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사람을 부르다 (1)
이사 온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출근했다.
항상 보던 거리가 바뀌고.
1시간 걸리던 출근 거리가, 20분으로 단축됐다.
아무리 지혁이 정시 출근을 고집하지만, 비서실장이기에 오 회장보다는 먼저 출근해야 했다.
오 회장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회사생활을 했으며, 사무실에 늦어도 30분 전에는 도착했다.
지혁은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에 맞춰와야 했고, 그 때문에 가장 아쉬웠던 건.
‘하아~ 젠장, 근 손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운동했는데, 출근 시간이 앞당겨지니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5시에 일어나던 걸 새벽 4시에 일어날 수도 없고.
‘이래서 직주근접이 좋다고 하는구나.’
오랜만에 루틴대로 운동하고 출근을 하니, 지혁은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지혁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비서실장 집무실은 독립 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냥 사무실을 밖으로 뺄까.’
지혁은 사람들 관찰하는 걸 즐기는데, 독립된 사무공간에서는 그걸 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무공간과는 상관없이 직원들 관찰하기는 어렵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장실 가려고 잠깐 나오기만 해도, 대화 나누던 직원들이 멈춰버리니까.
지혁은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룹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이 갖는 힘.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똑. 똑.
“비서실장입니다.”
지혁은 일일 경영 보고를 위해, 회장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덜컹.
“안녕하십니까.”
“그래. 잠은 잘 잤나?”
오 회장은 지혁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 주말에 지혁이 이사한 걸 알고 있었다.
“네, 덕분에 새집에서 아주 잘 잤습니다.”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출근 시간은 좀 줄었나?”
“네, 그게 참 좋습니다.”
지혁은 싱긋 웃었고.
오 회장 또한 그를 보며 웃었다.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참 다정했다.
“차 있다고 했었나?”
“네? 아, 네. 있습니다.”
지혁은 캠핑카를 갖고 있다.
출퇴근용 차가 있는지 물어본 걸 알지만.
받는 텀이 너무 짧으면 사람들 이목을 끌 수 있어서, 지금 말고 나중에 받으려고 있다고 말했다.
“차 바꿀 때 안 됐어?”
“바꿀 수 없는 차입니다.”
“음?”
오 회장은 대답이 이상해서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소중한 차’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대중교통으로 다닌다며?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면 편하잖아.”
“네, 다음에 기회 봐서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주차가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
오 회장은 더 묻지 않았고.
지혁은 곧바로 일일 보고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회사 전반에 대한 중대 사항을 정리하여 1~2쪽 정도의 분량으로 보고한다.
“피치?”
“네.”
보고서 최상단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피치사’ 소송 건이었다.
“흠······.”
오 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보고서를 읽었고, 지혁은 묵묵히 기다렸다.
미래기획실은 피치사에서 문제 제기할 경우, 정면 대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합의를 제안하는 내용은 없었다.
미래기획실 긴급 대책회의에서 지혁이 말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위험하지 않나?”
“······.”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면, 적절히 풀어가는 게 좋을 수도 있는데.”
그룹의 리더답게 ‘안정’을 최우선으로 고민했다. 조직과 사람을 책임지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보고서에 ‘합의’에 대한 안이 있었다면, 오 회장은 흔들렸을 것이다.
“이기지 못할 싸움 아닙니다.”
“······.”
“일방적이지 않고요. 출혈은 저희 쪽에만 있지 않을 겁니다. 피치사도 그걸 알고 있을 거고요.”
지혁은 리더가 흔들리지 않도록, 여지를 두지 않고 말했다.
“미래기획실이 방향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전 이게 맞다고 봅니다.”
오 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 알았다.”
“저희의 강경한 태도를 알고 나면 피치사가 관둘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만약의 상황은 대비하고 있겠습니다.”
오 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능숙하진 않지만, 일 처리하는 태도가 참 마음에 들어.’
지혁은 비서실장이 된 지, 한 달이 되었다.
오 회장은 너무 파격 인사를 한 건 아닐지, 지혁이 업무 처리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잘했다.
특히, 의사결정 능력이 좋았으며, 사안의 본질을 꿰뚫을 줄 알았다.
회사 전반적인 사항에 대한 지식은 아직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참모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몫이고.
옳고 그른 걸 가려들을 줄 알고, 미래를 내다보며 결정하는 것.
지혁에겐 그런 통찰력이 있었다.
‘가르칠 수만 있다면······ 진양이에게 꼭 필요한 능력인데.’
오 회장은 지혁이 좋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오 부회장 생각이 났고, 아쉬웠다.
하지만, 이건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상. 금일 일정 보고 마칩니다.”
“그래, 수고했다.”
“저 회장님.”
오 회장은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기대려다가 지혁을 바라봤다.
“어, 왜. 할 말 있어?”
“비서실 인원을 충원했으면 합니다. 제가 있었던 의전팀 빈자리와······.”
오 회장은 피식 웃고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걸 나한테 뭐 하러 말해?”
“그래도 회장님을 직접 모실 사람들이라서······”
“됐어. 오 실장이 알아서 해~”
***
비서실 인원 충원에 대해 오 회장에게 직접 말한 건, 오 부회장 때문이었다.
그룹 비서실은 실질적으로 오 부회장의 영향력 하에 있다. 그 예로, 의전팀장과 지원팀장, 그리고 전 비서실장인 강정철 전무 모두 오 부회장의 사람이었다.
오 부회장에게 말하면 지혁이 원하는 인물들로 채울 수가 없기에, 일부러 오 회장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 삼더라도, 회장이 컨펌했다는 명분이 생기니까.
지혁의 원래 성격대로면 ‘실장은 난데 어쩌라고' 말하며, 앞뒤 안 보고 달려야 하지만.
지금부터는 조심하려 했다.
‘오 회장이 보고 있고, 오 부회장은 날 노리고 있어.’
비서실장으로 있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아슬아슬한 상황이라고 여겼다.
똑. 똑.
[지원팀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원래는 의전팀장이었던 장남일 이사.
지혁이 비서실장이 되면서, 팀장 간에 보직을 바꿨고.
현재 장 이사는 지원팀장으로 되어 있다.
“어쩐 일로······.”
지원팀장은 불안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이 비서실장이 된 이후, 독대하자고 부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 소파에 앉으세요.”
“아, 네.”
지원팀장은 바싹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냥~ 잘 지내시나 해서요.”
“네? 하하.”
지원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천직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근거리에서 존경하는 회장님을 자주 뵈니 너무 좋습니다.”
“······.”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좋아하는 주된 이유는 뻔하다.
‘편하니까.’
지원팀장은 지혁의 눈빛을 보고, 괜히 제 발 저려서 말했다.
“물론, 업무강도가 의전팀이 좀 세기도 했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팀원들은요?”
팀원 얘기가 나오자, 지원팀장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현재 지원팀의 팀원 중 한 명이 부서 이동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원팀장은 의전팀에 있을 때, 지혁에게 데인 이후로 잠잠했었다.
황 과장에게 함부로 할 수 없고, 이 부장은 함께 오래 있던 사람이고. 어디 쏟을 데가 없어서 개 같은 성격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원팀이라는 새로운 마당에 풀어놓으니, 억눌렸던 본 모습을 드러냈고.
발령받은 지 한 달 만에 팀원 한 명이 못 버티겠다고 했다.
수년간 인원 변동 없이 견고하던 지원팀.
장 이사가 오니, 바로 균열이 간 것이다.
“죄송합니다. 업무지시를 제대로 이행 못 하길래 한 소리 했더니······ 하지만, 부당한 지시를 한 적은 없습니다.”
지혁은 지원팀장을 보며 생각했다.
‘안 봐도 훤하다. 달달 볶았겠지.’
“됐습니다. 변명 들으려고 부른 건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네?”
“······.”
순간 속마음이 나와버렸다.
지혁은 이런 상황을 바라며 두 팀장을 교체한 거였다.
장 이사가 지원팀에 가서 지랄 발광을 하면, TO가 생길 거라 생각했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혁라인’으로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다.
“흠! 소신껏 일하신 건 잘하셨다는 말씀드린 거예요.”
“네? 아, 네.”
지원팀장은 고개를 갸웃했고, 지혁은 이어서 말했다.
“이번까지입니다. 앞으로 팀원들 또 나가게 하면 책임을 물을 거예요.”
지원팀장은 ‘책임’이라는 말에 식겁했다. 회사원이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 ‘책임’.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달력을 본 후 말했다.
“이틀 뒤에 새로운 인원 충원될 거거든요?”
“그렇게 빨리요?”
지원팀장은 놀랐다.
‘준비해 놓은 거야, 뭐야.’
“새로 올 팀원은 저 못지않은 사람이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지혁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하하.”
“네! 실장님!”
지원팀장이 나간 뒤.
지혁은 미래기획실 인사지원팀에 바로 전화했다.
***
이틀 뒤.
두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선도본관에 나타났다.
“진짜, 얘는 일하는 거 보면······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발령 내버려요. 인수인계도 못 했는데.”
말은 이렇지만, 두 남자 모두 기대 가득한 얼굴이었다.
“선도물산에 뼈를 묻을 줄 알았는데요.”
“하하. 저도요. 십수 년째 의류만 만지던 사람이 계열사 이동을 하다니. 하하.”
리셉션에서 안내받아, 비서실이 있는 27층으로 올라갔고.
딩동!
엘리베이터 앞에 황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구~ 선배님들! 어서 오십시오.”
와락!
윤현성 부장은 황 과장을 보자마자 꽉 껴안았다.
“이 사람아. 이게 얼마 만이야.”
“얼마만은요. 며칠 전에 결혼식장에서 뵈었잖아요.”
“아, 그렇지. 하하!”
윤 부장은 멋쩍은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회사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잖아~”
황 과장은 웃으며 안내했다.
“저 따라오시죠.”
두 남자는 황 과장을 따라가며,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선도그룹의 중심.
선도물산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황 과장이 말했다.
“다~ 사람 사는 곳입니다. 괜찮아요.”
비서실장 집무실로 안내했고.
똑. 똑.
[오셨습니다!]
지혁은 직접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하하.”
윤 부장은 지혁의 얼굴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 하던 대로 하세요.”
“······.”
비서실장 집무실에서 지혁을 만나니 위압감이 느껴졌고, 차마 말이 편하게 나오지 않았다.
지혁은 윤 부장 뒤에 선 남자에게도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개발팀장님. 아, 이제 아니죠. 고 차장님. 어서 오세요.”
“실장님, 안녕하세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혁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많이 놀라셨죠?”
“······.”
“오래전이긴 하지만, 어쨌든 예고해 드렸던 일이니까. 많이 놀라진 않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하하. 우선 보직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지혁은 윤 부장을 바라봤다.
“윤 부장님은 의전팀에서 근무하실 거고요. 황 과장님과 같은 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 차장님?”
지혁은 외모부터가 빡세게 생긴 고 차장을 바라보았다.
“네, 실장님.”
“고 차장님은 지원팀에서 근무하실 건데요. 거기 팀장이 좀······ 지랄 맞거든요?”
고 차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런 사람 얌전하게 만드는 게, 제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