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피하지 않는다
복도 중앙에 대치 중인 선도그룹의 두 실권자.
공개된 자리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끌 만했고, 직원들은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뜻대로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지혁이 인정하는 선도그룹의 최고 실력자. 최 부회장의 눈빛을 읽으려 했다.
웬만하면 그의 반대편에는 서고 싶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고 말인가?”
“글쎄요.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르겠죠.”
지혁은 잠시 생각하고는 최 부회장에게 말했다.
“근데,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분명히 최 부회장은 지혁을 이렇게 대하지 않았었다.
미소를 띠고 농담 던지며 편하게 대했었는데.
지금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엔 저한테 안 그러셨잖아요.”
지혁은 대놓고 물었다.
고수 앞에서 어설프게 머리 굴리면 득보다 실이 더 많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예전에 오 실장은 본 모습을 내게 안 보여줬던 거 같은데.”
“······.”
지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강정철 전무 보낸 일 때문인가 보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을 기점으로 최 부회장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제가 잘못된 일을 했습니까?”
“잘못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최 부회장은 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최고 리더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자네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봐.”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갈 채비를 했다.
“앞으로 자네와 일 외에 다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
“······.”
“어쨌든, 미래기획실장과 비서실장은 볼 일이 많잖아. 불편하게 지내지는 말자고.”
“부회장님이 불편하게 만드시는 거 같은데요?”
최 부회장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대책 회의 참석할 건가?”
“······.”
“바쁘면 안 와도 되네.”
마지막에 최 부회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뱉으며 사라졌다.
“올 테면 각오하고 오는 게 좋을 거고.”
***
미래기획실 대책 회의.
미래기획실은 매주 한번 정기회의를 하고, 긴급한 사안이 있을 때는 수시로 대책 회의한다.
어젯밤, 선도전자 뉴욕법인에서 긴급한 소식을 전했고, 최 부회장은 오전에 대책 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미래기획실 회의에는 미래기획실장 외에 경영진단팀, 인사지원팀, 커뮤니케이션팀, 경영지원팀, 전략팀 등 각 팀장.
그리고 비서실장이 참석한다.
미래기획실 외부 부서 중에 참석자는 비서실장이 유일한데.
이는 회장실에 보고할 사항인지 확인하려는 목적이 컸고.
미래기획실 회의는 그룹에 중요한 의제가 많고, 건너 들으면 왜곡될 위험이 있기에 비서실장이 직접 참석한다.
“안녕하세요.”
지혁이 비서실장이 된 이후로, 처음 참석하는 미래기획실 회의.
커뮤니케이션팀의 홍 팀장 외에는 지혁과 안면 있는 팀장은 없었다.
지혁은 참석자 중 가장 어리지만, 이 자리에서 미래기획실장 다음으로 높은 직책자이다.
모두 일어나서 지혁을 맞이했다.
잠시 후.
최 부회장이 회의실로 들어왔고.
“오, 비서실장님도 오셨네?”
지혁은 고개를 숙여 묵례했고.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경영진단팀장에게 말했다.
“어서 시작해.”
“네, 실장님.”
경영진단 팀장은 화면을 띄우고 말했다.
“어제 뉴욕법인에서 피치(Peach)사 소송 건 때문에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피치’는 선도전자와 핸드폰 사업 분야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아시다시피 2018년에 양측 합의로 소송이 종결되었는데, 피치사에서 다시 소송을 벌일 움직임을 보인다고 합니다.”
최 부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도 특허 소송인가? 제소까지 간 거야?”
경영진단 팀장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특허 소송 맞습니다. 지난 사례와 마찬가지로 특허 침해라고 보기 어려운 트집 잡기 문제인데. 아직 제소 전이고, 내용 증명만 보내왔다고 합니다.”
“흠······ 선전포고를 했다는 말이지.”
“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송으로 가면 이길 확률은?”
이번엔 경영지원 팀장이 말했다.
“내용 증명을 확인해 본 바, 문제로 삼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건입니다.”
“지난번과 비슷하다는 얘기군.”
지난 7년간 벌인 소송에서 ‘밀려서 잠금 해제’, ‘각진 모서리 디자인’ 등이 특허라며 피치사 측에서 주장해 왔었다.
최 부회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의가 뭐인 것 같나?”
전략팀장이 대답했다.
“작년부터 올해 1/4분기까지. 선도전자 매출이 피치사를 압도적으로 앞서면서, 분위기 전환을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흠······ 그래서 요구사항은?”
“특허 침해를 인정하든지, 배상금을 물어내라는 요청입니다.”
“배상금? 얼마를 요구하는데?”
“약 5억 달러(한화 6천억 원)입니다.”
“미친놈들······.”
최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래서 선발 주자가 유리한 거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잖아. 어쨌든 지들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최 부회장 얼굴에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전략팀장.”
“네, 실장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전략팀장이 말했다.
“합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합의?”
“네. 배상금 6천억 원은 그들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높게 부른 거고요. 합의를 제안하면 3천억 원 이내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흠······.”
“지난번 피치사와의 소송 문제로 7년이 소요됐습니다. 미국 법원에서 피치사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고요. 만약 저희가 이기더라도 소송비용 등을 고려하면, 소모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적당한 합의로 끝내는 게 낫습니다.”
현실적인 얘기였지만, 최 부회장은 수긍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최 부회장은 지혁을 불렀다.
“비서실장님?”
“네.”
“전략팀장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혁은 바로 대답했다.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
지혁의 답변에 회의실은 얼어버렸고.
전략팀장은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지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 또한 불쾌함으로 상당히 격양된 얼굴이었다.
“붙어 보지도 않고, 꼬리 내리자는 거잖아요.”
“······.”
“진짜 저의를 모르십니까? 그쪽에서 선도전자를 길들이겠다는 건데. 지금은 합의해서 넘어가면 다음엔 어떨 것 같습니까?”
최 부회장을 보며 물었고. 그는 가만히 있었다.
“되풀이됩니다. 한번 꼬리 내리면 계속 조공하게 되는 거라고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패턴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혁은 회의실에 모인 미래기획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선도전자가 약자입니까?”
“······.”
“꼬리 내릴 이유가 있냐고요. 약간의 출혈이 두려워서 합의하자? 그게 정신 나간 소리지 뭡니까.”
지혁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더라도,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말아야죠. 체급도 비슷한데, 왜 피하냐고요. 박 터지게 붙어야죠.”
“······.”
“지금 피치사 행동만 봐도 알잖아요. 바로 제소 안 하고 내용 증명부터 보내는 거 보세요. 일전에 선도전자에서도 맞고소하고 7년간 버텨왔기 때문에 함부로 못 하는 거라고요. 어떻게 나올지 간부터 보는 거죠.”
지혁은 최 부회장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꼬리 내리면 적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갈수록 이런 행태는 더 심해질 거고요. 이건 제가 확언할 수 있습니다.”
“······.”
지혁이 한바탕 쏟아낸 후.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일부 팀장은 참담한 얼굴이었고.
홍 팀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 부회장 또한······.
‘내 생각과 완전히 같군.’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지혁이 그대로 했다.
전략팀장의 의견에 답답함으로 감정이 올라왔었으나, 꾹꾹 참고 있었다.
쏟아붓기 전에 지혁을 테스트해 본 거였는데.
‘확실히 인재이긴 해······.’
최 부회장의 보기엔 지혁에겐 타고난 통찰력이 있었다. 이전에 지혁에게 얘기했듯, 여왕벌로 태어난 사람.
학습과 눈치로 되는 게 아니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통찰력.
최 부회장의 눈에는 지혁에게서 그게 보였다.
“전략팀장.”
최 부회장의 부름에 전략팀장이 대답했다.
“네.”
“반박할 말 있으면 해. 가만히 있지 말고.”
“······.”
전략팀장은 지혁의 말에 완벽히 동의하는 건 아니었으나, 분명 틀린 얘기가 아니었고.
또한, 거부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비서실장님 의견 또한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엇을 우선시할지는 경영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런 건 선택하게 하면 안 됩니다. 비슷한 가치를 두었을 때 선택하는 거지. 지금은 답이 명백하잖아요.”
지혁은 최 부회장을 향해 말했다.
“유능한 참모라면, 결정권자 헷갈리게 선택지 주지 말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나만 제시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
“그게 책임지는 참모의 모습이죠.”
“하하.”
최 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마치, 최 부회장이 바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지혁은 행동하고 있었다.
“비서실장님?”
최 부회장은 아침에 지혁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저희끼리 회의 좀 할까 하는데요.”
“······.”
의견은 충분히 전달했으므로, 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자네가 정말 전략팀장이 맞아?!]
회의실 안에서 최 부회장의 고성 소리가 들려왔다.
***
동부이촌동.
드디어 이삿날이 왔고.
지혁은 이삿짐이 올라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지혁과 수아가 살 집은 남향으로, 강변북로 넘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이었는데.
높이도 10층으로 딱 좋았다.
신림동에서 창밖 5미터도 밖으로 건물 외벽만 보이는 곳에서 살다가, 앞이 트인 곳으로 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호호, 자기야. 앞이 탁 트이니까, 왠지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벽 보고 살다가.”
“그래서 싫어?”
“아니~ 너무 좋지~”
수아는 약간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기분이 막 좋으면서도 왜 불안할까?”
“왜?”
“우리 돈으로 얻은 집이 아니잖아.”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무렴 어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이용하며 사는 거지.”
“그렇겠지?”
“그럼~ 돌려 달라고 하면 다시 주면 되는 거잖아.”
지혁은 수아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을 살면 되는 거지 뭐.”
뒤이어 ‘어차피 다 뒤질 텐데’라는 말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기분 좋아서 실수할 뻔했네.’
지혁은 탁 트인 한강뷰와.
깔끔한 아파트 주변 거리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비싼 돈 주고 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지혁은 약간 너스레를 떨어보았다.
“내가 뭐랬어. 집 안 사도 된다고 했지. 집 살려고 돈 아끼고 살았으면 얼마나 억울할 뻔했어.”
콩.
수아는 지혁의 머리를 가볍게 밀친 뒤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얻어걸렸으면서.”
“뭐라고? 아무리 대학 동기라도, 서방님한테 이건 좀 아니지 않냐?”
“호호.”
“하하.”
이사하는 내내.
새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