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이런 색이 있었어? (1)
오진원이 걸어오는 동안, 지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얼굴 윤곽이 보일 때쯤부터, 그의 이마에 집중했다.
다행히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색이 있었어?’
얼마 전 오 회장에게 봤던 ‘청자색’처럼, 지금까지 지혁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색이었다.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하얀 색.
오진원의 머리 주변으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걸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하나······ 골드 화이트?’
빛이 날 정도로 밝은 하얀색.
황 차장도 ‘하얀색’을 띄고 있지만, 그것과는 좀 달랐다.
‘아우라가 달라.’
오진원이 약간 성스럽게도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때문일까, 그가 가까이 올수록 경계심마저 들었다.
오진원 또한 지혁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오 상무님, 오랜만입니다.”
어느덧 눈앞에 선 오진원에게 최 부회장은 반갑게 인사했다.
“부회장님 안녕하세요. 진짜 오셨네요.”
“그럼요. 진짜로 와야죠. 하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최 부회장은 웃으면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았다.
‘울어?’
지혁은 신기해서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이 냉혈한 같은 분이······.’
최 부회장이 오진원 앞에서는 무장 해제가 된 듯,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지혁으로서는 신기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진원은 웃으며 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분이에요?”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오진원 앞에 공손히 섰다.
“네, 상무님. 그룹 비서실장 오지혁입니다.”
오진원은 지혁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오진원이라고 해요.”
“오지혁입니다. 반갑습니다.”
“제 친척 동생 되시죠?”
최 부회장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도 알고 있어? 바깥세상과는 담쌓고 지낸다고 하더니.’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혜빈이한테 들은 거지. 하하.”
“아······.”
“친척 동생이라니까, 더 반갑네요.”
“네, 저도요.”
지혁은 악수하면서 생각했다.
‘뭔 남자 손이 이렇게 부드러워?’
악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조용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힘이 있어.’
지혁은 온 육감을 동원해서 오진원을 파악하려 했다.
“죄송한데,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오진원은 뒤에 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돌아본 후 말했다.
“방과 후 교육 중인데, 아직 다 못 마쳤어요. 아이들이 현장학습 하고 싶다고 해서, 잠깐 나갔다 오느라.”
지혁은 땀자국이 가득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놀다 온 거겠지. 아이들이라도 배려해서 말을 포장해주네.’
최 부회장도 생각했다.
‘방과 후 교육? 뭘 하고 지냈던 거야? 가르치는 일을 한 건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서 볼일 보시죠. 기다릴게요.”
오진원은 최 부회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을 함께 들어가며, 오진원이 말했다.
“30분이면 돼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오래된 가옥의 대청마루에 세 남자는 마주 보고 앉았다.
“좀 누추해요. 청소는 최소한으로만 하고 살아서.”
오진원의 말에 최 부회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혼자 사는 남자 집치고, 이 정도면 깔끔하죠.”
그리고 궁금했던 걸 물었다.
“방과 후 교육은 뭔가요? 생계로 학원 선생님 하는 건가요?”
오진원은 씩 웃고는 말했다.
“집에서 쫓겨났어도, 혼자 지낼 정도의 돈은 충분히 있어요. 하하. 생계로 가르치는 건 아니고요.”
“······.”
“편부모나 조부모 하에 자라는 아이들. 혹은 부모님이 다 바빠서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거든요. 학교 마친 후, 보충 교육해주고 있어요.”
“무료로?”
“네.”
“아······ 봉사활동이구나.”
이 말에 오진원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봉사활동······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냥 소일거리로 하는 거예요. 아이들 만나는 거 좋고, 저도 온종일 혼자 지내는 게 적적하니까.”
“······.”
“아이들 방학 중이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네요.”
“아······ 그래서 요즘 바쁘다고 하셨던 거예요?”
“하하. 네.”
지혁은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보기 드문 사람이네. 욕심이 전혀 없어 보여.’
최 부회장이 말했다.
“그럼 그동안 계속 여기서 그 일 하면서······.”
오진원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외국에서 온 지 오래 안 됐어요.”
“아······ 어디에 계셨는데요?”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 쪽이에요.”
“여행 다니신 건가요?”
“여행도 하고~ 여기서 방과 후 교육하는 것처럼 봉사활동도 하고요.”
“······.”
“생판 모르는 남인데도, 절 필요로 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아, 그리고 저 캄보디아 언어도 좀 배워서 할 줄 아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하하.”
오진원은 해맑게 웃었고.
최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 웃었다.
‘파더 테레사야? 뭐야? 좀 과한데.’
이후 오진원은 해외 봉사활동 경험을 이야기해주었고.
꽤 박진감이 있으며, 듣는 재미가 있었다.
“하하. 그래서 사람 도우려다가 제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라오스에서 식수 지원사업 나갔다가, 말라리아 걸렸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 단하십니다.”
최 부회장은 한숨 섞인 대답을 했고.
지혁은 살며시 웃었다.
‘천사 같은 사람이네.’
그의 이마에서 보이는 색. 표정과 말투. 따뜻한 손길.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도, 지혁은 이미 그에게 충분한 호감을 느꼈다.
오진원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계속 제 얘기만 했네요. 어른과 대화하는 게 하도 오랜만이라. 하하.”
최 부회장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더 하세요.”
오진원은 웃으며 미소 짓고는 지혁을 바라봤다.
“날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그는 지혁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10살 차이의 사촌 형제 사이.
지혁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오진원은 지혁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배 안 고프니?”
“네?”
지혁은 당황했다.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밥 먹는 얘기를 할 줄은.
“저녁 6시가 넘었잖아. 난 배고픈데.”
그리고 대뜸 최 부회장에게 물었다.
“부회장님, 식사하고 가시죠?”
오진원은 대답은 듣지 않고, 지혁을 불렀다.
“지혁아, 따라와서 나 좀 도와주라. 빨리해서 밥 먹자.”
“아, 네.”
***
지혁은 얼떨결에 오진원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르신인 최 부회장은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오진원은 요리를 시작했다.
부엌이 낯선 지혁은 멀뚱히 서 있었는데.
“지혁아, 양파 좀 썰어.”
“어떻게 썰어야 하는데요?”
“음식 안 해봤어?”
“제가 칼질은 자신 있는데, 채소는 안 썰어 봤습니다.”
“그럼 뭘 썰어봤는데.”
지혁은 차마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뭐, 채소 말고 이것저것.”
“하하. 녀석. 무슨 소리야. 어렵게 생각 말고 그냥 잘게 썰면 돼.”
오진원은 요리하는 내내 지혁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데.
적합하고 효율적이었다.
지혁이 음식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걸 파악하고, 그에 맞게 활용했다.
주로 허드렛일 위주였으나, 어쨌든 극 초보자의 일손도 활용할 줄 알았고, 음식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사람 부리는 감각이 있네.’
보통은 이렇게 음식 못 하는 사람이면, 방해되니 나가달라고 하거나.
상 내놓고, 수저나 놓아달라고 한다.
지혁은 이런 오진원의 리더십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은근히 위엄도 있어.’
지시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저번에 최 부회장이 말한 리더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게······ 이런 건가?’
게다가 희한하게도 그의 말을 따르는 게 기뻤다.
따르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런 자기 자신이 신기했다.
“지혁아.”
“네.”
“이제 조리만 하면 되니까, 나가 있어도 되겠다. 부회장님 혼자 심심하시니까.”
“알겠어요.”
“그래. 금방 해서 나갈게.”
지혁은 손을 닦고 부엌을 나왔고,
대청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최 부회장을 보았다.
“뭐 하세요?”
지혁의 물음에 최 부회장이 대답했다.
“멍때리는 중이다. 이런 시간 보낸 게 언제 적인지 모르겠네. 내가 시급 얼마짜리 사람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멍때리는 중? 어르신이 그런 말도 쓸 줄 아세요?”
“이봐,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현역에 있는 사람이야. 이 정도 말은 할 줄 알지.”
지혁은 빙그레 웃었고.
최 부회장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자네 표정이 좀 밝아졌군?”
“네?”
“오 상무님 만나보니까, 어때?”
“······.”
“사람 참 매력 있지? 많은 사람이 그분을 기다리는 이유. 자네라면 이제 이해할 것 같은데.”
지혁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리더십의 소유자지.”
“······.”
“자네 아버지를 똑 닮았어.”
이 말에 지혁은 눈을 부릅떴다.
“스타일이 말이야. 자네 아버지 이미지가 딱 저랬거든.”
‘오진원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지 못한 얘기를 들으니, 오진원이 또 달리 보였다.
“오 상무님 빛나 보이지?”
최 부회장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지혁에게 말했다.
“근데, 자네도 오 상무님 못지않게 매력 있어.”
“네?”
“좀 다른 매력일 뿐이지.”
“······.”
“오 상무님 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네. 그 못지않은 사람이란 걸 말이야.”
그때 부엌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자~ 상 내갑니다~”
***
보글. 보글.
뚝배기 안에서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끝내주는 냄새.
지혁은 허기가 절로 올라왔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지혁이도 많이 먹어라.”
세 남자는 한동안 먹는 것에 집중했고.
고급 요릿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반주도 한잔하셔야죠.”
오진원은 소주도 한 잔씩 따라주었고.
된장찌개와 풋고추를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들이켰다.
“아~ 좋네. 어릴 적 생각나고.”
최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고.
지혁도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기분 좋네.’
그리고 식사 중인 오진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확신이란 건 이렇게 오는 거구나.’
계산도, 떠볼 필요도 없었다.
오진원은 좋은 사람이며, 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혁은 처음으로 ‘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상대했어도, 형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항상 지혁이 주도했었고, 상위 포지션에 있었으니까.
‘진원이 형이네.’
지혁은 피식 웃고는 오진원을 불렀다.
“형.”
“음?”
지혁의 부름에 오지원은 따뜻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까 저한테 왜 왔냐고 물어봤죠?”
“어, 그래. 이제 얘기해 봐라.”
지혁은 이 아름다운 사람을 독점하고 싶었다.
“회사로 돌아오셨으면 해요.”
‘회사’ 얘기가 나오자, 오진원의 젓가락질이 멈추었고.
최 부회장도 술잔을 내려놨다.