나 내주는 건 어려운 일 아니니까.”
수조 원 재산이 있는 그룹 회장에게 아파트 한 채는 우스웠다.
지혁은 묵묵부답이었고.
오 회장은 그가 자존심 상해 하나 싶어서, 얘기를 관두려는데.
“좋죠.”
“······.”
“저야 감사하죠.”
지혁은 주는 건 감사히 받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 이사 가면 직원들 보기 좀 그럴 수 있으니까. 한 달 정도 후에 이사 가는 걸로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 그래.”
오 회장은 지혁이 너무 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너무 큰집 말고 30평대로 부탁드립니다. 아내랑 단둘이 사는데, 청소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구체적이라 좋군. 받아 적어야 하나.”
“이왕이면 남향에 한강뷰면 더 좋을 거 같긴 한데. 그건 좀 욕심일까요?”
“아니야. 해줄게.”
“감사합니다.”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앗싸’를 외쳤다.
‘수아가 참 좋아하겠네.’
오 회장은 순순히 지혁의 핏줄을 인정했고, 가족처럼 챙겨주려 했다.
지혁은 로또 맞은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밝힐걸.’
그 후로 각자 생각에 잠겨 조용히 가다가.
오 회장이 지혁을 다정하게 불렀다.
“지혁아.”
“네.”
“앞으로 넌 너답게 대우를 받을 거야. 내 동생에게 미안했던 마음마저 더 해서 널 신경 쓸 생각이다.”
“······.”
“우리는 선도그룹 오너가문이고, 일반 직원들과는 달라. 인사 조처가 상식적이지 않을 수 있어.”
지혁은 묵묵히 오 회장의 말을 들었다.
“예를 들어, 오 부회장. 그러니까, 너의 큰 형 진양이는 입사 때부터 부장이었으니까. 나도 그랬었고.”
“······.”
“그건 특혜라기보다는 자리에 맞게 길러지기 위함이야. 어차피 오너를 할 사람이니까, 경영자 역량을 집중적으로 키울 수 있게.”
얘기를 들으며, 지혁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 부회장을 끌어내리려는 걸 알면······ 회장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오 회장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직원들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면 돼. 네 큰아버지가 선도 그룹의 오너니까.”
덥석.
오 회장은 지혁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갠 후 따뜻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알겠니?”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큰아버지.”
***
다음 날 아침.
“자기야~ 화이팅! 오 회장님~ 아니지. 호호. 큰아버님 화이팅! 잘 갔다 와~”
수아는 입이 귀에 걸려서, 지혁은 배웅해주었다.
아파트 하나 받기로 했다는 소식에 수아는 어젯밤 설레어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전철을 탔다.
‘차는 안 해주시려나.’
8시 55분.
선도본관 도착.
지혁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항상 출근 시각 5분 전에 도착한다.
웅성. 웅성.
-어머, 왔다.
-웬일이야. 진짜.
-이런 인사 조처가 말이 돼?
-아무래도 회장님이랑 뭐 있나 봐.
-백 프로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돼.
어제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지혁은 직원들의 술렁이는 소리를 들으며 비서실이 있는 27층으로 올라갔다.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의전팀장과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의전팀장은 당황한 듯, 복잡미묘한 얼굴로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지혁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지혁은 의전팀장이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나 싶어서 엘리베이터 뒤를 봤다.
하지만, 분명 엘리베이터에는 지혁 혼자 있었다.
지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의전팀장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왜 이러세요?”
“······.”
‘업무 왕따를 시키더니, 이젠 이런 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안 타세요?”
“아, 네네. 타겠습니다.”
의전팀장이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탄 뒤.
지혁은 사무실로 향했다.
‘회장님이 뭔가 하셨나 보군. 메일부터 확인해봐야지.’
어제 차 안에서 나눈 얘기가 떠올랐다.
‘인사 조처가 상식적이지 않을 수 있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생각했다.
‘얼마나 비상식적이길래 이러는 걸까.’
지혁이 비서실 사무실로 들어서자.
“······.”
일하고 있던 사람, 대화 중이던 사람 모두 하던 걸 멈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말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지혁이 인사를 하면 받는 둥 마는 둥, 어렵고 불편하게만 대하던 사람들이······.
모두 깍듯이 인사를 했다.
갈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지혁은 자기 자리로 걸음을 빨리했다.
“비서실장님!”
지혁을 발견한 황 과장이 밝은 얼굴로 소리쳤고.
지혁은 놀라서 그를 본 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비서실장님이요?”
‘그 인간이 웬일이지? 여기 나타날 리가 없는데.’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황 과장은 웃으며 다가와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비서실장님!”
“······.”
지혁은 기겁한 눈으로 황 과장을 바라봤고.
그는 눈을 찡긋하며 작은 소리로 지혁만 들리게 말했다.
“드디어 로열패밀리임을 드러내시는군요.”
이제야 어색했던 아침 출근 분위기가 이해되었다.
지혁은 자리에 앉은 뒤, 메일 창을 재빨리 열었다.
[특별승진]
1) 오지혁 : 차장 -> 이사
[인사발령]
1) 오지혁 이사
이동 전 : 그룹 비서실 팀원
이동 후 : 그룹 비서실장
***
아지트.
황 과장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지혁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 인사에 지혁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부장 승진 혹은 팀장 시킬 줄 알았는데······.’
그룹 비서실장.
회장의 최측근으로서 그룹의 전반적인 일에 관여한다. 회장 부재 시에는 대리업무도 맡는다.
최고위 직책 중 하나이며, 그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회장 아래 비서실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전 비서실장 강정철 전무가 뒤에서 그룹을 쥐락펴락했던 것도, 다 여건이 되니까 가능했던 거였다.
“드디어 제 자리를 찾으셨네요~”
혼란스러운 지혁과 달리 황 과장은 그저 싱글벙글하였다.
“아니 뭐······ 가까운 사람이 올라갔으니, 콩고물을 기대하며 좋아하는 마음 이해는 갑니다만······.”
“······.”
“너무 평안해 보이는데요? 같은 회사원으로서 박탈감 느끼지 않으세요?”
“하하. 같은 회사원이라뇨. 아니죠.”
황 과장은 당연한 듯 말했다.
“비서실장님은 오 회장님 아들이잖아요.”
“아들 아니에요.”
“네? 그럼요?”
이제 누구에게도 숨길 이유가 없다.
그리고 파격 인사가 벌어진 이상, 모두가 다 알게 될 일이었다.
“조카예요. 제 큰아버지세요.”
“아~ 큰아버지도 아버지잖아요.”
“······.”
“하하. 내 짐작이 맞았네.”
그렇다. 어쩌다 보니, 황 과장의 짐작이 맞는 게 되어버렸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지혁은 황 과장의 착각을 이용하려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열패밀리라고 생각한 황 과장의 굳은 믿음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얻어걸렸다고 하기엔, 너무 절묘해.’
지혁은 새삼 황 과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거 겹경사네요. 저도 좋은 일 있는데.”
황 과장은 품속에 하얀색 봉투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엇?”
지혁은 봉투를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청첩장.’
“우왓! 하하.”
지혁은 큰 소리로 웃으며 기뻐했다.
“와~ 진짜 축하해요!”
“하하. 감사합니다.”
황 과장은 쑥스러워하며 웃었고.
지혁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근데,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에요? 왜 얘기 안 해줬어요?”
“아, 하하. 바쁘게 지내다보니,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
“그리고 결혼식 준비는 저희가 하는 거고~ 와주시기만 하면 되는데. 뭐, 미리 말씀 드릴 필요 있습니까. 하하.”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속도위반을 생각한 거였고, 황 과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건 아닙니다! 하하.”
지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요.”
“그럼요~ 너무 좋아하시죠~”
황 과장은 밝은 얼굴로 물었다.
“결혼식 오실거죠?”
“무조건 가야죠.”
***
일주일 뒤. 황 과장의 결혼식.
새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다.
황 과장의 좋은 인간관계 때문에, 결혼식장은 인산인해였고.
선도물산에서 온 사람들만 해도 백여 명은 훌쩍 넘었다.
예식 15분 전.
회사 출근 시간과는 달리, 일찍 도착했다.
술렁. 술렁.
자석에 끌리듯, 하객들의 시선은 선도그룹의 삼십 대 비서실장에게 향했다.
군계일학.
하객들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며, 지혁은 황 과장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더 이상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황 과장은 지혁이 와준 게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주인공은 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