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사람을 부르다 (2)
지혁은 고 차장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주 든든하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윤 부장과 고 차장이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지혁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전 두 분이 각각 의전팀장과 지원팀장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음?”
윤 부장은 놀라서 신음을 내었고, 고 차장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근데, 제가 비서실장이라도 마음대로 팀장 인사발령을 낼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윤 부장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유, 나도 관심 없어. 비서 업무에 대해 뭘 안다고 오자마자 팀장이야.”
그는 말을 뱉고 나서 지혁의 눈치를 보았다.
“말 편하게 해도 되나?”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끼리 있을 때는 괜찮아요. 하던 얘기 계속할게요.”
두 남자의 눈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현재 각 팀장은 오 부회장 사람들이에요.”
두 사람은 오 부회장과 지혁의 관계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눈만 끔뻑거리며 들었다.
“오 부회장이 그룹 내 최고 실권자인 건 아시죠?”
“알지. 회장님의 장남이고, 차기 회장이니까.”
이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안다.
“오 부회장은 비서실에 사람을 심고 회장님과 미래기획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데, 전 그걸 다 잘라내고 싶어요.”
“······.”
“그러기 위해선 두 분이 도와주셔야 해요.”
지혁은 두 남자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꼭 팀장이 되어 주세요.”
“······.”
“그러니까 인맥을 만들고, 명분과 당위성을 쌓아서 팀장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셔야 해요. 제가 인사발령을 내어도 오 부회장이 아무 소리 못 하도록.”
윤 부장과 고 차장은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도물산에서 계속 팀장으로 계셨는데. 팀원 자리는 성에 안 차잖아요.”
지혁이 농담 섞인 말을 하자, 윤 부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야. 난 팀원이 딱 맞아. 책임지는 자리는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윤 부장을 보며, 지혁은 피식 웃고는 고 차장을 바라봤다.
“고 차장님.”
“네, 실장님.”
“차장님께는 한 가지 더 요청할 사항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지원팀에 있다 보면 회장님 자택 출입을 자주 하게 되거든요?”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회장님 셋째아들, 오진원에 대해서 알아봐 주세요.”
“오진원?”
***
고 차장은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오진원은 오 회장의 자녀 중 한 명이지만, 대중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아무래도 설명할 필요가 있겠어. 이제 완전히 한배를 탄 거니까.’
지혁은 비서실장 집무실 문을 본 뒤, 황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문 좀 잠가주시겠어요?”
“네.”
찰칵.
황 과장이 문을 잠금 후.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독방 쓰니까, 비밀 얘기하기는 좋네요.”
“······.”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오 부회장을 대신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지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몰랐던 윤 부장과 고 차장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지혁은 두 사람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 부회장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목적과 앞으로 하려는 일들에 대해서.
“와······ 오 실장······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
얘기를 듣고 난 후, 윤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슨 영화 찍어? 굳이 회사생활을 이렇게까지 위험하게 해야 하는 거야?”
“······.”
“비서실장이라는 그룹 최고 실권자 중의 한 자리 차지했겠다. 회장님 가족으로 인정도 받았고, 거기에 신임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왜?!”
지혁은 잠시 얘기를 더 해줄까 고민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를 하면 더 혼란스러워진다.
오 부회장에게 본 보라색과 ‘그 세계’에 대한 얘기는 아직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지금, 오 회장님의 가족으로 밝혀지고 비서실장이 된 것처럼요.”
‘결과로 보여줄 거란 말.’
지혁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윤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뭔가 뜻이 있겠지.’
지금까지 본 지혁의 모습을 믿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오 실장. 근데 말이야.”
“네.”
“오 부회장을 끌어내리는 거? 그래 뭐,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렇다 쳐.”
“······.”
“근데, 왜 다음 사람을 굳이 찾아야 하는 거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네가 해도 되잖아.’
생각에만 이르렀을 뿐, 윤 부장은 차마 이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윤 부장이 우물쭈물하자, 지혁이 불렀다.
“윤 부장님? 왜 말을 하다가 마세요?”
“응? 아, 아니야. 내가 좀 착각했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긴장하셨나 보네. 비서 일 어렵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지혁은 황 과장에게 말했다.
“팀장들 연락해서, 새로운 팀원들 데리고 가라고 하세요.”
“네.”
황 과장은 곧바로 의전팀장과 지원팀장에게 전화했고.
의전팀장이 먼저 비서실장 집무실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오셨어요.”
지혁은 일어나서 윤 부장을 의전팀장에게 소개했다.
“선도물산에서 오신 윤현성 부장님이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윤 부장은 의전팀장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고, 의전팀장도 자신과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윤 부장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지혁은 의전팀장에게 말했다.
“선도물산의 에이스이십니다. 상품기획 팀장도 하셨고요. 일 잘하실 겁니다.”
“······.”
의전팀장은 대꾸하지 않고, 고 차장을 힐끔 보며 물었다.
“저분도 선도물산 출신입니까?
“용케도 아셨네요?”
지혁은 의전팀장이 비꼬려는 의도를 알고, 곱지 않게 대답했다.
“대놓고 자기 사람들로 채우시는군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불만이세요?”
“······.”
“간단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거예요. 지금 비서실의 최고 수장은 저예요.”
의전팀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나가보시죠.”
의전팀장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갔고. 윤 부장 또한 그를 따라 나갔다.
뒤이어 지원팀장이 들어왔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새로운 팀원 왔습니다. 고승윤 차장님이세요.”
고 차장은 지원팀장에게 인사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고승윤이라고 합니다.”
“어, 반가워요.”
고 차장은 사십 대 중반으로 비교적 젊은 편이다. 지원팀장보다 5~6살 정도 어리다.
“와~ 빡세게 생기셨다.”
지원팀장은 신규 직원을 받던 습관대로, 함부로 대하려 했고.
“실제로도 빡센데. 보여드려요?”
고 차장은 호랑이 눈깔을 뜨며, 지원팀장에게 대꾸했고.
꿀꺽.
지원팀장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려다가, 존댓말로 바꿔 말했다.
“흠! 저 따라오시죠.”
지혁은 지원팀장에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고 차장은 좀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하.”
***
선도캠퍼스 SDI 현장 지도 일정.
통상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비서실장은 회장이 외부 일정 중에는 본사에서 대기한다.
다만, 오늘은 윤 부장과 고 차장을 오 회장에게 소개하기 위해, 일부러 의전 일정에 참여했다.
자신과 황 과장이 왔을 때처럼, 어중이떠중이처럼 소개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오 회장은 현관 밖으로 나서다가, 지혁의 인사를 받고 깜짝 놀랐다.
“어? 오 실장이 여기 웬일인가?”
“의전 일정 직접 모시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일정이 짧아서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 그래. 나야 좋지.”
오 회장은 반가워하며 웃었고.
지혁은 윤 부장과 고 차장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두 남자는 쭈뼛쭈뼛 다가왔다.
오 회장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번에 비서실에 새로 온 팀원들입니다.”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자기소개했고, 오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선도물산에서 왔다고?”
“네! 맞습니다!”
윤 부장이 대답했다.
“그럼 비서실장과 아는 사인가?”
이 물음엔 지혁이 대답했다.
“네, 윤 부장은 저와 같은 팀에 있었고, 고 차장은 협조부서에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저와 여러 일을 같이했었습니다.”
“흠~ 그래.”
오 회장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도물산 출신이라니까 믿음이 가는군.”
오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지혁을 보며 말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황 과장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 실장님 덕분에 선도물산 출신들 중앙진출 많이 하겠는데?’
선도캠퍼스 SDI 현장 지도 일정을 끝마친 뒤.
자택에 복귀하여, 비서실 직원들 다 모인 앞에서 오 회장이 말했다.
“오 실장.”
“네, 회장님.”
오 회장은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좀 피곤하군, 내일 좀 쉬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일정 조정하겠습니다.”
오 회장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말했다.
“아니, 조정할 필요는 없고, 자네가 나 대신 주관해.”
“네?”
의전팀장과 지원팀장. 다른 팀원들도 모두 놀랐다.
‘회장님이 웬만해서 대리 업무는 안 시키시는데.’
‘전 비서실장님께도 그런 지시는 몇 번 없으셨어.’
‘오 실장님이 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지혁도 부담스러웠기에,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하루만 일정을 늦춰서······.”
오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일 선도화재 경영 보고가 있잖아. 그건 더 미룰 수 없어. 서로 일정이 안 맞아서 계속 못했거든. 자네도 알잖아.”
“네······ 그렇긴 하지만.”
오 회장은 씩 웃고는 말했다.
“난 감당하지 못할 사람한테는 일 안 시켜.”
“······.”
“오 실장 하던 대로 하면 돼. 덕분에 난 맘 편하게 좀 쉬자고.”
지혁은 잠시 고민하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윤 부장은 지혁과 오 회장의 대화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네. 지혁이가 엄청나게 잘 나가는구나.’
고 차장 또한 그룹에서의 지혁의 위상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
그날 저녁.
그룹 비서실에서 다시 만난, 선도물산의 용사들은 호프집에서 뭉쳤다.
“지혁아.”
“네~ 선배님.”
윤 부장의 부름에 지혁은 다정하게 대답했다.
“나 앞으로 너한테 존대할게. 적어도 일할 때는.”
“네? 왜요?”
윤 부장은 오늘 봤던 지혁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 내가 편하게 대할 레벨이 아니야.”
“하하. 난 편한 게 좋은데.”
“내가 안 편해서 그래.”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 좋을 대로 하세요~ 호칭이 뭐 중요한가요.”
이리저리 술잔을 주고받다가.
지혁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황 과장님.”
“네?”
“제가 얘기 안 했죠?”
“뭘요.”
“황 과장님 승진하는 거요.”
“네에?!”
황 과장은 놀라서 머금고 있던 술을 입가로 흘렸다.
“지난 선도캠퍼스 간담회 때 여러 역할 잘 해주셨잖아요. 다음 주에 정기 승진 발표가 있는데. 그때, 차장 승진되실 거예요.”
“우왓~!”
황 과장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하하! 와~ 대박! 실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와~ 35살에 차장이라니! 하하하!”
황 과장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내에게 전화하러 달려갔다.
“실장님! 잠시만요!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우와~ 대박!”
방방 뛰어가는 황 과장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보고 있는 윤 부장과 고 차장. 지혁은 그 둘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제대로 일했으면 보상받아야죠. 안 그래요?”
“······.”
두 남자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비즈니스에 대가 없는 충성은 없는 법.’
지혁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