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중재
오 부회장은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의 눈앞에서 까딱이는 검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지금······.’
피치사와 선도그룹 직원들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지금 나한테 지시를 한 거야?’
오 부회장은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나한테 이러면······.’
드디어 오 부회장의 입이 열렸다.
“야, 미쳤어?”
“미친 사람 막으려면 같이 미쳐야죠.”
“뭐?!”
오 부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은 한국말로 대화 중이지만, 피치사 직원들도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코리언 스타일?’
‘한국 회사는 상, 하급자 관계가 엄격하다고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이렇게 프리하진 않아.’
선도그룹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국위 선양은 못 할망정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아무리 한국말이라도 싸우는 건 눈치챌 텐데.’
‘비서실장님은 부회장님한테 저래도 되는 거야?’
‘부회장님이 미친 짓 하긴 했어. 상황에도 안 맞고, 이해도 안 되고.’
오 부회장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지혁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해고해 줄까? 너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와 나는 이러면 안 되는 관계야. 내가 사용자라고.”
“회의 내용에 관해 얘기하는데,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나?”
“하, 이놈 봐라.”
“일이나 똑바로 하면서, 사용자네 뭐니 그런 소리 하라고요.”
급기야 지혁은 험악하게 말했고.
오 부회장은 바로 대꾸하려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말을 삼켰다.
지혁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눈에서 시퍼런 불이 뚝뚝 떨어지고, 몸 전체에서 살벌한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뭐지? 얘가 설마······.’
지혁이 그 어떤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오 부회장은 위협을 느꼈고.
그런 감정을 느낀 게 불쾌했다.
“네가 아주 막 나가는구나.”
“미친 짓 막으려면 뭔 짓을 못 할까요.”
지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익스큐즈미.”
최 부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치사 측에 영어로 말했다.
“회의 중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내부적으로 이견이 생겨서요. 하하.”
그는 오 부회장과 지혁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
“열정이 과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쉬었다가 하는 게 어떨까요?”
톰 쿡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렇게 하시죠.”
***
피치사에서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빈 회의실을 하나 내주었고.
최 부회장은 직원들과 들어가기 전에, 법인장에게 말했다.
“자리 좀 피해주게.”
“네?”
법인장은 최 부회장, 오 부회장, 지혁을 한 번씩 돌아보았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만 회의실에 남았다.
최 부회장은 직원들 발소리가 회의실에서 멀어진 걸 확인 후, 말했다.
“이제, 편하게 얘기할까요. 선도그룹이 콩가루 집안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낼 순 없잖아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오 부회장이 얼굴을 붉히며 대꾸하자, 최 부회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목한 집안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핏대 세우고 싸웁니까?”
“······.”
오 부회장은 가만히 있다가, 지혁을 보며 말했다.
“집안이 문제가 아니라, 미꾸라지 같은 놈이 문제죠. 어디 하극상을······.”
“······.”
“경영자도 아니고 옆에서 수발이나 드는 비서 주제에, 겨우 이사 따위가 어딜 나서?”
오 부회장은 좀 전에 체면 깎인 게 분한지, 또 쏟아내려 했다.
“회장님이 오냐오냐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이 건방진.”
지혁은 귀를 후빈 후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요. 그래서 계획이 뭔데요?”
오 부회장의 눈이 커졌다.
‘계획?’
그제야 생각이 났다. 본인이 좀 전에 회의실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 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지혁과의 언쟁을 벌이는 도중, 피치사 소송 건으로 흥분되었던 머리가 식혀져 있었다.
“다 필요 없고, 소송 전 가자면서요.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 아니었어요?”
“······.”
“말씀해 보세요. 계획이 뭐였냐니까요? 의견, 미팅 다 무시하고 밀어 붙었으면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지혁은 그를 몰아세웠다.
“설마······ 리셉션에서 환영 못 받은 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오 부회장의 얼굴이 빨개졌다.
“에이~ 아니겠죠. 그룹 회장 되실 거란 분이 그렇게 속이 좁을 리가······.”
최 부회장도 오 부회장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래, 실수했다.’
오 부회장은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아주 사소하지만, 불쾌한 기분 때문에 실수할 뻔했다.
인정은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뱉은 말.
당위성보다 체면이 중요한 사람이기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와서 실수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직원들과 피치사 앞에서 뱉은 말이야.’
오 부회장은 체면이 깎이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방법은 어떻게든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일단 표명한 입장은 그대로 가야 했다.
“계획은 앞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리고 내가 너한테 그런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어.”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는 거거든.”
지혁에게 밀리는 듯하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직급으로 밀어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최 부회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간담회 때와 비슷해.’
특히, 지혁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공적인 이유인 듯하면서도······ 묘하게 개인적이란 말이야.’
회사를 위한 듯 반대의견을 말했지만,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처럼 결사적이었다.
비서실장, 오 회장 눈의 역할로 온 지혁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것도 차기 오너가 될 사람에게 말이다.
최 부회장 또한 오 부회장의 급진적인 결정에 반대하며, 지혁의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선도그룹을 개인 회사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지혁이 말을 하려는데, 최 부회장이 막았다.
“잠깐만, 오 실장.”
지혁은 생각했다.
‘설마 오 부회장 의견에 동조하려는 건 아니겠지?’
“두 사람 얘기는 잘 들었고요.”
“······.”
“지금부터는 제가 정리합니다.”
오 부회장은 바로 반발하려다가.
최 부회장의 눈을 마주하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선도그룹 샐러리맨의 신화. 온 직원의 존경을 받는 최 부회장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입 다물어.’
***
“휴식 시간 거의 끝났거든요. 이제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
“두 사람은 회의장 말고, 바로 호텔로 가세요.”
“뭐요?”
오 부회장이 황당해하며 반문했지만, 최 부회장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미팅은 거의 끝났어요. 서로 필요한 얘기도 다 했고, 견해차도 확인했어요.”
“······.”
“이제 결정만 내리면 되니, 먼저 들어가라는 거예요. 최종 정리는 내가 할 거니까.”
“결정권자는 난데요?”
최 부회장은 오 부회장의 눈을 똑바로 봤다.
“회장님 말씀 잊었어요?”
“네?”
“결정할 때 제 얘기를 반드시 들으라고.”
“얘기를 들으라고 했지, 최 부회장님이 최종 의사결정하라는 말씀이 아닐 텐데요?”
“지금 다른 사람 말 들을 멘탈이 아닌 거 같아서요.”
‘흠칫.’
최 부회장은 차가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건 그룹 차원의 일인데요. 선도그룹에서 회장 다음 직책이 누굽니까?”
“······.”
이 말에 오 부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같은 부회장이지만, 미래기획실장이 그룹 서열 2위다. 선도전자의 최고직책자 오 부회장은 서열 3위.
실질적인 권력구조는 어떨지 몰라도, 공식 서열은 이렇다.
게다가······.
최 부회장이 정색하고 나오는데, 아무리 오 부회장이라도 감히 막 나갈 수는 없었다.
오 회장도 최 부회장에게는 함부로 못 한다.
“저, 기억할 겁니다.”
“부회장님 뒤끝 있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최 부회장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좋을 대로 하셔요.”
“쳇.”
쾅!
오 부회장은 뒤도 보지 않고, 나가버렸고.
최 부회장은 지혁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수고했네. 지금부턴 내가 할 테니, 먼저 가서 좀 쉬게.”
최 부회장은 지혁을 뒤로하고 회의실로 들어갔고.
약 10분 만에 모든 사안을 정리했다.
오 부회장이 급발진하기 전에 어느 정도 협의가 맞춰진 상황이었어서,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부회장을 함께 보낸 것. 오 회장의 생각이 맞았다.
그룹에서 오 부회장이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인 최 부회장이 없었다면, 회의는 산으로 갈 뻔했다.
“아까 두 분은 괜찮은 거죠?”
협의를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톰 쿡이 최 부회장에게 물었다.
“하하. 네. 회의 중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다 보니.”
“괜찮습니다. 저희도 종종 그러는데요.”
톰 쿡은 살짝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까 저희 개발자와 바디랭귀지 하신 분······.”
“네, 비서실장 말씀이시군요.”
“비서실장이요?”
“네, 회장실 비서실장입니다.”
“와, 그렇게 젊은 분이 회장실 비서실장을 하나요? 그럼, 직급도 높겠네요?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역시······.”
톰 쿡은 지혁에게 관심을 보였다.
“비서실장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습니까?”
“네?”
“아~”
톰 쿡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올해 한국 출장 계획이 있는데요. 방문하게 되면 회장님 좀 뵈었으면 해서요.”
“하하.”
최 부회장은 가볍게 웃으며 생각했다.
‘괜히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겠어. 사람 볼 줄 아는군.’
오 회장 핑계를 대며, 은근슬쩍 지혁에게 접촉할 방법을 알아보려는 거였다.
“글쎄요. 그건······.”
‘하지만, 비서실장은 안 되지.’
“선도그룹 회장실 공식 번호를 활용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저한테 연락해주셔도 되고요.”
최 부회장은 자연스럽게 지혁의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고.
“······.”
톰 쿡은 아무 말 않고, 웃었다.
***
그날 저녁.
피곤함에 다들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다.
하룻밤 자고 내일 오후 귀국한다. 최고직책자들이라 일정이 빠듯하여, 미국까지 왔어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이게 출장 온 건지, 극기 훈련을 온 건지······.”
윤 부장은 졸려 죽겠지만, 아쉬워서 도저히 못 자겠다며 지혁을 끌고 호텔 라운지로 왔다.
두 사람은 뉴욕 야경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괜찮겠어?”
“뭐가요?”
“좀 위험해 보이던데. 오 부회장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지혁은 피식 웃고는 잔을 비웠다.
“저라고 그러고 싶겠습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랬던 거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부회장한테는 너무 공격적으로 대하지 마~ 오 실장님 회사에서 오래 보고 싶어.”
“······.”
“월세 받는 사람이 집주인한테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지혁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고, 다른 얘기를 했다.
“아, 얘기 좀 들어봤어요?”
출장 전, 지혁은 윤 부장에게 선도전자 직원들이 오 부회장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어봐달라고 했었다.
“어, 별다른 건 없었는데.”
윤 부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선도전자 비서실 직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 있더라? 사람을 찾고 있는 건지······.”
“사람이요?”
“어, 난 처음 듣는 이름이었거든?”
윤 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진원? 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