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큰 집 (1)
“황 과장님~”
지혁은 홀 중앙에서 하객들에게 인사 중인 황 과장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지혁 주변으로 몰리고 있었다. 특히 선도물산 직원들이 난리였다.
“오~ 오늘 멋진데요.”
지혁은 웃으며 황 과장에게 말을 건넸다.
주변의 반응은 애써 모른 척했다.
“오셨어요······.”
찰칵. 찰칵.
결혼식 주인공은 황 과장인데, 하객들은 열심히 지혁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황 과장을 찍는 듯하면서, 앵글은 지혁을 향하고 있었는데.
지혁과 황 과장이 바보도 아니고.
지금 누가 주목받고 있는지 서로 알고 있었다.
-역대 최연소 비서실장님 아니야?
-선도물산에서도 그렇게 승승장구하시더니······.
-진짜 역대급이다.
-오 회장님 친척이래.
-진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어떻게 실력만으로 갓 서른 넘은 사람이 비서실장이 되냐?
수군거림은 황 과장의 부모님께도 들릴 정도였고.
지혁 주변으로 몰리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더니, 수군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다.
“안녕하세요. 오지혁이라고 합니다.”
지혁은 황 과장 부모님께 인사했는데, 두 사람은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듣던 대로 매우 젊으시네요.”
“황 과장님이 부모님 닮아서 이렇게 훈남이군요. 하하.”
덕담을 건네었지만, 부모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부모님은 황 과장을 툭툭 쳤고.
황 과장은 지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장님, 식장 안에 들어가 계시죠. 주변이 복잡해서.”
지혁은 황 과장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
“네, 들어가야죠. 인사가 길었네요.”
지혁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따 식장에서 봅시다~ 황 과장님 축하해요~”
황 과장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고.
[사진 촬영 있겠습니다~ 신랑, 신부 직장 동료분들 앞으로 나와주세요.]
지혁은 황 과장 바로 뒤에 섰는데.
-오 팀장님~
-이제 팀장님 아니야! 비서실장님이지.
-아, 맞다! 죄송해요~
-축하드립니다!
-오 실장님, 번호 안 바뀌었죠?
뒤늦게 지혁을 발견한 사람들이 다가와 난리였다.
앞에 나와 서 있으니, 지혁이 눈에 잘 띄었고.
오늘의 주인공인 황 과장보다 인사를 더 많이 받았다.
지혁은 황 과장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자자, 다들 반가운데요. 일단 식 좀 끝나고요.”
-아이코! 그렇네.
-황 과장 결혼 축하해~
황 과장은 씁쓸했다.
‘내 결혼식인데,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은 뭘까?’
그래도, 지혁이 연결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지혁이 민폐 하객이 되었지만.
미워할 수 없었다.
고마운 마음이 훨씬 더 크니까.
[자~ 찍습니다! 신랑 웃으세요~ 입만 웃지 말고~ 진정성 있게~ 마음으로 웃으세요~ 하나~ 둘~]
찰칵!
***
피로연장.
지혁은 칸막이로 독립된 좌석으로 안내받았다.
선도그룹에서 온 하객 중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공개된 좌석에 잠깐 앉았더니, 인사하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너무 혼잡했다.
정신없어서 밥 먹는 것 같지 않았고, 혼주 배려차원에서도 자리를 옮겼다.
“자~ 오랜만인데 한잔하시죠.”
그렇다고 혼자 밥 먹는 건 아니었다.
상품기획 윤현성 부장.
인사팀장 허용호 부장.
생산팀장 하재웅 부장.
개발팀장 고승윤 차장.
지혁의 사람들이 피로연장에서 모였다.
개발팀장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네~ 오랜만이긴 합니다.”
지혁은 웃으며 개발팀장을 바라봤다.
“서운하셨어요?”
“약간요. 선도물산 떠나신 후에 처음 뵙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결혼식장에서.”
-하하.
이 말에 모두 다 함께 웃었고.
인사팀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 이사님.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그의 눈에서 열정이 뚝뚝 떨어졌다.
“잘 되셔서 정말 기쁩니다. 이 정도로 빠르게 자리 잡으실 줄은······.”
지혁은 웃으며 인사팀장의 말을 들었다.
“비서실장 자리 가시려고, 그동안 숨기셨던 거군요. 간담회에서 강 전무님을 보내신 것도 다 오래된 계획하에······.”
꿈보다 해몽이 좋은 인사팀장 덕에 지혁은 편안했다.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는데, 인사팀장이 알아서 아름답게 꾸며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생산팀장님도 잘 지내셨죠?”
“네, 잘 지내긴 했습니다만, 생산을 전혀 모르는 분이 생산본부장으로 오셔서······ 좀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합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영업 출신이 오셨다고.”
“네.”
지혁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유 본부장님은 자리 유지하고 계시나요?”
한 전무가 유 본부장을 자리에서 내치려 한다는 소식을 선도물산 방문 시에 들었었다.
“아직 안 내렸습니다.”
“아직이요?”
“네, 원래 이번 주에 인사발령 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오 이사님이 비서실장 되었다는 소식 이후,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생산팀장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 전무 생각은 아니었군. 그분이 눈치 보며 할 걸 안 하는 사람은 아니지.’
지혁은 오혜진 사장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얼굴 본 지 꽤 오래되었다.
한동안 반주를 곁들여 식사하다가.
“아, 물어본다는 걸 깜빡할 뻔했네.”
지혁은 입을 닦고 말했다.
“혹시 이 중에 선도본관에서 근무 못 하는 분 있어요?”
“······!”
이 질문에 모두 하던 식사를 멈추었고.
기대 가득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왜? 우리 부르려고?”
윤 팀장이 물었고.
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다는 아니고요. 몇 분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사정상 못 오시는 분 있으면 제외하고 생각하려고요.”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 가능하다는 거죠?”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인사팀장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꼭 가고 싶습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본부 인사팀장님이 어딜 와요. 자리 지키셔야죠.”
인사팀장이 다급히 한마디 하려는데.
덜컹!
신랑 신부가 인사하러 들어왔다.
“오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곱게 차려입은 김진아 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그녀의 인사말에 지혁도 화답했다.
“형수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어머.”
김진아 과장은 ‘형수님’이라는 말에 놀랐고, 황 과장은 좋아서 얼굴이 벌게져서는 핀잔 섞인 말을 했다.
“아유, 실장님. 형수님이라뇨.”
“그럼, 형 아내인데, 형수님이지 뭡니까?”
“하하. 이거 참······.”
황 과장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결혼 선물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네~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오세요.”
지혁은 황 과장에게 결혼 선물로 신혼여행 패키지를 해주었다.
그것도 몰디브 5박 7일로. 가격은 뭐······.
물론, 수아에게는 비밀로 했다.
***
오 회장실.
비서실장은 매일 아침에 회장을 대면한다.
그룹 전반적인 상황 및 이슈에 대한 보고와 조언을 하고, 회장의 지침을 받는다.
“오 실장, 이제 일주일 됐나?”
“네, 이제 2주 차입니다.”
“업무능력이 좋네.”
“······.”
“일머리를 타고났군. 새로운 자리에서 이렇게 빨리 적응하기 쉽지 않은데. 게다가 비서실장이 쉬운 자리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오 회장은 결재서류를 덮고, 지혁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군. 허허.”
“······.”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최 부회장에게 보조하라고 했으니까.”
“제 일은 제가 해야죠.”
지혁은 항상 밥값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룹 비서실장으로의 직급 보조비, 이사로서의 월 급여.
지난주에 ‘연봉 2억 1천만 원’에 서명했다.
그런데 예전처럼 크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차장 승진 때부터 월 급여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어차피 둘이 살고 있고, 한 달에 200만 원이면 생활비로 충분하다.
한 달에 600을 벌든, 1000을 벌든 어쨌든 필요 이상으로 벌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돈 모을 생각이 없는 것 또한 이유이기도 했고.
더군다나······.
“아파트 계약했다고?”
“네.”
“원하는 조건대로 한 건가?”
“네, 사무실과 가까운 용산 쪽 한강뷰 아파트로 결정했습니다.”
“진행하는 데 불편한 건 없었고?”
“지원팀장이 알아서 잘해주시더라고요.”
지원팀장은 오 회장의 손, 발 역할을 한다.
오 회장의 지시이기 때문에, 특히 더 지원팀장은 적극적으로 서포팅 했다.
“돈은 안 필요해?”
오 회장은 지혁에게는 막 퍼주려 했다.
자식들에게도 이러진 않았다.
“돈은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왜? 그래도 여윳돈 놔두고 쓰면 편하잖아. 10억 정도 줄까?”
지혁은 들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10억이 누구 애 이름인가.’
“지금도 놔두고 쓸 만큼 충분합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오 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 혹시 큰아버지가 걱정되어 그러는 거면, 아무 상관 없으니까 필요할 때 얘기해라. 다 탈 없게 하는 방법이 있어.”
금전이 오가는 게 문제 될까 봐, 지혁이 거부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말이었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어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그건 그렇고.”
오 회장은 지혁을 불러세웠다.
“너 언제 올 거냐?”
“네?”
“집에 한 번 오라 그랬잖아. 큰어머니한테 인사 안 하냐? 형제들도 그렇고.”
“······.”
오 회장은 가족들에게 지혁을 빨리 소개해주고 싶었다.
지혁 또한 빨리 만나보고 싶었으나, 지난주엔 새 직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 부회장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긴 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번 주 언제든 괜찮습니다.”
“오호. 그래?”
성격 급한 오 회장은 바로 시간을 잡았다.
“그럼 오늘 저녁으로 하지.”
***
그날 밤. 성북동 오 회장의 집.
딩동!
지혁은 금색 보자기로 두른 과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이런 거 거들떠나 보겠냐마는······ 그래도 빈손은 아니지.’
눈에 잘 띄라고 일부러 큰 상자로 구매했다.
삑-
현관문이 열리고.
넓은 정원의 돌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지혁아, 어서 와라.”
오 회장이 직접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해할 지혁을 위한 배려였다.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풍성하고 새하얀 쪽 찐 머리를 한, 노령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어머니군.’
한눈에 알아봤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치장은 안 했지만, 일반인들과 다른 기품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지혁입니다.”
“그래, 어서 오렴. 얘기 많이 들었다.”
큰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맞아 주었다. 하지만, 반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 회장이 형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인사들 나눠라. 회사 상사들이니 알 수도 있겠네. 하하.”
큰어머니 옆에는 오진양 부회장과 오혜진 사장이 서 있었다.
오혜진이 먼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오지혁 비서실장님?”
둘은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여야 했다.
그녀는 묘한 뉘앙스로 얘기했고, 지혁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그다음 오 부회장이 똥 씹은 얼굴로 지혁에게 말했다.
“참나, 이렇게 만날 줄은······ 세상일 참 모른다. 그치?”
“네, 형님.”
지혁은 일부러 ‘형님’이라 호칭했고, 오 부회장은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오 회장이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지혁아, 네 형 잘 도와야 한다. 곧 그룹을 책임질 사람이니까.”
“······.”
“친형이라고 생각하고 도와.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