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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42화 (142/301)

142. 강 대 강 (2)

오후 2시 30분.

피치사와의 예정된 미팅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셨죠?”

금발의 여성이 부드러운 영어 발음으로 우리에게 물었고.

앞선 법인장이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선도전자에서 왔습니다.”

“너무 일찍 오셨네요.”

여직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좀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네요.”

“······.”

비즈니스에서 약속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지각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오는 것 또한 결례다. 상대방의 시간을 뺏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법인장은 오 부회장 눈치를 봤고.

‘표정이 안 좋은데.’

법인장은 여직원에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저희가 좀 일찍 온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팅 장소에서 기다리기도 어려울까요?”

여직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기다려 주셔야 하겠습니다. 미팅 장소는 미팅 시간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법인장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휴······ 그러게, 시간 맞춰서 오자니까.’

오 부회장이 하도 채근해서 오긴 했으나, 법인장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다.

미국 문화가 그렇고, 더욱이 피치사와 같은 글로벌 기업은 원칙에 철저하니까.

답답한 듯 지켜보던 오 부회장이 앞으로 대뜸 나섰다.

“I am the vice president of Seondo Electronics.”

(나 선도전자 부회장인데.)

여직원은 그런 오 부회장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딱 이 표정이었고. 누구든 그녀의 심정을 쉽게 읽을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오 부회장에게 그런 눈치는 없었다.

“들어가서 기다릴게요.”

“NO.”

선도전자 부회장에 대한 여직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오 부회장은 뒤에 있는 선도그룹 직원들을 힐끔 보고는 다시 말했다.

“선도전자 부회장이라니까요.”

“죄송하지만,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그는 흥분이 올라오는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미팅하려고 비행기를 몇 시간 타고 온 줄 알아요? 그런 손님한테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약속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요. 선도전자에서 일찍 오신 겁니다.”

여직원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지만, 어림없었다. 조금의 여지도 없어 보였다.

오 부회장은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감히 나를?”

선민의식이 강한 오 부회장.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것도 선도그룹 직원들 보는 앞에서.

***

2시 55분.

미팅 시간 5분 전에 미팅 장소로 안내받았고.

오 부회장은 시작부터 얼굴이 썩어 있었다.

“괜찮을까요?”

지혁은 오 부회장을 자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파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색’을 알고 있다.

지금의 그가 위험해 보였다.

지혁의 물음에 최 부회장이 의외라는 듯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오 부회장 알아?”

“표정에 드러나잖아요.”

“흠······ 무슨 짓 할지 몰라. 조심해야 해.”

최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오 부회장에게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남의 말 다 무시하고, 굳이 일찍 가자고 하더니. 시작부터 기분 잡치고······ 하여간 사람 말 더럽게 안 들어.”

“······.”

“자네는 저러면 안 돼.”

“네? 아, 네.”

지혁은 덕담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How are you?”

3시 정각. 피치사의 최고 수장, 톰 쿡이 나타났다.

이 자리에 오 회장이 오지 못하여, 과연 톰 쿡이 나타날까 싶었는데.

그의 등장으로 피치사는 오 부회장을 ‘회장급’으로 인정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톰 쿡은 오 부회장을 알아보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네, 근데 기다리게 하더라고요.”

“네?”

톰 쿡은 의아한 눈빛으로 주변 참모들을 돌아보았고.

최 부회장이 나서서 설명했다.

“하하. 저희가 좀 일찍 도착했었습니다. 그 얘기하는 겁니다.”

“아~ 하하. 그러셨군요. 우리 직원들이 원칙에 너무 엄격하죠?”

톰 쿡은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었고, 직원을 두둔하며 부드럽게 넘어가려 했다.

오 부회장이 한마디 더 하려 했지만, 최 부회장이 말로 막았다.

“저희가 멀리서 와서 피곤하거든요. 할 얘기 빨리 나누고 싶은 마음에 좀 서둘러 왔습니다. 하하.”

톰 쿡은 웃으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피치사에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쟁점 부분을 의제로 제시했고.

이에 대해 실무진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접점을 찾기 힘들었으며, 서로의 견해 차이가 너무 달랐다.

가장 큰 쟁점은 특정 부분에 대해 ‘이걸 기술 침해로 볼 것이냐?’였는데.

지금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그다음은 만날 장소는 법원일 수밖에 없다.

피치사 또한 선도전자와 7년 소송을 해봤기에, 소송만은 피하려는 생각이 강해 보였다.

“기술 침해 부분은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 쓰리핑거줌(three finger zoom)은 엄연히 특허 등록된 피치사의 기술이거든요.”

피치사 실무자의 의견에, 선도전자 실무자도 받아쳤다.

“쓰리핑거줌을 말씀하셨는데, 피치사에서 특허로 등록한 모든 조건을 만족해야겠죠. 상황에 따라 쓰리핑거줌 사용하는 방식이 다를 텐데, 비슷하다고 해서 일괄적으로 기술 침해라고 묶을 순 없는 거죠.”

‘쓰리핑거줌’은 스마트폰 화면을 세 손가락으로 확대, 축소를 하는 걸 말하는데. 투핑거보다 세부적인 조정이 가능한 기능이다.

“그리고 그걸 과연 특허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 말에 피치사에서 발끈하여 말했다.

“기준과 근거로만 얘기했으면 합니다. 불필요한 말씀은 불쾌하게 들립니다.”

지혁은 이들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는데.

리스닝은 자신 있기도 했고, 풀바디랭귀지 스킬까지 동원하여 못 알아듣는 얘기는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약간 억지스럽긴 해.’

그리고 피치사의 실무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이 한 동양인 남성에게 자주 물어보는 게 보였다.

‘혹시 저 사람이 개발자인가?’

‘그 세계’에서 발달한 육감.

청각을 극대화하여 더 유심히 들어보니, 두 사람은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피곤하다. 이러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지혁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다.

“익스큐즈미.”

지혁은 손을 들었다.

“제가 저분에게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혁은 일본인을 가리켰고.

피치의 실무자는 약간 당황하여 말했다.

“이 분은 영어를 못합니다.”

“괜찮습니다. 전 대화할 수 있습니다.”

지혁은 손과 얼굴 근육을 풀면서 말했다.

***

아무 말 않고 듣고만 있던 오 부회장은 지혁이 나서자 이상하게 바라봤다.

‘영어는 못하면서 일본어는 할 줄 알아?’

“간단한 거 하나만 물을게요?”

근데······ 지혁은 갑자기 한국말을 했다.

오 부회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지?’

그뿐만이 아니라,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황당한 얼굴이었고.

일본 개발자도 눈을 끔뻑였다.

“개발자시죠? 그냥 당신 나라말로 하면 돼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혁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보이는데.

참 신기하게도, 귀 막고 들어도 알아먹을 것 같았다.

일본 개발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혁이 세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쓰리핑거줌 기술 특허에 대해, 개발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일본 개발자는 피치 실무자 눈치를 본 후 말했다.

“특허죠. 문서화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세 손가락 말고, 세 발가락으로 늘렸다 줄이면 특허 침해 아닌가요? 혹은 손, 발도 아닌 세 개의 도구를 이용한다든지.”

“네?”

일본 개발자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지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쓰리핑거지, 쓰리토스 혹은 쓰리툴스는 아니잖아요.”

“그, 그렇기야 하죠.”

“소비자들의 행동을 특정할 수가 있을까요? 혹시, 확대와 줌 자체가 모두 특허라고 얘기하실 건 아니시죠?”

“······.”

일본 개발자는 대꾸가 없었고.

선도전자 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치사 측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들 또한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까.

만국 공통어, 풀바디랭귀지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 프로에 나가야 할 정도인데.’

최 부회장은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베트남에 이어 두 번째 봤지만,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바디랭귀지가 이렇게 디테일할 수가 있는 거야?’

상식으로 파고는 드는 의견.

거기에 마술 같은 바디랭귀지로 분위기는 확 바뀌었고.

피치사의 태도가 달라지면서 협의는 순조로워졌다.

‘비서실장이 큰일 했네.’

최 부회장은 생각했다. 지혁이 딱히 한 건 없지만, 분위기를 바꿔버렸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야구에서 호수비 하나가 흐름을 바꿔놓은 것처럼 말이다.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되어가던 중.

“이건 아니야.”

‘음?’

갑자기 한국어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이건 아니지. 이렇게 되어선 안 되지.”

오 부회장이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법인장님.”

법인장은 불길한 눈길로 오 부회장을 바라보았고.

오 부회장은 짓이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 끝내세요. 그 어떤 협의도 할 수 없다고.”

***

오 부회장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최 부회장이 급하게 그를 말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놓으세요.”

“갑자기 왜 이러세요?”

“최 부회장님이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데요. 이번 일은 합의하면 안 된다는 입장 아니셨어요?”

“······.”

합당한 기술특허 부분은 사용료를 내고, 보편성이 인정될만한 부분은 더 묻지 않고 넘어가는 걸로 합의되기 직전이었다.

지혁은 이런 오 부회장의 급발진이 너무 황당했다.

‘오늘 오전만 해도 합의 보자던 사람이······.’

오 부회장은 소송전 출혈이 심하다며, 어떻게든 합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해왔었다.

‘그것도 톰 쿡까지 있는 앞에서······.’

지혁은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최 부회장은 많이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오 부회장이 일어나려 할 때, 바로 붙잡은 거 보면,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던 걸로 보여졌다.

“선도전자가 어떤 회사입니까? 난 이 일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합의 못 해요!”

지혁은 이 난리를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선도그룹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순간.

지금 오 부회장의 결정으로 인해, 그룹은 손해를 보고 오 부회장의 입지는 흔들릴 수 있다.

어찌 보면, 지혁에게는 기회일 지도 모를 상황.

지혁으로서는 할 일은 다 했다. 비서실장으로서 역할도 했으며, 회의에서는 선도전자에 유리한 분위기로 바꿔보려고 개입도 했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었어.’

‘그 세계’에서 캡틴이 전쟁을 결정했을 때.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은 내 역할이 아니라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해야 할 몫은 결정된 전쟁을 잘 수행하는 거로 생각했었다.

“최 부회장님 이거 놓으세요. 난 그렇게 결정했다니까요.”

최 부회장은 일어선 그를 앉히려 했고. 오 부회장은 계속 손을 뿌리치려 했다.

오 부회장은 지금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처음 리셉션에서 일개 여직원에게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하였다는 생각으로. 배알이 꼬여 있던 것이다.

평소엔 이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급진적인 성향이 자신을 스스로 분노케 했고.

지금, 어이없는 결정으로 모두를 불행해 빠뜨리려 했다.

‘그때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지혁은 눈을 부릅떴다.

“부회장님!”

소리를 버럭 질렀고.

압도적인 분위기에 모두 지혁을 바라봤다.

오 부회장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혁을 바라봤는데.

지혁의 검지가 그의 눈앞에서 아래 방향을 향해 까닥거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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