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34화 (134/301)

134. 큰 집 (2)

지혁은 오 부회장을 최종 타겟으로 삼고 있다.

오 부회장을 친형으로 생각하고 도우라는 오 회장의 말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지혁은 이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대답할 수 없어.’

조금의 진심도 없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 어서 식사하자.”

다행히, 오 회장은 지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아줌마, 밥이랑 국 내오세요.”

“네, 사모님.”

자리에 앉자, 따뜻한 국과 밥이 올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차림새가 소박했다. 그렇다고 부족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한식 괜찮지?”

오 회장은 지혁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네, 좋아합니다.”

“우리 가족이 육류는 잘 안 먹어. 그래도 네가 어떨지 몰라서 갈비찜을 하긴 했는데.”

“저도 채식을 더 좋아해요.”

오 회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다행이구나. 먹자.”

오 회장이 젓가락을 들면서 식사는 시작됐다.

큰어머니가 물었다.

“어머니도 모시고 오지 그랬니? 결혼도 했다면서.”

진심으로 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직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이고 계셔서요. 나중에 뵙겠다고 하시네요. 큰어머니께는 안부 인사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이해는 된다.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호호.”

“······.”

큰어머니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분위기는 싸해졌다.

어머니도 그렇겠지만, 수아가 오는 것은 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언론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오진양 부회장과 오혜진 사장은 돌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셋째와 넷째도 미혼이다.

즉, 이 집안은 자식이 넷이나 되지만, 현재 며느리와 사위는 없다.

처음 대면하는 자리라 어머니와 수아를 데려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서로 불편해질까 봐 혼자 온 것도 있었다.

“진원이 형, 혜빈 누나는요?”

“······.”

지혁은 오 회장의 셋째 아들과, 넷째 딸에 관해서 물었다.

오 부회장은 지혁의 질문을 듣고 생각했다.

‘넉살이 장난 아닌데? 얼굴 본 적도 없으면서 형, 누나야?’

넉살과는 상관없었다. 만난 적 없는 형제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씨’자를 붙이기도 뭐 했다.

그렇다고 ‘자제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고.

참, 여러모로 어색하고 애매한 자리였다.

“걔네 둘을 아니?”

큰어머니의 물음에 지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 검색해봤죠. 오 회장님 가족관계 치니까, 다 나오던데요? 하하.”

뒷조사를 한 게 아니라, 공개된 정보라는 걸 밝히기 위해 일부러 풀어서 설명했고.

큰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원이는 여행 중이고, 혜빈이는 유학 중이야. 둘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나.”

오 부회장이 중얼거렸다.

“여행이 뭐예요. 행방불명인 녀석한테.”

“진양아.”

큰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오 부회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구나.’

형제 중에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오진원이었다.

최 부회장에게 얘기들은 적이 있었다.

‘경청을 잘하며, 형제 중 리더로 삼기에 가장 괜찮은 인물이라고 했었지.’

지혁은 오 부회장을 끌어내리고 난 이후를 생각해야 했다.

오진원을 알아보기 위해 인사팀장에게 조사를 지시했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지혁은 자연스럽게 오진원에 대해 더 물어보려 했는데.

“자리에 없는 사람들 얘기는 그만하고, 식사하자.”

오 회장은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 휘갑을 쳤다.

저녁 식사는 조용했고.

주로 오 회장이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듣는 쪽이었다.

“진양아.”

“네, 아버지.”

오 회장의 부름에 오 부회장이 대답했다. 집에서는 직책으로 호칭하지 않았다.

“너 지혁이가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지?”

“모르죠.”

오 회장은 지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옆에서 일하고 있잖아.”

“······.”

“일 잘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참 잘하더라.”

“그래요?”

오 회장은 지혁을 칭찬했고, 큰어머니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형제간에 서로 돕는 게 좋기도 하지만, 그런 거 떠나서라도 지혁이를 중용하면 좋겠더구나.”

오 부회장은 지혁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일만 잘하는 게 아닌 거 같던데요. 간담회 때 보니까.”

“······.”

“부담스러워서 어디 가까이 두고 쓰겠어요.”

“그건 문제를 잡은 거였고.”

오 회장의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오 부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네가 그룹의 회장이 되면, 사람을 잘 가려 쓸 줄 알아야 해.”

“······.”

“너가 일을 똑바로만 한다면, 옆에 두고 쓰기 좋은 사람이다. 지혁이는.”

적을 향해 휘두르기 좋은 칼이지만, 잘못 휘두르면 주인 목을 향하는 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 회장은 지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지혁아, 네 형 잘 도와라.”

“······.”

“선도그룹은 남의 회사가 아니야. 생각을 다르게 가져야 해.”

지혁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 회장 얘기를 들으며, 그의 후계 구도에 관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부회장에 대해 아주 확고하시구나.’

오 회장은 지혁에게 참 잘해주었고.

그럴수록 지혁은 씁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언젠가는 맞서야만 할 수도 있는데.’

***

식사 후.

형제들끼리 2층 접견실에 모였다.

오 부회장은 지혁에게 위스키를 따라주며 물었다.

“너 저의가 뭐냐?”

“네?”

“내가 바본 줄 알아?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것 같은데. 선도물산에서도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지?”

“······.”

“오너 자리를 노리는 건 아니지?”

지혁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물려받았어도, 뻘로 부회장이 됐겠어. 눈치 하나는 빠르네.’

“글쎄요. 오너를 노렸다면, 홍 대표를 그런 식으로 보내진 않았겠죠. 기회다 싶어서 굴비 엮듯이 여러 사람 보내버리면서 진양 형님께 타격을 주었겠죠.”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오 부회장은 이 말이 상당히 거슬렸다.

옆에 있는 오 사장도 아는 사실이었기에 굳이 거리낄 건 없었지만······.

“맘에 안 들어.”

오 부회장은 지혁을 벌레 보듯 바라봤고. 오 사장이 옆에서 말렸다.

“오빠,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오 부회장은 지혁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대답하면 안 돼.”

“······.”

“알겠냐?”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큰어머니도 제외 아니에요? 아까 식사 자리에서 진원이 형 얘기 꺼냈다고 한마디 하시던데.”

“······.”

오 부회장은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지 일 많이 시키지 마라. 요즘 짜증 나게 자꾸 나서시던데. 오 실장이 컨트롤 잘해.”

“······.”

“지켜본다.”

쾅!

오 부회장이 접견실에서 나가자마자.

오 사장은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여간 제가 왕인 줄 알아. 진짜, 맞춰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 회장 되면 더 그럴 거 아니야.”

조금 전, 오 부회장 앞에서 공손하던 태도에서 확 달라졌다.

딱 봐도 오 부회장을 싫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하시네요.”

“나야 항상 똑같지. 오 팀······ 아니다. 넌 많이 달라진 거 같고.”

예전에 오 사장을 상대했을 때는 사장 대 팀장이며, 오너 가문 대 일반 직원이었다.

지금은 사장 대 비서실장이며, 같은 오너 가족이다.

아주 많이 달라졌다.

“감쪽같이 속았네. 나 만났을 때도 네 신분 알고 있었지?”

“······.”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나 한 전무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은데.”

“노코멘트 할게요.”

오 사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된 거야?”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전 아주 멀리까지 계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때그때 효율적인 길을 찾아서 갈 뿐이에요.”

“그런데 나는 왜 속인 거지?”

예전과 같은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오 사장은 이제 지혁을 경계하고 있었다.

가볍게 볼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속였다기보다는 얘기를 안 한 거예요.”

그리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뭐?”

“어차피 목표는 같은데.”

지혁이 도리어 물었다.

“목표가 달라지셨나요?”

“아니.”

두 사람은 목표를 공유했었고,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함께 하기로 했었다.

오 부회장이 오너가 되면 안 된다는 것.

그 목표는 분명 일치했었다.

“그럼 됐잖아요. 저도 그때나 지금이나 목표는 같아요.”

지혁은 미소를 지었고, 오 사장은 그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지금 오 사장은 실감하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싫어하실 텐데. 그건 알지?”

“네. 방금 식사하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괜찮겠어?”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잖아요.”

“누나? 호호.”

‘누나’라는 호칭에 오 사장은 깔깔대며 웃었다.

“앞으로 재밌어지겠네.”

이제 자신과 동등한 라인에 선 지혁을 보며, 오 사장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

다음날.

지혁은 출근하자마자, 팀장 미팅을 했다.

“두 분 자리를 바꿔봤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지원팀장은 놀라서 물었고, 의전팀장은 반색하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서로의 업무를 잘 알고 있고, 팀원들도 잘 알잖아요. 업무상 구분되어 있을 뿐, 비서실은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으니까.”

“······.”

지원팀장의 불편한 얼굴을 보며 지혁이 말했다.

“한 자리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회장님 측근 자리에는 오해 사기 쉬워요.”

그러면서 지혁은 검지와 엄지를 비비며 돈 세는 모양을 했고.

지원팀장은 기겁하여 소리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혁이 비서실장으로 발령 나면서부터, 지원팀장도 그에게 존대하고 있다.

“아니면 일이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의전팀장은 좋아서 싱글벙글하였다.

의전팀이 지원팀보다 업무 강도가 세다. 오 회장의 보조뿐 아니라, 외부 다양한 곳과 스케줄 조정도 해야 해서.

“제한사항 없죠?”

“회장님이 허락하실까요?”

지원팀장의 물음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얘기하면 허락하실 거예요. 그건 염려 마시고. 그 외에 제한사항 없죠?”

“······.”

지원팀장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지혁은 마무리 지으며 일어났다.

“내일부로 발령냅니다. 금일 서로 인수인계하세요. 이상 미팅 끝.”

의전팀장은 지혁을 따라 나와서 말했다.

“실장님, 고맙습니다.”

“제가 받은 건 갚습니다. 지난번 방송국에서 고생하셨잖아요. 뭐, 적절한 때가 되기도 했고.”

“아······.”

의전팀장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실장님!”

미팅을 마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던 중.

저벅. 저벅.

맞은 편에서 최 부회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약속이라도 한 듯 복도에 마주 섰다.

최 부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좋겠다? 뜻대로 다 되고 있네?”

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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