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자꾸 들리는 이름
“어?”
오 부회장은 당황했다.
‘혜빈이가······.’
형제 중에 오혜빈만이 유일하게 오 부회장과 가깝게 지냈다.
막낸 데다가 욕심이 없어서 오 부회장은 그녀를 잘 챙겼고.
오혜빈 또한 오 부회장을 오빠, 혹은 아빠처럼 잘 따랐다.
‘내 말을 거역한 적은 없었는데.’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랬니?”
“네~ 진원 오빠가 분명 진양 오빠가 물어볼 거라면서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고요?”
“뭐?”
‘걔가 날 콕 집어서 얘기한 거야?’
“그럼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해줘도 되고?”
옆에서 듣고 있던 오 사장의 물음에 오혜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당연히 아니지.”
“······.”
“특히, 형제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지혁도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왜일까. 오진원은 왜 자기 행방을 숨기려 하는 걸까?’
“혜빈아~ 그러지 말고, 오빠한테 전화번호 알려줘. 진원이 잘 지내는지 걱정되어서 그래.”
“안부는 제가 확인했는데요. 뭐.”
“전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오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한테 얘기하세요. 전해드릴게요.”
“······.”
“대신 전하면 안 되는 얘기인가요?”
오혜빈은 순진한 얼굴로 물었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군.’
지혁은 순진한 표정 속에 숨긴 오혜빈의 명민함을 보고 있었다.
‘오진양과 오진원 사이에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떠보고 있어.’
오 부회장도 지혁과 비슷한 걸 느꼈는지 놀란 눈치였다.
“네? 오빠?”
오혜빈은 순진한 얼굴로 오 부회장에게 되물었고.
“응? 어······ 뭐, 비밀 얘기는 아닌데. 내가 직접 전하고 싶어서.”
오혜빈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진원 오빠와 통화할 때 물어볼게요.”
“······.”
“진양 오빠가 전할 말이 있다는데,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는지.”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 부회장은 더 물어보지 못했다.
지혁이 보기에 오 부회장의 어정쩡한 태도도 이상했지만. 오혜빈의 행동도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연락처를 알려주고,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오혜빈은 끝끝내 오진원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어쨌든 의리 있는 거잖아. 마음에 드네.’
이마의 색도 그렇고.
여러모로 오혜빈의 첫인상이 좋게 느껴졌다.
***
지혁은 술기운을 없애려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오 회장, 큰어머니와 대화 중이었고.
수아는 오혜빈과 죽이 잘 맞아서 수다 떨고 있었다.
오 부회장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지혁.”
오혜진 사장이 지혁에게 다가왔다.
“네, 언제 오시나 했어요.”
모종의 관계. 두 사람은 선도물산에서 송 상무를 쳐낼 때부터 한 팀이었다.
최근엔 왕래가 없었는데, 거기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 전무님 통해서 연락 한 번 주실 줄 알았는데.”
“그래? 네가 연락해도 되잖아.”
말은 편하게 하지만, 지혁을 대하는 오 사장의 태도는 예전과 아주 달랐다.
조금도 하대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 사장님 바쁘시잖아요~”
“호호.”
오 사장은 가볍게 웃었고, 지혁은 은근슬쩍 말했다.
“요즘도 관계사들과 비밀모임 하시나요?”
이 말에 오 사장은 흠칫 놀랐다.
자기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 사장은 관계사 요직에 심은 사람들과 정기적인 비밀 회동을 하며.
현황을 보고 받고, 유능한 사람은 회유하여 자기 세력으로 만든다.
지혁 또한 그 과정을 거쳐서 오 사장을 만났었다.
“그거 조심하셔야 해요. 얼마 전에 강 전무 어떻게 됐는지 보셨잖아요.”
“······.”
“아, 뭐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가서 발설한다거나 그럴 의도로 얘기한 건 아니고요.”
오 사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지혁이 이젠 어려워졌다.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데다가.
오 회장과 가장 가까이 있으며, 신임도 얻고 있다.
직책과 직급은 오 사장이 위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지금은 누가 상위 포지션에 있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 뭐 필요한 거 있니?”
오 사장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지혁의 은근한 협박을 알아차렸고, 먼저 물었다.
“진양 형님과 진원 형님. 둘이 어떤 사이에요?”
“······.”
“둘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오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잘 몰라. 한 가지 분명한 건 두 사람은 후계 자리를 두고 공식적으로 비교당했었어.”
“······.”
“알다시피, 대세를 무릅쓰고 결국엔 진양 오빠가 되었지만. 신경 쓰이겠지.”
이건 지혁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게 다예요?”
“나도 궁금해. 진양 오빠가 왜 그렇게 진원이를 찾으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죠?”
지혁의 채근을 들으며, 오 사장은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된 거야. 내가 압박을 받는 쪽이라니.’
오 사장보다 까마득한 아래에 팀장으로 있던 오지혁이 맞나 싶었다. 그게 겨우 1년 전이다.
“정말 몰라.”
“흠······그렇군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에 대해선 더 묻지 않았다.
“선도물산은 별일 없죠?”
“응?”
“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유 본부장의 자리에 대한 걸 말한 거였고.
오 사장은 곧바로 알아듣고, 얼굴이 굳었다.
유 본부장은 내리고, 상품본부장이라는 요직에 자기 사람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이미 인사발령 지시를 한 전무에게 해놓은 상황.
굳은 표정의 오 사장을 보며, 지혁은 뱉듯이 말했다.
“선도물산 한번 가봐야겠네.”
오 사장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혁은 오 회장의 자녀 중 한 명을 지배해 가고 있었다.
***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없는 월요일을 보낸 후.
화요일 아침. 비서실 주간 미팅.
“이상 보고 마칩니다.”
지원팀에 이어, 의전팀까지 보고를 마쳤다.
지혁은 테이블 정중앙에 앉아,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의전팀장님.”
“네.”
“금일 오후에 회장님 일정 없는 거죠?”
“네, 없습니다.”
“회장님께는 제가 보고드릴 거니까. 오늘 오후에 선도물산 일정 좀 잡아주세요.”
“선도물산이요? 회장님이 가시는 겁니까?”
“아니요. 저만 갑니다.”
“근데, 왜 의전팀을······.”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비서실장이 비서실 팀원들 데리고 움직인다는데, 뭐 문제 될 거 있나요?”
지혁의 톡 쏘는 말에 의전팀장은 바로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지혁은 지원팀장도 불렀다.
“지원팀장님?”
“네.”
“지원팀도 회장님 지원 인력 최소한만 두고, 전원 선도물산 방문에 함께 해주세요. 특히, 고 차장님은 동행해주시고.”
“알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상 회의 마칩니다. 윤 부장, 고 차장은 남아주세요.”
비서실 직원들이 다 빠져나간 뒤, 두 사람만 남았다.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요즘 분위기 어때요?”
“뭐가?”
“저 두 팀장 말이에요.”
오 부회장의 사람들을 말한 거였고, 윤 부장이 대답했다.
“글쎄, 의전팀장은 별다른 건 없고······ 나를 좀 지켜보는 거 같긴 해. 그 외엔 뭐.”
두 팀장도 윤 부장과 고 차장이 지혁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지원팀장은요?”
고 차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분도 처음엔 제가 뭐 할 때마다 관찰했는데, 뒤에서 쥐새끼처럼 훔쳐보는 거 정말 싫어한다고, 궁금한 거 있으면 다 알려드릴 테니 앞에서 물어보라고 한 말씀 올렸더니, 그다음부턴 안 그러시더라고요.”
지혁과 윤 부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여간, 고 차장답다.’
“그리고 지원팀장은 비서실장님을 많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처음엔 어려워서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진심이더라고요. 특히, 전 비서실장이 나가게 된 얘기를 종종 하면서, 그때 많이 탄복했다고요. 지원팀으로 오게 해주신 것도 정말 고마워하고요.”
“······.”
“전반적으로 이 분이 과연 오 부회장님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지혁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원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건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 차장에게서 보고가 없었다.
성격 급한 사람이란 걸 알기에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로 생각하고 기다렸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회장님 댁에서 그 분에 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요. 지원팀장이 혹시 알까 싶어서 떠보기도 했는데, 그 또한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고 차장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급한 마음에 집안을 뒤져보기도 했습니다. 뭔가 단서라도 찾을까 싶어서.”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위험한 행동은 안 하는 게 좋아요. CCTV가 많아요.”
“알고 있습니다. 사각지대 고려해서 은밀히 움직였습니다.”
“······.”
“그런데도 찾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확신은 들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오진원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것.”
“······.”
“그렇지 않다면 사진 하나 발견 못 할 수가 없거든요.”
‘도대체 뭘까?’
파면 팔수록 궁금증이 더해갔다.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일지도.’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겠어요. 앞으로도 오진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계속 예의주시해 주세요. 윤 부장님도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선도물산 갈 거니까, 준비하세요.”
윤 부장이 물었다.
“근데, 왜 가는 거야? 비서실까지 다 대동해서?”
지혁은 씩 웃고는 말했다.
“신임 대표가 왔다니까,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 외에 뭐 중요한 일도 있고. 하하.”
***
선도물산.
검은색 세단 세 대가 섰고.
정문 앞에는 선도물산 대표이사와 부사장 등 임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조수석 앉은 직원이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고.
검은 정장에 남색 넥타이를 맨 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잉-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불었고.
지혁의 넥타이와 재킷이 바람에 흔들렸다.
의전팀과 지원팀 전 비서실 직원들이 뒤따라 차에서 내렸고.
6명의 비서실 직원들을 뒤로하고, 지혁이 앞에 섰다.
꿀꺽.
선도그룹 회장 비서실.
압도적 위압감에 선도물산 대표는 침을 삼켰다.
‘정신 차려야지.’
그는 두 손을 뻗으며 지혁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비서실장님~”
대표이사는 두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고, 지혁은 왼손으로 오른팔을 가볍게 받치며 악수를 받았다.
“처음 뵙습니다. 오지혁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영광입니다. 오시는 길 힘들지 않으셨나요? 반포대교로 오셨죠? 길 좀 막혔을 거 같은데.”
“그래 봐야, 같은 서울인데요. 오래 안 걸렸습니다.”
대표이사는 연신 굽신거렸고.
지혁은 뒤쪽에 도열해 있는 임원들을 보았다.
대부분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비서실장님, 인사드립니다.”
대표이사 옆에 선 부사장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사장 또한 지혁이 잘 아는 사람이다.
한때, 함께 일을 도모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큰일 한 번 치르고, 단번에 영업본부장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인물.
한원철 전무.
지혁은 반갑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개 드세요.”
한 전무는 고개를 들었고.
지혁은 웃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났고. 지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최대한 예의 있게 대했다.
이제 그는 과거에 영업본부장이 알던 오 팀장이 아니었으니까.
“왜 이러세요. 우리 사이에.”
지혁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고.
한 전무도 안심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