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그럴만한 일들
보라색.
오 회장 이마에서 보라색을 보았다.
지혁이 그토록 경계해 온 보라색의 사람.
선도그룹을 최정상 기업으로 이끌어온 오 회장의 이마에 보라색이 있었다.
‘이건 뭐지······.’
혼란스러웠다.
보라색의 사람은 주변 인물을 다 위험으로 빠뜨려야 한다.
보라색의 남자는 분명 그랬었다.
“오 실장. 괜찮나? 갑자기 안색이 왜 이래?”
오 회장은 놀라서 물었지만.
지혁은 대꾸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동안 본인이 믿고 있었던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혹시 ‘그 세계’와 ‘현실 세계’는 다른 건가?’
지혁은 오 부회장을 떠올렸다.
행동, 태도, 그리고 그에 대한 소문.
아무리 생각해도.
영락없이 ‘그 세계’에서 동료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캡틴과 너무 비슷했다.
‘잠깐······ 진정하고 다시 보자.’
“회장님, 이마에 뭐가 묻으셨네요.”
“그래?”
“제가 떼어드리겠습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싶어서, 오 회장 코앞까지 다가갔다.
“······.”
지혁은 떼어내는 시늉을 하며, 이마에 시선을 가져갔고.
오 회장은 가만히 있었다.
‘다르다. 미세하지만, 뭔가 달라.’
보라색이지만, 캡틴과 오 부회장에게서 본 것과는 달랐다.
그 두 사람에게서 본 보라색은 자주색(purple)에 가까웠다. 자주색은 붉은빛이 많이 도는 보라색이다.
하지만 회장에서 보이는 보라색은 푸른빛이 많이 도는 보라색, 즉 청자색(violet)이었다.
두 색깔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같은 보라색으로 인식되지만, 겹쳐놓고 보면 확연히 다른 색상이다.
자주색은 어둡고, 청자색은 쨍하며 밝은 보라색이다.
이 자리에 오 부회장이 함께 있었다면, 지혁은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계열은 같지만, 분명 다른 색이야.’
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도그룹에 복직해서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이 부정당할 뻔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색은 본 적이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색이 겹친다.
오 회장에게서 본 청자색은 난생처음 보는 색이었고, 비슷한 색을 본 적도 없었다.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지혁은 일일보고 하려고 가져온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
“왜 이렇게 오래 떼나? 그렇게 많이 묻었어?”
이마에 붙은 거 떼주겠다며 가까이 와서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는 지혁에게 물었다.
“이제 됐습니다.”
지혁은 뒤로 물러선 뒤 오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얘기해. 그냥 물어보면 되지, 우리 사이에 뭘 뜸을 들이나?”
“회장님께서는 직원들 얘기에 귀를 잘 기울이시지 않습니까?”
“흠······ 그러려고 노력하지.”
“원래부터 그러셨습니까?”
오 회장은 이 질문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혁이 생각하는 보라색의 가장 큰 단점은 다른 사람 말을 안 듣는 거였고, 그다음이 급진적인 성향이다.
오 회장은 경청의 리더십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같은 보라색 계열이지만, 오 부회장과는 매우 반대되는 이유가 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알고 묻는 말이냐?”
“네?”
“흠.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 근무한 최측근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얘기를 했다.
“네 아버지 내보내기 전까지는 전혀 안 그랬었다.”
“······.”
“독불장군이란 소리 많이 들었고, 무조건 내 말이 옳다는 독선적인 성향이 강했지. 난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
“······.”
“젊은 나이에 거대한 한 걸 손에 움켜쥐니까, 건방졌던 거지. 치기랄까.”
오 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장자의 권리를 차지하는 방식에서도, 난 주변 얘기를 듣지 않았다. 종원이를 내치는 게 최선은 아니었는데······.”
“······.”
“후회 많이 했어.”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얘기를 이어갔다.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게 있고, 뒤늦은 후회였지. 하지만, 자네 아버지 덕에 난 변했고,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할 수는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당시 일로 인한 큰 충격으로, 오 회장은 변한 것이다.
지혁은 얘기를 들으며, 아버지와의 문제로 인해 오 회장의 색깔이 변한 것으로 판단했다.
“종원이한테 여러모로 빚진 게 많아. 내가 만약 지금도 젊을 적의 성격이었다면······ 과연 회사가 지금처럼 유지되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오 회장의 속마음이 들춰졌다.
“지금 진양이가 그때의 나와 비슷하거든.”
“······!”
지혁은 이 얘기에 깜짝 놀랐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는 그가 오 부회장에게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걔 좀 위험해. 그래서 네가 옆에서 잘 잡아줬으면 하는 거야. 종원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럼 저도 때 되면 나가라는 말입니까?”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날카로운 말이 나갔고.
오 회장의 표정은 굳어졌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네가 가긴 어딜 가냐.”
“······.”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데.”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오 부회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으로 지혁은 오 부회장에 대해 고민하는 마음이 들었다.
준비를 해나가다가 적절한 시점에 뒤집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래서 잘 있지 않은 성공사례는 모르는 게 나은 거야.’
학교 수업만 충실히 해서 서울대 가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건 극소수의 이야기이며, 일반인이 그 생각으로 따라 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오 회장의 색깔이 바뀐 건, 그보다 더 어렵고 드문 일이다.
색깔이 좀 진해지거나 연해지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색의 구성이 바뀌어 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능성 적은 일에 연연하지 말자. 계획대로 가는 거야.’
지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흔들릴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좀 두고는 보자.’
***
그날 저녁.
“회장님 정말 저 먼저 가봐도 되겠습니까?”
“어~ 가라니까. 약속 있다고 했잖아.”
지혁은 오 회장보다 먼저 퇴근한 적이 없기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제수씨랑 네 처는 집에 언제 데리고 올 거냐?”
“네?”
지혁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조만간······.”
“너 조만간이라 말한 지 벌써 한 달 지났다. 빨리 시간 잡어.”
“······네.”
지혁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오 회장은 지혁이 나간 문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똑. 똑.
[회장님~ 접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 부회장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배고프잖아.”
최 부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일거리 많이 주셔서 그렇죠. 저도 내일모레면 칠십이거든요?”
오 회장은 육십 중반의 최 부회장을 보며 말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가세!”
30년 지기의 두 사람은 가끔 이렇게 저녁 식사 자리를 갖는다.
젊었을 적에는 매일 야근 후에, 함께 술 한잔하고 집에 갔었는데.
오 회장이 그룹의 오너가 된 이후부터는 식사 자리를 갖는 게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술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최 부회장이 지혁의 얘기를 꺼냈다.
“비서실장이요.”
“어~ 지혁이?”
지혁이 얘기만 나와도 오 회장은 미소를 머금었고, 최 부회장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좋아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구나.’
“너무 힘 실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음?”
“간혹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던 강 전무보다도 더 신임하시는 거 같아서.”
“하하.”
오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오 회장은 단순히 핏줄이라고 해서 챙기는 타입은 아니다.
오 회장의 형제가 오종원 이사만 있는 게 아닌데, 그룹 주요 자리에 친척들이 없는 것만 봐도.
“빚진 마음 때문에 그러십니까?”
오 회장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전혀 없진 않지.”
“······.”
“근데, 지혁이가 잘하잖아.”
오 회장은 사적인 자리에서 비서실장이 아니라, ‘지혁’이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최 부회장은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지혁이 무슨 술수라도 벌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 부회장은 술자리도 무르익었겠다. 살짝 찔러보는 말을 해봤다.
“직원들이 비서실장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
“제가 봤을 때는 타고난 리더 같거든요. 한번 경험한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믿고 따릅니다.”
최 부회장은 곁눈질로 오 회장의 반응을 살폈고.
그의 이마에 힘줄이 약간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그렇군. 나야 지혁이가 아랫사람 어떻게 대하는지는 잘 모르니까.”
“······.”
“옆에서 진양이 보좌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
오 회장의 확고한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일주일 뒤.
선도본관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이 터진 것이다.
“미친놈들······ 결국······.”
최 부회장은 욕설을 뱉으며, 미래기획실 참모들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전략팀장, 보고서 준비해. 1페이지로 압축해서.”
“네!”
“홍 팀장은 빨리 언론사 대처하고.”
“네!”
“인사지원 팀장은 미국 출장 스케줄 알아봐.”
“언제로 알아볼까요?”
“언제긴! 가장 이른 날짜지.”
최 부회장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혁이 나타났다.
“준비되셨어요?”
지혁의 물음에 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빠르게 회장실로 향했다.
“오 실장, 이걸 어쩌면 좋을까?”
결국, 피치사는 특허침해로 제소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내었고.
마지막으로 경영자 미팅을 선도전자에 제안했다.
“미팅 제안한 거 보면, 대화할 의지는 있는 겁니다.”
“협박하려는 의도라면?”
“그럼 무시하면 되죠.”
최 부회장은 약간 격양된 얼굴로 말했다.
“자네 이 일을 쉽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소송 전으로 가면 손해가 얼마나 막심할지 아나?”
“경험 안 해봤으니 모르죠. 다만, 지금 상황에 맞는 일을 할 뿐입니다.”
지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똑. 똑.
[들어와!]
회장 집무실로 들어가니, 오 부회장도 있었다.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최 부회장은 피치사 특허 제소건 관련하여 브리핑한 후, 현재 선도전자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오 회장은 얘기를 다 들은 후.
“그러니까, 협의하고 싶으면 오라는 거지?”
“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최 부회장이 대답했고, 뒤이어 지혁도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피치사와 특허 관련 합의할 생각이 없는 게 저희 입장입니다. 그래도 만나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 부회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예상 못한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흠······.”
오 회장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최고경영자 미팅을 요청했단 말이지.”
“네.”
“난 미국까지 가는 건 자신 없어.”
오 회장이 고령임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오 부회장이 가도 충분하지 않을까?”
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회장님 대리인 자격으로 충분합니다.”
오 부회장이 선도그룹 오너가 될 거라는 건,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 오 부회장이 가는 걸로 하고.”
오 부회장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그리고 오 회장은 지혁을 불렀다.
“비서실장.”
“네.”
“자네도 오 부회장 보좌해서 미국 갔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