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눈과 귀 (2)
“그래요. 그럼 우리 이제 얘기 좀 편하게 할까요?”
서로 고맙다거나 잘 부탁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관계가 맞으니,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 거였다.
“우선 현재 선도물산의 권력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실래요?”
“······.”
“주관적인 의견인 거 감안하고 듣겠으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유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대표이사님은 오 부회장의 사람이고요. 한 전무는 오 사장님 사람입니다.”
지혁은 흠칫 놀랐다.
‘한 전무가 오 사장 사람인 걸 알고 있었어?’
지혁과 한 전무는 유 본부장에게 그들 위에 누가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었다.
“한 전무가 현재 선도물산 실세입니다. 신임 대표이사가 오기 전, 요직에 전부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고, 본부장급들은 모두 영업 출신들로 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 본부장은 본인이 아는 대로 쭉 설명하였고, 지혁이 이미 알고 있는 부분도 있었으나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새삼 유 본부장을 다시 봤다.
‘정보력 좋네. 역시, 머리는 좋은 사람이야.’
지혁은 예전에 함께 일할 때도 유 본부장의 능력 자체는 높게 평가했었다.
“그런데 신임 대표가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거든요. 제 자리인 상품본부장도 어제 대표가 원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오늘 갑자기 원복하긴 했지만요.”
이 말을 들으며 지혁은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신임 대표가 눈치는 빠른 사람이네.’
오늘 선도물산에서 푸닥거리할 생각으로 비서실 다 대동해서 온 거였으나, 유 본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럴 이유가 없어졌었다.
“지금은 오 사장 세력이 오 부회장보다 앞서고 있지만, 머지않아 비등해질 거로 보입니다.”
“네.”
지혁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유 본부장님은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던 거예요?”
“······.”
“본부장님 정도면 두 쪽 모두 영입을 원할 거 같은데.”
유 본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오 사장 쪽은 예전에 한번 파투가 났었고요. 제가 송 상무를 배신한 인물이라고, 그런 사람은 믿을 수 없다며······ 여기까지만 하자고 어느 분께서 말씀하셨었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저 말씀하시는 거죠? 한배 타기로 했는데, 그냥 대놓고 까셔도 돼요.”
“하하. 아,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신 건가요?”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로 인한 고립을 겪으셨잖아요. 학습을 하셨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요.”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는 분이니, 배신은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해요.”
지혁의 은근한 협박에 유 본부장은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게 오지혁의 본 모습이지.’
“정확하시네요. 맞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가 비서실장님은 배신 못 하죠.”
“하하.”
지혁은 큰 소리로 웃은 후 물었다.
“오 부회장 쪽은요?”
“제안은 왔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왜죠?”
“별다른 이유 없습니다. 제가 오 부회장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솔직히 말해서요.”
지혁은 속으로 웃었다.
‘오호······ 타이밍이 맞네.’
유 본부장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이 자리에 없는 분이니까 편하게 얘기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오 부회장이 제 입사 동기였거든요. 신입 입문 교육을 같이 받았는데, 그땐 지금 같지는 않았어요. 근데, 갈수록 이상해지더군요.”
“아~ 동기셨구나.”
“동기긴 했죠. 물론, 입문 교육 끝나자마자, 저는 사원, 그분은 부장님이 되셨지만. 하하.”
지혁도 빙그레 웃었다.
‘엇······ 혹시.’
뭔가 촉이 와서 물었다.
“혹시 오진원이라고······ 모르시죠?”
“알아요. 오 부회장 동생이잖아요.”
지혁의 눈이 커졌다.
‘유 본부장이 오진원을 안다고?’
“아세요?!”
“오 부회장은 저와 같은 조인데다가, 나이가 같기도 해서 신입 입문 교육 때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었어요.”
“······.”
“주말이면 합숙소에서 종종 맥주를 함께 마셨는데, 동생들 얘기를 자주 하더라고요.”
지혁은 그토록 궁금했던 오진원 얘기를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오 부회장이 누구 아들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의 가족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흥미로웠죠. 동생 중에서도 유독 오진원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유 본부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뭐랄까······ 애증 관계 같다고 할까요?”
“······.”
“아끼면서 미워하는? 그런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아끼면서 미워한다······.”
지혁이 그의 말을 되씹자, 유 본부장은 핑거스냅을 친 후 말했다.
“아! 질투라는 말이 어울리겠네요. 맞아요. 질투.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질투하는 모습을 본다는 게 너무 신기했죠.”
이후로, 몇 가지 알고 있는 얘기를 더 해주었고, 지혁은 다 들은 후 물었다.
“혹시 오진원의 행방은 모르시겠죠?”
“네~ 그건 모르죠. 그분과는 직접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데요. 오 부회장에게 전해 듣기만 했지.”
어쨌든, 유 본부장의 얘기를 들으며, 오 부회장과 오진원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졌다.
“오늘 여러모로 수확이 많네요.”
“네?”
“하하. 앞으로 잘해보시죠.”
지혁은 유 본부장과 악수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
선도물산 1층 로비.
일정을 다 마치고 지혁은 1층으로 내려왔는데, 마침 직원들 퇴근 시간과 겹쳤다.
직원들은 지혁을 보며 수군거렸다.
-와, 비서실장.
-그룹 비서실장······ 멋지다.
-뒤에 사람들 몰고 다니는 거 봐.
-저분은 잘될 줄 알았어. 회장님 조카였다는 건 좀 쇼킹했지만.
-아직 멀었어. 더 잘 되실 거야.
대표이사와 임원들이 지혁을 배웅하러 뒤따라 나왔다.
“나오시지 마시라니까요.”
“아닙니다. 언제 또 오실지 모르는데요. 확실하게 배웅해 드려야죠. 하하.”
“네? 저 자주 올 건데요?”
“······.”
대표이사의 얼굴이 대번에 새파래졌고.
지혁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너무 티 나게 좋아하시네~”
“네? 하하. 농담이셨어요? 에이~ 자주 오시지.”
“정말요?”
“······.”
대표이사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자, 옆에 있던 윤 부장이 장난 그만 치라며 지혁을 콕콕 찔렀다.
지혁은 웃으며 대표이사에게 말했다.
“다음엔 미리 연락드리고 올게요. 갑자기 와서 놀라게 해드렸었네요.”
“아닙니다. 미리 연락해주시면 더 잘 준비해서 모시겠습니다.”
“네, 다음엔 회장님도 모시고 올 거니까요. 저 근무하던 곳이 어떤지 궁금해하시거든요.”
“아, 회장님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지혁은 자꾸 대표이사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엔 농담 한마디 한다는 게,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 하게 되었다.
“그럼 이제 진짜 가보겠습니다.”
지혁은 현관문을 나서려다가.
“유 본부장님!”
“네, 비서실장님.”
지혁은 그를 살짝 포옹하며, 인사했다.
일부러 대표이사와 한 전무 보란 듯이 말이다.
“잘 지내세요. 뭐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주시고요.”
“네? 아, 네.”
유 본부장은 당황하여 대답했고, 대표이사는 불안한 얼굴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인사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인사팀장, 생산팀장, 상품기획 1팀원 등.
지혁은 배웅 나온 자기 사람들과 가벼운 포옹을 하며 살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문제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을 꼭 했다.
대표이사는 이 모습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
“회사로 가십니까?”
고 차장의 물음에 지혁이 대답했다.
“아니요. 밖에 볼일이 있어서요. 먼저들 들어가세요. 전 거기서 바로 퇴근할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비서실은 지혁을 신논현역에 내려준 뒤, 출발했다.
저녁 6시 30분.
지혁은 룸 형태로 된 술집에 들어갔고,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배고픈데, 빨리 오시지.”
잠시 후.
덜컹.
미닫이문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나?”
“부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최 부회장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천하의 비서실장님께서 술 한잔 하시자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 드시겠습니까? 마음껏 드십시오. 오늘 제가 쏩니다.”
“아~ 그래?!”
최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작에 얘기하지, 더 비싼 곳에 갔어야 하는데.”
“지금 자리 옮겨도 괜찮습니다. 저 돈 쓰는 데는 진심인 사람입니다.”
“됐네. 됐어.”
주문한 후.
음식이 나오는 동안 최 부회장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비서실장님이 왜 날 보자고 했을까?”
지혁이 최 부회장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히, 술 한잔하려고 보자고 한 게 아니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종업원의 인기척을 듣고,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배 좀 채우고 얘기하시죠. 저녁 때가 돼서 그런가 허기지네요.”
“허허. 그러시게.”
지혁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고.
그 모습을 최 부회장은 유심히 보았다.
‘뭔 식사를 저렇게 하냐. 음식을 잡아먹듯이 먹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필 음식도 찜닭. 뼈 발라 먹을 때의 지혁의 모습은······ 뭔가 좀 섬뜩했다.
으드득. 으드득.
일부 뼈는 씹어먹기까지 했다.
‘에이, 입맛 떨어지게.’
최 부회장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술만 연거푸 마셨다.
잠시 후.
“아~ 배 좀 차네요.”
“온종일 식사를 못 했나?”
“아니요. 오늘 머리 쓰는 일 좀 많이 했더니. 하하. 배가 좀 고팠네요.”
지혁은 휴지로 입가를 닦은 후,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오 부회장이 오진원을 왜 찾으려 할까요?”
“뭐?”
“그게 궁금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시잖아요.”
좀 전에는 맹수처럼 먹더니, 이젠 맹수의 눈빛으로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이게 사람 눈깔이야?’
최 부회장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 봐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지혁이 쏘아내는 안광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그건 왜 궁금한데.”
“주변 상황이 자꾸 궁금하게 만드니까요.”
“······.”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고.
그 또한 눈빛이 바뀌었다.
지혁의 눈빛이 혈기 넘치는 수사자와 같다면, 최 부회장 눈빛은 하늘 높은 곳에서 먹잇감을 관망하는 독수리 같았다.
“좋아. 그 전에 내가 먼저 물어보지.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나도 말해줄게.”
“······.”
“자네 어디까지 생각하나?”
“······.”
“자네 계획적인 거, 내 눈에는 보이거든? 그룹을 잠식해 가고 있잖아.”
지혁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야?”
***
지혁은 잠자코 있었고.
최 부회장은 기다리다가 한마디 더 했다.
“혹시,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건 아니지? 자네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 부회장만 아니면 됩니다.”
“······.”
“제 목표는 딱 하나. 오 부회장만 오너가 안 되면 됩니다.”
“······.”
“그 외에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다른 욕심은 없다?”
“네.”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어째 둘이 비슷하네.”
‘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봐, 오지혁.”
최 부회장은 지혁을 비서실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욕심을 좀 가지면 안 되겠나?”
“네?!”
“욕심을 좀 가지라고.”
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다 왜 욕심이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