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강 대 강 (1)
지혁은 당혹스러웠다.
‘오 부회장을 보좌하라고? 내가 왜?’
그런데······.
“싫습니다!”
지혁이 거부 의사를 펼치기도 전에 오 부회장이 격정적으로 말했다.
“싫다고? 왜?”
오 회장의 물음에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비서실장 있습니다. 출장 가면 당연히 우리 비서실과 함께 가지, 왜 회장님 비서실을 대동하고 갑니까?”
“······.”
“회장님 비서실장은 회장님 곁에 있어야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오 부회장의 태도가 유쾌하진 않았지만, 지혁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오 부회장이 비서실이 없다면 모르겠는데······ 굳이.’
하지만 오 회장은 완강했다.
“뭔가 좀 오해하나 본데.”
그는 힘주어 말했다.
“최고 결정권자 미팅이지, 부회장 미팅이 아니야.”
“······.”
“부회장은 날 대신해서 가는 거지, 엄밀히 말해서 자네 일이 아니라고.”
지혁은 잠자코 있었다.
“이번 일에 비서실장은 부회장을 보좌하지만, 내 대리인으로서의 성격도 있네.”
오 부회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오 회장이 이렇게 말하니,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야.”
명확하게 못을 박아버렸고.
그걸로 논의는 끝났다.
최 부회장은 옆에 이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신임이 대단하네. 오 실장이 통찰력은 있지만, 거기 가서 뭘 할 게 있을까. 굳이 함께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 회장은 최 부회장에게 말했다.
“자네도 같이 가야지?”
“저도요?”
“그룹의 위기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미래기획실장이 빠져서야 되겠나.”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선도그룹의 최고 실권자 세 사람이 함께 출장을 간다.
오 회장은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 부회장.”
“네.”
“이번 출장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자네지만, 최 부회장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해.”
오 회장은 그의 성향을 잘 알기에, 다짐받아두려 했다.
“최 부회장이 자네 의견에 반한다면, 반드시 다시 생각하란 말이야. 알겠어?”
“······네.”
오 부회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
선도전자에서는 오진양 부회장 등 6명.
선도본관에서는 최재훈 부회장, 오지혁 비서실장 등 4명.
출장 인원은 총 10명이다.
미팅 스케줄, 식사 장소 등의 출장 일정은 선도전자 비서실에서 진행했으며.
피치사와의 미팅 전략은 최 부회장의 미래기획실이 맡았다.
회장 비서실에서는 지혁 외에 의전팀에서 한 명 더 차출하여, 윤 부장이 함께 간다.
물론, 지혁이 지목한 것이다.
“나 근데 뭐해야 해? 저쪽 비서실에서 다 준비하는 거 같은데.”
윤 부장의 물음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은 가서 미국물만 드시다가 오면 돼요. 제가 예전에 고생 많다고 비행기 태워드린다고 했잖아요. 홍썬라인 준비할 때.”
“와······ 그걸 기억하는 거야?”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입 밖에 낸 말은 지킨다니까요.”
“근데 이런 식으로 지킬 줄은 몰랐네. 안 지켜도 되는데.”
윤 부장은 부회장 두 명과 함께 가는 이 일정이 참 부담스러웠다.
출국일.
이번에도 전용기로 간다.
오 부회장 또한 해외 일정이 많기에, 전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와······.”
전용기 뒤쪽에 앉은 두 사람.
전용기를 처음 타보는 윤 부장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혁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고.
“끝내준다. 진짜.”
지혁은 웃으며 그를 불렀다.
“부장님.”
“응?”
“전용기부터 시작이거든요?”
“뭐가.”
“기본적으로 여긴 녹음 기능이 차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듣고 잘 기억하세요.”
“그러니까, 뭘.”
“선도전자 사람들이 부회장에 대해 하는 얘기들이요. 아마 제 앞에서는 입을 다물겠지만, 부장님 앞에서는 얘기를 편하게 할 거란 말이에요.”
“······.”
“오 부회장에 대한 직원 여론을 확인해 달라는 거예요. 혹시 신변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면 더 좋고요.”
윤 부장은 가자미눈을 뜨고 말했다.
“뭐야······ 편하게 생각하고 미국물 먹고 오면 된다며.”
“하하. 일은 하시면서 물 드셔야죠.”
윤 부장은 더 대꾸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놀랍지도 않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윤 부장은 눈치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다. 그는 인간 녹음기로 지혁에게 선택된 것이다.
비행기 이륙 후, 30분 뒤.
“비서실장!”
앞쪽에 앉은 최 부회장은 지혁을 불렀고.
지혁은 윤 부장에게 말했다.
“갔다 올게요.”
“네, 실장님 다녀오십시오.”
지금은 최 부회장 부름에 다른 직원들이 주목하고 있어서, 윤 부장은 상급자에 대한 예우로 깍듯하게 대답했다.
미국으로 가는 동안 지혁은 최 부회장, 오 부회장과 함께 작전회의를 했다.
긴 시간 동안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의견을 주고받는 세 사람을 보며, 윤 부장은 생각했다.
‘대단들 하다. 괜히 저 자리에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딱해 보였다.
‘그래도, 부럽지는 않아. 아~ 보기만 해도 피곤해. 난 지금이 딱 좋아~’
안대를 하고,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싫지만, 팀장직도 내려놓았고, 윤 부장은 요즘 회사생활이 참 행복했다.
***
JFK공항에 도착.
뉴욕법인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세 사람의 토의는 계속되었고.
오 부회장은 보고서에 있는 금액을 펜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난 이 정도 선은 넘어서면 합의가 맞는다고 보는 거예요.”
오 부회장은 일을 크게 키우지 말자는 쪽이었다.
“소송 전 치르면 어차피 선도전자가 다 해야 하는데. 그거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세요?.”
“······.”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일본 등 무려 9개국에서 소송을 치렀었다고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쟁은 피하는 게 가장 상책이긴 합니다만.”
“······.”
“그래도 굴복은 아니죠.”
오 부회장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경험도 없으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쉽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죠.”
미팅 전략에 대해 오 부회장과 지혁은 이견을 보였고.
비행기에서도 내내 서로 으르렁거렸다.
최 부회장은 이런 두 사람을 보며.
‘비슷한 듯하면서도, 상극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생각했다.
‘비슷해서 상극인가? 자석에서 같은 극끼리 밀어내려 하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오 부회장과 한자리에 앉아서, 의견을 주고받는 지혁이 참 신기해 보이기도 했다.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떠올려보면 딱히 생각나는 계기가 없었다. 어느샌가, 지혁은 이 자리까지 와 있었다.
더 듣다 못한 최 부회장은 두 사람을 제지했다.
“자자. 두 사람 의견은 알겠고. 그건 상황 파악해서 제가 잘 결정할 테니까.”
“무슨 소리예요? 그걸 왜 최 부회장이 결정해요? 최종결정권자는 난데.”
“······.”
틀린 말은 아니기에, 최 부회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상대하기 피곤했다. 비행기에서부터 내내 이러며 왔더니.
“곧 있으면 도착하는데, 조금만 쉬시죠. 조용히 좀 갑시다.”
“······.”
잠시 후. 선도전자 뉴욕법인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뉴욕 법인장과 수십 명의 직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 부회장이 가장 먼저 내려서 인사했다.
“법인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어서 오 부회장이 차에서 내렸고.
그 얼굴을 보자, 직원들은 일제히 얼굴이 굳어져서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법인장님.”
오 부회장이 부름에, 법인장은 뛰듯이 걸어왔다.
“화단에 꽃 좀 심으라니까요. 내가 뭐 어려운 거 얘기했나요? 사소한 것 하나가 방문자들 이미지에 각인된다고요.”
“심었는데······.”
“심었으면 뭐 해. 다 시들었는데. 부회장이 오는데도 이 정도면, 평소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요?”
오 부회장은 도착하자마자 사소한 걸로 트집이었다.
-어머!
-저분······.
-진짜구나. 오셨어.
-환영합니다!
지혁이 차에서 내리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 주변에 몰려들었고.
지혁은 당황해서 다시 차로 들어갈 뻔했다.
-비서실장님! 환영합니다!
-선도캠퍼스 간담회 너무 잘 봤습니다!
-덕분에 회사생활 하기 너무 좋아졌어요~
-너무 멋지십니다~
선도캠퍼스 간담회는 직원들이 볼 수 있도록 내부망 홈페이지에 녹화된 영상이 올라가 있다.
뉴욕법인에서도 당연히 그 영상을 보았으며, 미래기획실에서 TF팀을 구성하여 진행한 일들이 이곳까지도 영향이 있었기에 변화 또한 체감하고 있었다.
“과찬의 말씀을······.”
지혁은 열정적으로 인사하는 직원들 사이로 뚫고 들어갔고.
곧 법인장과 마주 섰다.
“비서실장님 어서 오십시오. 영광입니다.”
‘너무 과한데. 나도 영광이라고 말해야 하나.’
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네, 저도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 똑같이 화답해 주었다.
서로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다가. 법인장이 물었다.
“아, 비서실장님 영어 하는 데 불편함은 없으시죠?”
“못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지혁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몸 자체가 만국 공통어이기 때문에, 언어를 할 줄 아냐는 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영어는 리스닝과 리딩엔 강했다. 입사 준비할 때 토익 공부 많이 했었으니까.
법인장은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회장님 조카분이 영어를 못한다고?’
“그럼 통역사를 붙여 드릴까요?”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왜요? 도와달라고 하시죠.”
윤 부장이 옆에서 지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영어 못한다면서? 나도 못 하는데?’
“통역사가 왜 필요합니까. 풀바디랭귀지가 있는데.”
‘뭔 소리야?’
윤 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
피치사와의 미팅 4시간 전.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들어가서 상황설명부터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소 직전이란 말이죠?”
오 부회장의 물음에 법인장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법인에서는 뭘 했습니까?”
“네?”
“상황을 보고만 있었던 아니죠?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물었습니다.”
법인장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거야 그쪽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여야 저희도 대응을······.”
오 부회장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상대방이 위협적인 행동을 벌이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기다리기만 한다고요?”
“······.”
“칼자루를 쥐고 있으면, 칼자루를 뺏든가, 아니면 먼저 공격을 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찔리고 난 뒤에 대응해야 하는 건가요?”
오 부회장은 강도에 비유하여 설명했고, 법인장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뭐라도 했어야죠. 하~ 참 답답하네. 도대체 여기 법인이 있는 이유가 뭐예요? 상황 전달만 하라고 둔 줄 아세요?”
“······.”
“그들이 요구하는 게 법문상 맞는 건지도 확인했나요?”
분위기는 숙연했으나.
지혁은 오 부회장을 새삼 다시 봤다.
‘꽤 날카롭네?’
지위를 등에 업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있었는데.
판세를 읽을 줄 알며, 머리도 좀 쓸 줄 알았다.
“In the text of the law, it is written that it must be something that cannot be easily copied in consideration of novelty and progressiveness.”
(법문상에서는 신규성, 진보성을 고려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적혀있다.)
갑자기 영어를 하지 않나.
게다가 발음에 버터 향이 가득했다.
지혁은 바디랭귀지와 리스닝의 강자이기에 다 알아들었고, 오 부회장이 꽤 스마트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미팅 1시간 전이 되었다.
“피치 뉴욕지사까지 얼마나 걸려요?”
“여기서 20분 거리입니다. 가깝습니다.”
“지금 갑시다.”
게다가 오 부회장은 상당히 의욕적이었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어딘가 좀······.’
지혁은 그가 불안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