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52화 (152/301)

152. 참았어야 했다

최 부회장은 훌쩍였다.

오진원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힘이 있었는데.

목소리 자체에 사람을 위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오랜만에 연락해서 그러신 거예요?]

오진원과는 어릴 적에 말을 편하게 했었지만, 지금 그는 마흔이 넘었다.

최 부회장은 말 편하게 하는 게 불편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 상무님, 지금 어디세요?”

오진원은 잠적하기 전까지, 선도그룹에서 상무 직급으로 있었다.

[······.]

오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무님.”

[부회장님.]

오진원이 말했다.

[제가 있는 곳은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

[때가 되면 제가 뵈러 갈게요.]

“어느 때요. 오 부회장이 회장직에 오를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최 부회장의 말에 오진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세요.”

[하하. 부회장님은 한결같으시네요.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몇 년이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저뿐만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오 상무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잠자코 듣던 오혜빈은 생각했다.

‘그냥 하는 소리? 아니면 진짜인가?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고?’

겉에서 보기엔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을 가질 만했다.

[괜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전 생각이 없다는데도······.]

“계속 외면하실 겁니까?”

[······.]

“뉴스도 보고, 소식도 듣고 계시죠?”

오진원은 명석하며, 지혁 못지않은 통찰력도 있는 사람이다.

최 부회장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었기에 확신하고 있었다. 몸은 떠나있어도 그룹을 지켜보고 있을 거란 걸.

최 부회장이 힘주어 말했다.

“상무님을 기다리는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타인을 생각하라는 말에 오진원은 약간 흔들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오빠?”

오혜빈은 전화가 끊겼나 싶어서 오진원을 불렀다.

[어, 혜빈아. 오빠, 잠깐 생각 중이라서.]

“응.”

최 부회장은 한마디 더 했다.

“일단 만나시죠. 그리고 소개 해주고픈 사람도 있습니다.”

오진원이 말했다.

[혹시, 새로 온 비서실장 말인가요?]

“네?!”

[절 만나고 싶다고 하던가요?]

“아, 네. 맞습니다.”

최 부회장은 오진원이 지혁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서, 오혜빈을 바라보니.

그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친구는 좀 궁금하긴 하네요.]

지혁의 얘기가 나오자, 그의 태도가 긍정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최 부회장은 기회다 싶어서 한 번 더 설득해보았다.

“그러니까,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시는 게······.”

오진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바빠서 가는 건 못합니다.]

***

일주일 뒤.

선도엔지니어링 이천 공장.

오 회장은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현장을 찾는다.

특히,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현장을 찾는데, 선도캠퍼스 간담회 이후로는 이 일정을 더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회장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황 차장이 말했다.

그는 의전팀장과 함께 오 회장의 근거리에서 수행 중이었다.

비서실장인 지혁은 오 회장이 외부 일정이 있을 때는 본사에서 대기한다.

오 회장이 공장 정문 안으로 들어가자, 공장장과 근로자 등이 도열해 있었다.

그중 선도엔지니어링 대표이사와 경영자급은 없었다. 현장 방문 시에는 회장 지시로 경영자들은 나오지 못하게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못 듣게 될까 봐 염려됐기 때문이다.

-회장님! 환영합니다!

-요즘 정말 일할 맛 납니다!

-감사합니다!

오 회장은 최근 현장을 다닐 때면, 달라진 분위기에 놀라곤 한다.

‘비서실장을 바꾼 게 그렇게 컸나?’

그룹에 크게 달라진 건 비서실장을 바꾼 것. 그리고 간담회에 나왔던 내용에 대해, TF팀을 구성하여 철저히 실행했다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확실히 전보다 활력이 있고, 직원들 표정도 밝아졌어.’

그런 현장 분위기 때문에 오 회장도 힘이 났으며, 함께 움직이는 회장 비서실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장, 요즘 뭐 힘든 건 없나?”

오 회장의 물음에 공장장이 말했다.

“요즘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일일 생산량이 오르고 있어서, 실적도 좋고~ 일할 맛 납니다.”

오 회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생산량이 오른다고? 간담회 이후 잔여 업무는 되도록 하지 않기로 지침 준 거로 알고 있는데?”

오 회장은 공장장이 시간 외 근무를 통해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물어본 거였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공장장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부조리한 관행들이 없어지면서,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어서요. 절대적인 근무 시간은 비슷하거나 도리어 줄어들었는데 생산량이 늘어난 겁니다. 아, 능률이 높아졌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래?”

“네~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면서 능률이 올랐고요. 시간 외 근무가 줄어드니, 인건비가 줄어들면서 수익성도 개선되고요.”

“······.”

공장장은 신나서 앞에 있는 사람이 회장이라는 것도 잊고 재잘재잘 말했다.

“과거엔 직원을 위해서 뭐 한다고 하면, 시늉만 하고 귀찮게만 하더니. 이번엔 미래기획실이 달랐습니다. 핀셋 교정이었고, 아주 정확했습니다. TF팀의 준 기준대로 움직였더니, 단기간에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 경험을 한 직원들의 경험을 토대로, TF 과제를 만든 거였으니까.

그 발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선도그룹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비서실장님 진짜 존경합니다. 젊은 분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 분을 알아보시고 발탁해주신 회장님은 더 존경하고요.”

공장장은 오 회장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지혁이가 정말 큰일 했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혁이 벌인 일의 여파가 드러나면서, 여러 곳에서 좋은 소식이 들렸다. 현장을 찾을수록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오 회장은 기분이 좋고 흐뭇하면서도.

가슴 속 어딘가 아주 약간은 불편한 기분도 느꼈다.

***

“죄송합니다. 다 알아봤는데, 공장 주변에 다 논지라서 공장 내부 화장실 말고는 없습니다.”

“재래식은 아니지?”

“네, 물 잘 내려갑니다.”

“그럼 됐어······.”

공장을 떠나기 전, 오 회장은 배가 너무 아파서 화장실을 가야 했다.

웬만하면 직원들과 함께 쓰는 화장실은 피하고 싶었으나.

‘좀 불편해도 감수해야지.’

급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공동 화장실에서 괄약근에 힘주고 있었는데.

“오늘 회장님 봤어?”

“봤지~ TV로만 보던 분을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더라.”

칸막이 밖으로 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화장실은 너무 오랜만인 데다가, 본인 얘기가 들리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연세 많이 드셨더라.”

“올해 여든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쯤 되었을 거야. 한편으론 대단하셔. 그 나이에도 현장을 다니시는 거 보면.”

“좋은 건 다 드실 텐데 뭐. 신기할 것도 없지. 아마 정력도 좋으실 거야.”

중년 이상 된 남성들은 정력에 관심이 많다. 고령임에도 정정한 오 회장의 모습을 보니, 주제는 바로 정력으로 향했다.

“젊은 여자도 막 만나고 그러시겠지?”

“에이~ 당연하지. 돈 쌓아 놓고 뭐해~ 재미 보셔야지.”

“사모님이랑 사이좋아 보이던데.”

“그거 다~ 연기야. 연기.”

오 회장은 연기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조강지처 외에 눈길 한번 준 적 없는 날, 뭐로 보고.’

하지만,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오해는 받아들여야 한다. 구설수라는 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노령이셔도, 거긴 건장하실 거야.”

“하하. 그렇지~ 얼마나 좋은 걸 많이 드셨겠어.”

오 회장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젠장······ 참았어야 했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온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두 직원의 대화는 거침이 없었다.

“비서실장님이 회장님 조카라며.”

“그렇다더라.”

“조카는 회장 못 하는 거야?”

오 회장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

“글쎄. 못 될 게 있을까? 선도그룹이 왕조는 아니잖아.”

“야, 사실 왕조나 다름없지~”

“그런가?”

“자기들끼리 해 먹잖아~ 물려주고~ 물려받고~”

“하긴. 그렇긴 해. 근데 나라도 그럴 듯~ 피땀 흘려 모은 거 남을 왜 주냐? 내 자식한테 물려줘야지.”

“그럼, 비서실장은 힘들겠네.”

오 회장은 급한 불은 껐고, 인제 그만 끊고 나가고 싶었으나.

기다려야 했다. 지금 나가면 서로 불쾌해질 것 같았다.

“그 사람 좋던데.”

이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 회장이 공정한 사람이라면 오 부회장보다는······.”

덜컹.

말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 오 회장은 칸막이를 열고 나왔다.

오 회장은 손을 닦으며,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장실 왔으면 볼일이나 볼 것이지. 말 더럽게 많네. 에이, 다리 저려.”

***

지혁은 사무실에 있었다.

독방이 답답해서 사무실에는 잘 있지 않는데.

최근 외근을 자주 해서, 밀린 서류 업무가 많았다.

선도그룹 관계사의 모든 정보는 비서실로 모인다.

지혁은 정보를 분석하고, 위협을 예측하여 대비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관계사의 정보를 살피는 시간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아무리 바빠도 이 일은 집중해서 했다.

똑. 똑.

“네.”

지혁은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놀랐다.

“어? 부회장님. 안녕하세요.”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최 부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바쁜가?”

“아닙니다. 어쩐 일로?”

술집에서 단둘이 회동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진원 만나러 갈래?”

“네?!”

지혁은 놀라서 되물었다.

“성공하신 거예요?”

최 부회장은 미소와 함께 엄지를 치켜세웠다.

“자네 공이 컸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망설이던 오진원에게 지혁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더니, 그는 고민 끝에 수락했었다.

“글쎄, 곧 알게 되겠지. 갈 거지?”

“물론이죠. 언제요?”

“지금.”

지혁은 황당해서 웃었다.

“부회장님, 저 회사원이에요. 이렇게 마음대로 근무 시간에 나가면······.”

“회사원이지만, 비서실장이잖아. 누가 자네 앞을 막겠어?”

“······.”

“어서 준비하고 1층으로 내려와. 내 차로 갈 거야.”

지혁은 지원팀장에게 외근 일정을 알린 후, 1층으로 내려왔다.

최 부회장 차로 경기 북부 방향으로 약 1시간 정도 갔다.

“양주시?”

“가까운 곳에 있었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하신 거예요?”

“오 상무님이 바쁘데. 지금 시간 된다는 걸 나도 좀 전에 연락받았어.”

“아······.”

서울과 가까운 곳이지만, 큰 길가를 벗어나니 완연한 전원 풍경이 드러났다.

은은한 소똥 냄새.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 온 거 같은데.”

최 부회장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논두렁 한가운데에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설마······.”

‘그룹 회장님 아들이 저런 데 산다고?’

못해도 30년은 넘어 보이는 집이었다.

최 부회장도 믿기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일단 가보지.”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린 후 집 안을 살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논두렁 길을 걸어오는 어른 한 명이 있었는데.

“아······.”

아직 멀리 있어서 얼굴 생김새가 보이지 않았지만.

지혁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이구나.’

왜 사람들이 저 남자를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멀리서 봐도.

그에게서 빛이 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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