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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45화 (145/301)

145. 트라우마 (1)

오 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지혁에게 물었다.

“괜찮으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봐라. 왜 그런 거였나?”

“······.”

“진양이가 무슨 실수를 했길래, 네가 흥분한 거야? 아, 우리 지금은 편하게 얘기하지. 큰아버지와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말해 봐.”

지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다 아시면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난 진양이와 너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나와 종원이 같은 일은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아.”

“······.”

“얘기해봐라. 괜찮아.”

이제 말을 안 할 수도,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지혁은 모르겠다 싶어서 그냥 얘기했다.

“진양 형님이 극단적인 결정을 하려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웬만하면 형님 의견을 따르려 했으나, 그룹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결정이라 생각돼서······.”

“그래, 자세하게 얘기해 봐.”

지혁은 회의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협의가 잘 끝나려는데, 오 부회장이 갑자기 흥분하며 일을 그르치려 할 뻔했다는 것.

숨기지 않고 그대로 얘기했다.

“그 녀석이 왜 그랬을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 부회장이 리셉션에서 여직원을 상대한 이후부터 기분이 안 좋았고.

그 영향으로 그런 극단적인 일을 벌였다고 지혁은 생각했지만.

이건 추측이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사소한 거 때문에 그랬겠지.”

오 회장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얘기했다.

“큰아버지가 이럴 때마다 걱정이 크다. 네 형이 장점이 많은 사람인데. 약간의 단점이 너무 커서······.”

오 부회장의 급진적인 성향을 말하는 거였다. 기분이 나쁠 때면, 앞뒤 안 가리고 질주하고 마는.

“그래도 최 부회장의 말은 들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네, 최 부회장이 적절할 때 잘 나서 주셨습니다.”

오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지혁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막았기 때문에 얘기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네?”

“그 친구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나서는 거 싫어하거든.”

지혁은 이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최 부회장에게 얘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최 부회장은 한국에 오자마자 하루 쉬고 베트남 출장을 갔다.

최 부회장이 미국 현지에 있을 때, 두 사람은 통화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오 부회장을 감시하는 목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보려고 했겠지.’

지혁은 오 회장이 자신에게 잘해주지만,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

“가능성을 봤다.”

오 회장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양이가 앞으로 네 말을 잘 들을 수도 있겠더구나.”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 부회장이 내 말을 잘 들을 거라고? 어려운 가능성에 목메는 것보다는······.’

지혁은 오 회장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차기 회장을 다른 사람 시키는 게 나을 텐데. 자식들도 많으면서.’

후계에 대한 오 회장의 확고한 생각을 확인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손에 혈연의 피를 묻히기 싫었기 때문에.

오 회장의 확고한 생각만큼, 지혁 또한 확고했다.

‘오 부회장은 절대 안 돼.’

오 부회장에 대한 얘기가 끝이 난 후, 지혁은 일일 보고했고.

오 회장은 별다른 의견 없이 묵묵히 들었다.

보고가 끝난 뒤.

“오 실장.”

“네, 회장님.”

“이번 주말엔 와라.”

“네?”

“제수씨와 질부 말이야.”

“아······.”

지혁이 섣불리 대답을 못 하자, 오 회장은 피식 웃고는 못을 박듯 말했다.

“언제까지 미루려는 거야? 네 큰어머니한테도 토요일 저녁에 식사 준비해 놓으라고 했으니까.”

“······.”

“왜? 그날 무슨 일 있나?”

지혁은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일. 가족이 되었으면 만나야지.’

어머니가 내켜 하지는 않겠지만, 초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좋았어. 하하.”

오 회장은 가족 간의 만남이 기대되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오면 막내도······ 아 너한테는 그래도 누나겠구나.”

‘막내?’

“혜빈이가 휴식 기간이라고 엊그제 한국에 들어왔거든.”

‘오혜빈.’

예전에 한 전무에게 한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늦둥이 막내딸.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이며 형제 중 가장 명석한 인물로 평가받는다고.

“잘됐네. 겸사겸사 서로 얼굴도 익히고.”

지혁도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건 잘됐네. 갈 이유가 생겼어. 그러면 당연히 가야지.’

오 회장의 모든 자녀를 확인하는 건 지혁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오 부회장의 다음을 생각해야 하니까.

***

다음날. 금요일 오후.

지혁은 사무실을 나서며 지원팀장에게 말했다.

“저 오후 반차 냈으니까, 참고하세요.”

“어디 가십니까?”

지혁은 오늘 정신과에 상담받으러 병원에 간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가 왠지 꺼려졌다.

“그냥 개인적인 볼일이에요. 저 반차 낸 건 회장님도 알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강남에 있는 선도서울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데······.’

생활하는 데 딱히 지장은 없다.

간혹, ‘그 세계’를 떠올릴 만한 걸 보면, 과호흡 증상이 오는 게 문제인데.

그 또한 몇 번 없었다.

이 정도로 굳이 병원을 가야 하나 싶었지만······.

‘여러 사람 걱정 끼친 건 사실이니까.’

과호흡으로 정신을 잃었던 적이 두 차례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가보는 게 맞겠다 싶었다.

선도서울병원 도착.

“안녕하세요. 예약하고 왔습니다.”

“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오지혁입니다.”

“오지혁 씨······.”

여직원은 한참 찾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요?”

지혁은 생각했다.

‘예약해 주신다더니······ 본인 성함으로 예약하셨나?’

“혹시 오종건 회장님이 오늘 오후로 예약 잡아 놓으신 거 없으십니까?”

여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종건? 선도그룹 오 회장님이요?”

“네.”

“자, 잠시만요.”

여직원은 놀란 눈으로 빠르게 검색했다. 선도서울병원은 선도그룹에 속해 있으며,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오 회장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잠시 후, 여직원은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혹시 비서실장님?!”

“네, 맞습니다.”

“어머. 죄송합니다. 회장실에서 직책명으로 예약하셔서.”

“하하. 괜찮습니다.”

여직원이 재빨리 전화를 걸었고.

5분도 안 되어, 어디선가 다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러 명이 다가왔고, 그 중 앞장선 중년 남성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원장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지혁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인사했다.

“비서실장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룹 회장실의 비서실장이다.

그룹 내의 영향력은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대단한 자리다. 직급은 그 다음 문제였다.

아직 익숙지 않아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정신병 검사하러 와서, 이런 극진한 대우를 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이동 중에 부원장은 사람 좋은 미소로 물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

지혁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부원장은 예약기록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아, 상담받으러 오셨군요. 선도서울병원 정신과 최고 전문의가 대기 중입니다.”

지혁은 불편한 얼굴로 생각했다.

‘굳이, 그렇게 꼭······.’

“요즘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요. 이럴 때 상담하면 좋다고 하더라고요?”

지혁답지 않게 변명처럼 말했고, 부원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필요하시면 약도 처방해드릴 테니까. 상담하실 때 편하게 말씀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느덧 정신과 앞에 도착했고.

부원장은 뒤에 선 의사들과 함께 인사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정신병 또한 얼마든지 처방받고 치료할 수 있는 병일 뿐입니다.”

지혁의 표정이 썩어가고 있었다.

“비서실장님의 치유를 위해 우리 선도서울병원이······.”

“수고하세요.”

지혁은 인사를 끝까지 듣지 않고, 진찰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안녕하십니까!”

프런트 앞에 선 간호사들이 각 잡고 인사했다.

이미 누가 왔는지 전해진 모양이다.

선도그룹 회장실. 그것도 비서실장이 왔다고 하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멀찍이서 구경 중인 간호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비서실장님이 진짜 젊다.

-회장님 조카라며.

-너무 멋지다. 혹시······.

-야, 꿈 깨. 오래전에 결혼하셨대.

“상담받으러 왔는데요.”

“네, 1 상담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상담 선생님이 먼저 진행하실 겁니다.”

“네.”

‘바로 의사를 만나는 게 아닌가?’

정신과는 처음이라, 지혁은 안내받은 대로 갔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니,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상담실 밖 간호사들에 비해서는 차분해 보였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이 보였다.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하세요.”

이건 지혁이 한 말이었다.

“어머, 제가 할 소리를. 네, 감사합니다.”

상담사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면요. 저와 대화를 나누신 후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실 거예요.”

“네.”

“전 대화를 통해······ 아, 직책 말고 성함을 불러도 될까요?”

“당연한 말씀을. 전 여기 환자로 왔습니다.”

“호호. 네.”

지혁이 편안하게 대해주니, 그녀의 떨리던 손이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릴게요. 전 대화를 통해 오지혁 씨의 상태를 파악할 거고요. 그 기록을 토대로 전문의께서 치료해주실 거예요.”

“······.”

“제가 여러 가지 물어볼 건데요. 대답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면 싫다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네, 등받이에 기대시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에서 말씀해주세요.”

“네.”

상담사는 지혁에게 물었다.

“최근에 어떤 불편함을 느끼셨나요?”

“이틀 전 공항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졌었습니다.”

“신체적인 문제는 아니고요?”

“네. 정밀 검사 결과 몸에는 이상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비슷한 증상을 과거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나요?”

“네. 과호흡으로 쓰러진 건 이번이 두 번째고요. 그때도 공항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쓰러지진 않았으나, 몇 차례 과호흡이 있었습니다.”

“흠······ 네.”

상담사는 뭔가를 적고는 물었다.

“잠은 잘 주무시나요?”

“저는 잘 잔다고 생각합니다만, 주변 사람은 그렇게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약간의 예민한 소리에도 바로 눈이 떠지고, 금세 잠을 깨버리거든요.”

“깊이 못 주무시는군요. 그 외에도 특별한 증상이 있을까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행동 혹은 습관이라든지······.”

지혁은 고민했다.

‘칼 들고 다니는 얘기를 해도 될까.’

품속에 과도를 넣고 다니며, 불안함을 느낄 때면 만지작거린다. 자신을 보호할 무기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안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외에 주변 경계를 심하게 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과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PTSD로 보이는군요. 정확한 진단은 전문의께서 해주실 거고요.”

상담사는 지혁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지혁은 기분이 이상했다.

“상담 내용은 비밀이 보장됩니다.”

“······.”

“어떤 말씀이든 하셔도 돼요. 이상해도, 말이 안 되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혁은 이상하게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왜 지혁 씨는······.”

상담사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말해도 돼. 괜찮아.’

“그런 과호흡 증상을 느낀 걸까요?”

주르륵.

지혁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저의 소중한 사람들이······.”

주르륵.

“끔찍한 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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